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6. 18. 18:52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하로동선(夏爐冬扇)
단오날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된다.
선방은 하안거 결제인지라 산문을 걸어 잠그고 금족령이 내려진 채
여름한철을 참선정진하며 화두와 씨름하고 있을 터이다.
송나라의 쌍삼원(雙杉元)선사는
“참선하는 집안에서는 달이 차는지 이지러지는지 윤년(閏年)인지 아닌지도
전혀 모르다가 세모진 송편을 먹고 나서야 비로소 오늘이 단오인줄 알았다.
오늘 아침도 변함없이 찻잔에 차를 부어 대중들과 함께 창포를 씹으니
몸 안에서 땀이 나는구나.”라고 하여 정진와중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
단오를 맞이하고선 새삼 여름임을 아는 당신의 심경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산중큰절에 살 때는 산내 비구니 암자에서는 쑥으로 떡을 만들어 전 대중에게
공양을 내면 단오 무렵임을 기억해내곤 했다. 근데 이 쑥떡이 암자마다 서로
경쟁하듯 맛과 솜씨가 유별나다. 정말 종이짝처럼 얇게 빚어내는 그 솜씨에
우리모두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떡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도 그 쑥떡에는 손이 갔다. 쓰디쓴 익모초 즙도
몸생각해서 한 사발 마셔두면 여름나는데 도움이 될 터이다.
더불어 단오에 빠질 수 없는 것은 부채일 것이다.
이제부터 땀이 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알고 지내던 화가로부터
합죽선을 선물 받았다. 물 머금은 연잎 위에 똘방똘방한 개구리가 얌전하게
앉아 있는 붓질에서 ‘올여름도 건강하게 이겨내라’는 그의 마음이 그대로
묻어난다. 그림을 보기만 해도 시원한 여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부채와 일휴(一休 1394-1481)선사의 글씨에 얽힌 일화는 단오날 한번쯤은
들어둘만한 이야기거리이다. 선사께 어느 날 평소에 신세를 지고있던
부채가게 주인이 찾아왔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별을 고하는 것이였다.
빚으로 가게가 넘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묵묵히 듣고 있다가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며 곰곰이 생각하다가 무릎을 쳤다.
다음날 일찍 가게에 나갔다. 그리고 ‘오늘하루만 일휴의 붓글씨가 새겨진
부채를 판매함’이라고 가게 앞에 광고문을 내걸었다. 소문이 삽시간에 입을
타고 주변에 퍼지면서 너도나도 얻기 힘든 선사의 글씨를 소장하겠다고
몰려 들기 시작했다. 하루만에 빚을 갚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여윳돈까지
모아준 후 표표히 절로 되돌아왔다.
이제 선풍기.에어컨이 부채를 대신하는 시절인지라 여름이 되어도 부채가
필요없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일휴선사가 환생하여 다시 오더라도 부채를
팔아서는 돈이 되지 않는 세상이다. 예전에 별볼일없던 정치인 몇몇이 모여,
때를 기다린다는 의미로 ‘하로동선(夏爐冬扇)’이란 음식점을 경영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여름화로.겨울부채’란 현재는 별로 쓸모가 없지만
때가 되면 요긴하게 사용된다면서 권토중래를 꿈꾸던 결사모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경영솜씨가 받쳐주지 않아 얼마되지 않아서 문을 닫긴
했지만, 지금은 모두 정치실세가 되었으니 간판의 의미는 그대로
이루어진 셈이다.
이제 가게 이름의 부채가 아니라 실물부채 역시 햇빛가리개나 의례용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니 그 부채의 운명만큼이나 시절은 빨리빨리
‘하로동선’을 만들어 낸다.
하루가 다르게 신기술이 나오는 전자제품은 어제 것도 ‘하로동선’으로
만들어 버린다. 컴퓨터 운영프로그램의 변천은 7080세대인 내 순발력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다. 젊은 직원들이 거들어주지 않으면 이제 보고서
하나도 제대로 작성할 수 없게 되었으니 나 역시 이미 이 시대의 ‘하로동선’이
되어 버린 것인가.
그래서 열반하신 통도사 경봉노사의 말씀을 위로처럼 이 아침에 떠올린다.
봄날에 부채를 부치면 온갖 꽃 곱게 피고
여름에 부채를 부치면 구름이 일고 비가 오며
가을에 부채를 부치면 모든 나무에 낙엽이 지고
겨울에 부채를 부치면 서리와 눈이 내린다.
원철스님의 <아름다운 인생은 얼굴에 남는다>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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