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中道)/무비스님

2011. 2. 5. 12:1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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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中道)/무비스님

 

                나 보고 설법했다하지 마라.

한 글자도 설법한 적이 없다.

이런말도 기가 막히는 말이 아닌가..?

그래 불교교리라는 것이 이와 같이 많음에도 걸리지 않고, 그 많은 것을 얻었다 해도

얻은 것이 없다.

그런뜻이 무득무설(無得無說)의 취지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 하는가..?

이렇게 부처님이 물으셨다.

또 여래(如來)가 유소설법야 (有小說法耶),여래가 설법하는 것의 의도를 뻔히 알면서,

여래가  설법한 것이 있는가..?

이렇게  묻는 것이 부처님의 모든 것이다.

수십 번 말 하지만,깨달음과 설법은 부처님의 모든 것이며,부처님의 전부이다.

 

수보리가 부처님의 모든 것에 대해서,제가 이해하는 바로는 고정된 그 어떤 도리가 있어서

최상의 깨달음이라 이름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답 하였다.

이 말은 깨달았다고 하지만 깨달음의 흔적은 본래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흔적이 없는 것을 어떻게 그걸 대놓고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마음의 세계에 거대한 변화가 온 것만은 사실이다.

그 거대한 변화를 뭐라고 꼬집어서 이야기 할 수는 없다.

색깔로 표현할 수도 없고,모양으로 그려볼 수도 없고,향기로 뿜어볼 수도 없고, 무엇으로도

표현하기가 어렵다.

분명히 마음에 거대한 변화임에는 틀림이 없는데,,,,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큰 깨달음이 있다고

고정된 이것이라고 꼬집어서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에 대해서 그렇게 이야기 하고,다음 설법에 대해서도 고정된 어떤 법(法)이

있어서 여래(如來)께서 가히 설했다고 할 것도 없습니다라고 답한다.

설법도 쓸어버리고 깨달음도 쓸어버렸다.

 

그 말에 우리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꾸 팔만대장경이 걸린다.

"금강경"도 걸리고 "천수경"에도 걸리고 "반야심경"에도 걸려서,눈만 떴다 하면 온갖것이 다

걸린다. 그렇다. 아직 우리는 마음이 툭 트이지 못했으니까..

 

가슴에 젖어 오는 설법을 부처님이 하셨다.

하지만 무엇이 설법인가..?

설법이 도대체 무엇인가..?

검은 것은 먹이고 흰것은 종이이지.그걸 가지고 설법이라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다 공(空)한 거야.사실 공(空)한 것일까..?

 

"반야심경"에는 전부 없다(無)는 투성이다.

우리가 모두 있다는 병(病)에 떨어져 있으니까.

우리 중생들의 병이 보통병이 아닌것이다.

그래서 깨달음까지도 설법까지도 이렇게 부정할 수 있는것이다.

그래서 깨달음까지도 설법 까지도 이렇게 부정할 수 있는것이다.

여기에서 부정의 단계,긍정에서 부정한 단계,한 번 부정하지 아니하고는,부정되지 않고는

뭔가 눈을 뜰 수가 없다.

사실 인생에 있어서도 한 번쯤은 되게 쓴 맛을 본 사람 ,죽음까지 가는 그런 쓴맛을 한 번쯤

본 사람, 그런 사람이 인생을 제대로 알고 인생에 대해서 새롭게 눈을 떳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승승장구하거나 곧고 평탄한 길만 걸어가는 그런 사람은 인생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인생이란 잘 될때도 있고, 그냥 낭떠러지로 떨어질때도 있으며, 목숨만 건진다면 무슨 짓이라도,,,할 수 있다는 절박한 경험 같은 것은 아주 좋은 교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부정(不正)이라고 하는것, 그 만큼 인생에 대해서 눈을 뜨게 해줄수 있는 좋은 藥(약)은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헛 것(공짜)은 하나도 없다.

사업에 실패를 하든지 낙오되어 뒤 떨어어지든지 하더라도 ,언젠가 그것이 더 큰 이익이

되어 올 수 있다.

더 값진 인생을 깨닫게 해 주어서 결코 헛된 것이라 단정 할 수 없을 것이다.

부정(不正)이라고 하는것,인생에 있어서 어떤 부정적인 면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교훈도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어릴 적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는데, 왜  그런가..?

부처님의 설법을 고정되게 이것이라고 꼬집어서 말 할수도 없고 깨달음도 이것이다"라고

명명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것은 다 취할 게 못되니 취하지 말라고 하신다.

옳은 법(正法)도 취하지 말고 그른법 (非法)도 취하지 말라.

여래소설(如來小說)은 다 취할것이 아니다.

불가설(不可說)이다.

설(說)하고 있지만 말할 수가 없어,가히 설명하자면 말할 수 잇어서 하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법(法)이 전혀 아닌 것도 아니다.

무엇이건 이것이다.하고 꼭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다.

그럼 무슨 말이냐..?

중도(中道)란 말이다.

불교의 이론을 말로써 표현할때, 어디서 정착되어야 하는가..?

하고 물을때,중도(中道)라는 것에 정착이 되어져야 한다고 이해해야 한다.

 

중도는 긍정(肯定)과 부정(不定)사이에 있는 중간(中間)과는 전혀 다른 것을 말한다.

긍정과 부정이 조화를 이루는 곳,어디에서도 치우치지 아니하고 수용(受用);;;

하는 것을 중도라고 한다.ㅏ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후 맨 처음 하신 말씀이"중도(中道)를 깨달았노라"였다.

어디에도 치우지지 않는것, 긍정과 부정에 치우지지 않는것,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것,

남과 여에 치우치지 않는 것,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으면서 ,,

원융무애(圓融無碍)하는 것이다

어디에도 걸리지 아니하고 융통자재(融通自在)한 것,그것을 중도적인 삶이라 한다.

불교의 핵심은 중도에 있다.

또한 그에 대한 모든 가르침은 경전속에 있다.

모든 도인(道人)들의 설법도 중도에 귀착되어 있다.

여기서도 비법(非법)이며 비비법(非非法)이다라고 했다.

법(法)도 아니며 법 아님도 아니다.

이미 법이 법이 아니라는 것은 긍정을 떠났다는 것이고, 비비법(非非法),법(法)아님도 아니니라는 것은 다 수용(受用)한다는 그 말이다.

양면을 다 수용한다.

긍정도 부정하고 부정도 부정하는,결국 속뜻은 다 수용하는 것에 있다.

 

때로는 남자 일도 하고 때로는 여자 일도 하지만,여자는 역시 여자이고 남자는 역시 남자인

것이다...어디에도 치우치지 아니하면서 ..자기 자리를 지켜주는것,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어 책상이 공부하는 데 좋지만.식탁으로 사용하여도 좋은것이다.

그런데 만약 꼭 공부하는 책상이라고 고정되어 있으면  도저히 식탁으로 쓸수 없다.

세상사가 다 그렇게 되어 있어라고 우리들은 고집을 부린다.

책상을 꼭 공부하는 데만 꼭 써야 한다면,꼭 그래야만 한다는 치우침 그 속 거기서부터

불행이 싻트기 시작하고, 그것의 근원을 살펴보면 상 때문에 출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소리가 나면 깨어지게 되어 있고, 깨어지면 가슴에 상처가 남는다.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 불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모두가 중도의 도리를 몰라서 고집하고,고집하다보니까..소리가 나고 깨어지고 상처받고.

그래서 인간의 고통이 거기서부터 출발된다는 것이다.

 

그래서;;;;;;부처님께서 이 금강경의 도리를, 그 깨달음의 도리를 이렇게 ..

설파하여 가르치고 계신 것이다.

그러면 ,법(法)이 아니고 비법(非法)도 아닌 중도(中道)를 이야기 하는 까닭이 뭔가..?

일체 현상과 성인들의 모든 깨달음,그것은 이름일뿐 깨달은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없는

법이다.

일체 아무것도 없는 것에 편의상 차별을 둔 것에 불과하다.

뜻이 그렇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 차별을 두었다.

그래야 질서가 선다.

질서가 서니까 질서가 섰다고 계속 그것만 고집 한다면,그것 또한 아닌 것이다.

 

서양과 동양의 사람들의 생활이 다르다.

나라마다 의식이 다르고 그 의식대로 사는 것이다.

각자의 의식이 다르고 생활 습관과 가치관이 나라마다 다르고 사람마다 다르다.

미국에서 우리 교포가 된장이 먹고 싶어 된장을 끓였더니 다 끓기도 전에 이웃주민들이

그 냄새에 못 견디어 데모를 하더라는 이야기가 있다.

내게 잘 맞는 된장 찌게가 미국인들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다르니까.우리가 고집을 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생각의 고집을 세운다면, 그것은 치우침이고 변경(邊境)에 떨어지는

것이된다. 동양 ,서양,사람 차별없는 가운데 무위법(無爲법)을 세운다면, 우리가 좀 자유로워지고,사는데 불행이 적어지고 시원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지 안을까...??

 

 

베푸는 마음 행복한 마음

*주는 마음 열린 마음*

 

조화로운 인간 관계란         
주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받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면  
상대는 문을 열지 않는다.
     

 

문을 열기는 커녕                 
경계하는 마음이 된다.          
주는 마음은 열린 마음이다.   

 

내 것을 고집하지 않고          
     남의 것을 받아 들이는 마음이다. 

 

나를 낮추는 것은        
열린 마음의 시작이다. 


나를 낮추고 또 낮춰              
저 평지와 같은 마음이 되면    
거기엔 더 이상 울타리가 없다.

벽도 없고 담장도 없다.         
거기엔 아무런 시비도 없다.
    


갈등도 없다 장애도 없다.          
거칠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해서 주는 마음은 열린

마음이요 열린 마음은

자유로운 마음이다.


울타리가 좁으면       
들어 설 자리도 좁다.

많이 쌓고 싶으면     
울타리를 넓게 쳐라.


더 많이 쌓고 싶으면         
아예 울타리를 허물어라     
열린 마음은 강하다.
           

 

아무 것도 지킬게 없으니    
누구와도 맞설 일이 없다.
   

 
진정 강해지려면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인이

되려면 마음을 열고 끝없이

자신을 낮추어라. 

 

낮은 것이 높은 것이고                    
열린 마음이 강한 것이다.
                

 
손은 두 사람을 묶을 수도 있지만
서로를 밀어 낼 수도 있다.
          

 

손가락은 두 사람을                 
연결시키기도 하지만               
접으면 주먹으로 변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어색하게     
두 손을 내린채로 서서       
서로를 붙잡지 못하고 있다.

 

지혜와 어리석음이           
모두 마음의 손에 달려있다

-옮 겨 온 글-

 

 

 


 

 월악산-김용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