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空) / 태전(太顚)선사

2010. 10. 17. 21:2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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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空) /   태전(太顚)선사

 

空/태전선사 十年不下鷲融峯 觀色觀空色卽空  십년부하취융봉 관색관공색즉공

如何曹溪一滴水 肯墮紅蓮一葉中  여하조계일적수 긍타홍련일엽중

    

 

십년을 축융봉에서 내려가지 않고

사물을 보되 공으로 관하니 여색도 곧 공이더라.

어찌하여 조계의 한 방울 물을 함부로 붉은 연꽃 한 잎에 떨어뜨리랴.


해설 ; 이 글은 사연이 길다. 중국 당나라 때 태전(太顚;732-824)선사라는 스님이 있었다.

당 정원(貞元) 6년(790)에 조주(潮州) 영산(靈山)의 축융봉이라는 곳에 은거하여 법을

전하자 많은 제자와 고명한 학자가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그때 유명한 문장가 한유(韓愈), 즉 한퇴지(韓退之;768-824)도 조주의 자사로 좌천이

되어 같은 고을에 살았다. 불교를 심하게 배척하는 극단적 배불사상가인 한유는

미인계를 써서 대전화상의 도력을 시험하기로 하였다.

조주에서 으뜸가는 미인인 기생 홍련(紅蓮)에게 10일 안으로 태전화상을 파계시키면

후한 상을 내리겠으나 만일 그러지 못하면 엄한 벌을 준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홍련은 자기의 미모에 자신이 있었으므로 승낙하였다.

 

암자에 와서 기도를 올린다는 핑계로 스님 곁에 와서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유혹을

하였으나 끝내 태전선사를 무너뜨리지 못하고 사실을 스님께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내려가서 자사에게 엄한 벌을 받을 것을 염려하여 울고 있는 홍연의 치마폭에 써 준

명시다. 시로서 그 뜻도 깊으려니와 운까지 격식에 잘 맞추었다.   

이 글을 해석하는데도 이론이 분분하다. 선원의 지대방에는 천하의 노화상들과 역대의

선지식들과 정치인 연예인 당대의 누구누구 할 것 없이 모두가 이야기의 대상이 된다.

조사들의 오도송이나 열반송이나 또는 관심거리가 될 만한 법문들도 모두 도마 위에

오른다. 그러나 이 글을 나는 지대방에서 들어보지 못한 방법으로 해석하였다.

 

문제의 해석은 두 번째 구절이다. 보통은

 “사물을 관하고 공을 관하니 사물이 곧 공이더라.”라고 한다. 또 한 가지 해석은

“사물을 관하는 관이 공하니 사물이 곧 공이더라.”라고 한다. 약간은 견강부회지만

관하는 마음까지 공하다고 하여 한 차원 높은 해석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글을 받는 홍연이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색중에 색(色)이라는 데 있다.

한퇴지는 태전선사에게 여색을 보내서 유혹을 했고 홍연도 색으로 왔다.

그 여색에서 태전선사의 안목을 노출시켜야 글이 재미있게 해석이 된다.

아마도 태전선사도 그럴 것이다. 내가 태전선사라 하더라도 여색을 한마디 거론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해석하였다. 십년동안 산에서 내려가지 않고

수행을 쌓으니 모든 사물들이 공하게 보이더라.

그래서 “사물을 보되 공으로 보이니 역시 여색도 곧 공이더라.

 

조계의 종문은 부처님의 정법을 이은 종문이다. 나 태전도 또한 그 종문을 계승한

사람으로서 법을 깨닫지 못한 일개 기생에게 한 방울인들 어찌 그 법수(法水)를

떨어뜨릴 수 있겠는가.”

법력을 논하면서도 여색을 보내 유혹하게 했던 한퇴지에게 색수(色水)를 떠올리게

하여 천하의 대 문장가를 희롱하고 있다. 이 글을 본 한퇴지는 감동하여 그날로

태전선사에게 귀의하였다. 불교를 배척하다가 도리어 불교공부를 열심히 하여

불교를 찬탄하는 사람이 되었다.

 

- 무비스님


 
 
        기대한 만큼 채워지지 않는다고 초조해 하지 마십시오. 믿음과 희망을 갖고 최선을 다한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누군가 사랑하면서 더 사랑하지 못한다고 애태우지 마십시오. 마음을 다해 사랑한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 입니다. 누군가를 완전히 용서하지 못한다고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파하면서 용서를 생각한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 입니다. 모든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고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날마다 마음을 비우면서 괴로워 한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 입니다. 빨리 달리지 못한다고 내 걸음을 아쉬워하지 마십시오. 내 모습 그대로 최선을 다해 걷는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 입니다. 세상의 꽃과 잎은 더 아름답게 피지 못한다고 안달하지 않습니다. 자기 이름으로 피어난 거기까지가 꽃과 잎의 한계이고 그것이 최상의 아름다움 입니다. -좋은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