절은 부처님 만나는 곳

2010. 6. 1. 18:5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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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은 부처님 만나는 곳

- 이종린 (홍익소아과 원장)

 

사찰을 다른 말로 '절'이라 하는데, 그 이유가 '절을 많이 하는 곳'이라 그렇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절에 가면 우리는 다른 어떤 일보다 '절'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절에 가는 이유가 그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특히 사찰 순례를

갔을 때는 더 그러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찰 순례 때 보면, 불자 아닌 분들은

물론이고 불자님들도 하시는 일이 대개 대동소이한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대웅전 참배가 끝나면 사찰을 둘러보거나 역사, 문화재 설명을 보거나

듣습니다(안내인이 있는 경우). 이 절은 언제 지었으며 탑은 어느 시대 탑인지,

보물은 몇 개나 있는지 이런 설명을 보며 시간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불자가 아니라도 할 수 있는 일이며(실지로 유명한 불교미술가나

안내인 중엔 타종교인도 적지 않습니다.) 불자의 사찰 순례가 이런 정도로 끝난다면

어쩐지 실망스러워 보입니다. 불자라면 저는, 어느 절에 가든지 그곳에서

'부처님을 만날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절은 부처님 만나러 가는 곳입니다. 고려 시대 절인지 조선 시대 절인지,

탑이 보물인지 아닌지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그곳에 계시는 부처님을 뵈올

뿐입니다. 평상 시 잘 뵈올 수 없는 부처님을, 도량의 모습과 기운에서, 옛 선조들이

지극 정성 조성한 부처님 모습에서, 그리고 우리가 일으키는 지극한 밝은 마음에서

시간을 초월하여 계시는 부처님을 만나 뵙는 것입니다.  

 종종 삼사 순례라 하여 하루에 세 곳의 사찰을 도는 행사가 있는데,

그런 바쁜 마음으로 어찌 부처님을 만날 수 있으실는지….

 

그러면 어떻게 부처님을 만나 뵐까요?

   

첫째, 공경이 부처님 만나는 일입니다.

   

절에 가면 무엇을 하든, 늘 부처님께 대한 예경의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절을 하든 염불을 하든 공양을 하든 도반과 대화를 하든 울력을 하든,

마음은 언제 어느 때나 부처님 공경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할 일입니다.

또한 하늘의 구름도, 땅 위의 풀잎 하나도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닙니다.

절에서 만날 때는 그런 무정물에조차도 오롯이 공경하는 마음을 낼 일입니다.

   

둘째, 찬탄이 부처님 만나는 일입니다.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이라, 하늘과 땅에 부처님만한 분이

아니 계십니다. ≪화엄경≫의 시작이 부처님 찬탄으로 이뤄지듯, 부처님을

뵙게 되면 찬탄이 아니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찬탄의 대표적인 방법은 독경과 염불입니다. 따라서 절에서는

기회 나는 대로 부처님 전에 독경과 염불을 올릴 일입니다.

또한 하늘의 구름에도, 땅 위의 풀잎에도, 절에서 만날 때는 너 이쁘구나,

고맙다, 하고 오롯이 찬탄하는 마음을 낼 일입니다.

 

 셋째, 공양이 부처님 만나는 일입니다.

 

무엇을 공양 올릴 것인가? 물론 초, 향, 꽃 등을 공양 올릴 수도 있으나

누구나 잊지 말고 반드시 올려야 할 공양은 바로 '우리의 번뇌'입니다.

내 번뇌가 최상의 공양구인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 전에 번뇌를 공양 올리고, 내 마음에는 부처님 밝은 지혜,

밝은 자비를 담아 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번뇌 없는 이를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범부를 위해 오신 분, 선택받은 자의 부처님이 아니라 우리의

부처님이시니, 짐은 모두 부처님께 바쳐 버리고 우리는 빈 몸으로 가는 것입니다.

   

또한 부처님께 선정, 명상을 공양 올립니다. 도량 아무 곳에나 가만히 앉아,

우리 부처님 어디 계신고? 하고 그리워 해 봅니다. 우리 그리움 머무는 곳,

그리고 한 생각 밝은 마음 일으키는 곳, 그곳이 부처님 계시는 곳입니다.

 

 넷째, 참회가 부처님 만나는 길입니다.

 

 참회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장 보편적인 것은 '절'입니다. 그러므로

절에서는 절을 많이 할 일입니다. 한 번을 하든 열 번을 하든,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 전에 절을 올릴 때, 우리의 참회는 이루어집니다.

   

끝으로 원을 세우는 것이 부처님 만나는 일입니다.

 

원이란 무엇인가? 나를 위한 일은 욕심이지만 부처님을 위한 일은 원입니다.

내 기쁨을 위한 일은 욕심이지만, 부처님 기쁘게 하는 마음은 모두 원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부처님에 대한 맹세가 원입니다. 그러니 일마다 부처님을

기쁘게 해 드릴 마음을 내며, 내가 있는 곳에 부처님을 모셔올 일입니다.  

 

이렇게 절에서 부처님을 만나고, 금빛 부처님 앞에서 공경도 찬탄도 공양도

참회도 드리고 원도 세웠으면, 이제는 일터로 돌아와 삶터에서 부처님을

만날 일입니다.  단지 절에 있을 때만 부처님을 공경·찬탄하고, 절을 떠나

삶터로 돌아오면 공경도 찬탄도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올바른 불자의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절에서 만난 금빛 찬란한 부처님!

그리고 절에서 올린 그 많은 공경·찬탄, 그리고 공양과 원!

그리하여 밝아진 그 마음으로 이제는 삶터의 부처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기쁘게도 하고 애태우게도 하는 삶터의 수많은 부처님!

그 부처님을 공경, 찬탄, 공양, 참회하는 것이 절에서 돌아온 우리가 할 일입니다.

 

절은 이렇게 부처님을 만나고, 부처님을 내 삶에 모셔 오는 곳입니다.

 

 


* 이종린 님은 서울대학교 의대를 졸업. 현재 홍익소아과 원장으로 '보현행원' 수행 및

전법을 평생의 원으로 삼아 수행정진하고 있다.

저서에  ≪님은 나를 사랑하시어≫와 ≪실천보현행원≫이 있다.

 

이해(理解)는 아름다움의 시작입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이해(理解)가 안 되는 존재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해(理解)를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이해(理解)한다는 것은 서로간의 관계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해(理解)한다'는 말은 작은 말인 것 같지만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크게 다가올 때도 많습니다. 사랑해도 하나되기가 어렵지만 이해(理解)하면 누구나 쉽게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해(理解)라는 단어는 폭이 넓고 깊어 나이가 들어야만 자주 사용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이해(理解)되지 않는 사람 때문에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습니다. 생각의 폭을 넓히고 다양성을 인정하면 더 많은 사람과 사물과 사연을 이해(理解)할 수 있습니다. 이해(理解)는 아름다움의 시작입니다. - 정용철님의 "희망편지"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