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사는 무소유의 사찰이다

2011. 3. 4. 19:2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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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7월 말경 어느 날, 전남 순천 불일암에서 물안개가 걷히고 있는 조계산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법정 스님의 뒷모습. 글쓴이가 직접 촬영한 사진이다. 왼쪽의 후박나무는 스님이 1975년 초가을 불일암에 온 직후 심은 것으로, 스님은 넉넉한 이 나무 그늘 아래 소박한 나무의자를 놓고 독서와 명상을 즐겼다. 스님의 화장된 육신 중 일부가 49재 후 이 나무 아래에 뿌려졌다. 동아일보 DB


 

 

‘무소유’의 법정 스님이 우리 곁을 떠난 지 어느덧 1년이 됐다. 지난달 28일(음력 1월 26일) 오전 서울 성북동 길상사 극락전에서 조촐한 1주기 추모 법회(다례제)가 열렸다. 나는 유발(有髮) 상좌를 자처하며 20년 동안 스님을 모셔 왔다. 그러나 스님 입적 후 길상사에는 발걸음도 하지 않았다. 상좌들이 눈에 밟힐까 염려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젠 뭔가 말을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길상사에 상좌들의 내분과 승속(僧俗)의 갈등이 ‘내연(內燃)’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님의 오른쪽 폐 뒤쪽에서 9cm가량의 종양이 발견된 것은 2007년 10월 23일이었다. 의료진은 “3∼6개월밖에 못 사신다”는 진단을 내렸다. 스님은 “이 사실을 외부에 일절 알리지 마라”고 엄명했다. 곧바로 상좌들이 모였다. 설왕설래 끝에 스님을 미국의 저명한 폐암치료병원인 텍사스 휴스턴 MD 앤더슨병원으로 모시기로 했다. 11월 27일 미국으로 건너간 스님은 병원 인근에 조그만 집 한 채를 전세 내 100일 동안 방사선 항암치료를 받았다. 체중이 40kg까지 빠졌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상좌 일곱 중 어느 누구도 스님 곁을 지키지 못했다.

이사이 절집에서 ‘일’이 벌어졌다. 한 상좌가 은사 스님 유고(有故)에 대비해 길상사 창건주 승계와 저작권 ‘확보’에 나선 것이다. 급기야 한 상좌가 미국으로 건너가 병석의 스님에게 “이러다 큰일 납니다. 창건주 승계서를 써주십시오”라고 매달렸다. 당시 상황을 목격한 이는 “상좌가 부르는 대로 받아 쓴 스님은 펜을 바닥에 집어 던졌고, 그가 병실을 나가자 ‘내가 상좌를 잘못 뒀다’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다.

2008년 3월 초 스님은 건강한 모습으로 귀국해 강원도 오두막으로 갔다. 병원 측은 “100% 회복됐다”고 했다. 3월 18일 모처럼 스님이 길상사에 왔다. 점심 공양을 맛있게 마친 스님은 덕조 등 세 상좌와 함께 경내에 개축 중인 명상수련원을 둘러보며 “호화롭지 않고, 지나치지 않게 하라”고 누누이 당부했다. 하지만 “아직 팔 힘이 없다”며 상량문 쓰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뤘다.

2008년 11월 스님은 사실상 자신의 마지막 저서인 ‘아름다운 마무리’를 냈다. 스님의 친필 서명이 들어 있는 책을 받아 든 순간, 나는 스님과 이별할 때가 머지않았음을 감지했다.

2009년 2월 길상사에서 동안거 해제 법회가 열렸다. 설법을 마친 스님은 작심한 듯 “10년 전 이 절을 만들 때 가난한 절을 내세웠으나 내가 이 자리에서 법문을 하고 나면 그 끝에 으레 불사를 내세워 돈 이야기를 꺼내는데 그때마다 저는 몹시 곤혹스러웠다”고 했다. 스님이 주지실로 돌아오자 한 상좌가 쫓아 들어와 언성을 높였다. 미국에서의 치료비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며칠 뒤 스님은 출판사에 부탁해 선(先)인세를 받아 길상사 주지에게 건넸다. 얼마 뒤 스님은 길상사 소식지에 ‘재작년 겨울 신병을 치료하는데 제가 지닌 돈만으로는 모자라 부득이 사중(寺中·길상사)에서 치료비의 일부를 빌려 썼습니다. 그때 진 빚을 해제 사흘 후인 2월 12일 몇 사람이 입회한 자리에서 갚았습니다. 빚을 갚고 나니 이제는 아주 홀가분합니다. 그동안 내 치료비로 인해서 사중에 많은 신세를 지게 된 것을 이 자리를 빌려 밝힙니다.’

해제 법회 직후인 2월 말 삼성서울병원에서 재검사를 받은 결과 암이 척추로 전이된 사실이 확인됐다. 이 와중에 2009년 3월, 맏상좌 덕조가 9년 만에 주지에서 물러나고 넷째 상좌 덕현이 6대 주지로 취임했다. 스님은 1983년 첫 상좌 덕조를 들인 이래 덕인 덕문 덕현 덕운 덕진 덕일 등 상좌 일곱을 두었다. 2009년 5월 강원도에 기거하던 스님이 한때 위험한 고비를 만났지만 무사히 넘겼다는 얘기가 전해졌다. 이후 스님과 연락이 끊겼다. 상좌와 지인들을 통해 전해들은 바로는 스님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민간요법 등으로 투병생활을 계속하신다고 했다.

2010년 1월 15일 스님이 삼성서울병원 중환자실에 급히 입원하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서둘러 병원으로 갔다. 스님은 곤고한 몸을 간신히 일으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너무나 수척한 모습이었다. 스님이 먼저 “미안하다”며 눈물을 보였다. “아무에게도 아픈 모습을 보이기 싫어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했다. 스님의 가늘어진 다리를 보니 저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불쑥 “그까짓 길상사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지금 생각해 보면 받지 않으실 걸 그랬다. 스님이 중요하지 절이 중요하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내친김에 “스님께서 평소 상좌 하나가 지옥 한 칸이라더니 정말 그런 것 같다”고도 했다. 그동안 하고 싶던 말이기도 했다. 스님께서 “허허” 하며 헛웃음을 지으셨다. 잠시 침묵 끝에 자리에서 일어나며 “해탈도 마시고, 큰스님도 되지 마시고, 법문도 마시고, 책도 쓰지 마시고, 그냥 편안히 지내시다 회향(回向)하세요”라고 말씀드렸다.

2010년 1월 23일 오후 다시 스님이 입원해 있는 삼성서울병원 20층 5호실에 갔다. 스님이 “한 번 왔다 갔으면 됐지 뭐 하러 또 왔느냐”고 대뜸 야단을 치셨다. 내심 섭섭했으나 고통이 심해 그러시는 거라고 이해했다. 스님은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가셨다. 스님의 신음소리가 계속 병실 밖으로 흘러나왔다. 간병인이 병실에서 나올 때 산소마스크와 안대를 쓰고 누워 있는 스님의 모습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렇게 스님과 작별했다.

스님은 입적 당시 한 통의 유서를 남겼다. 입적 보름 전인 2월 24일에 서명한 것이다. 유서는 난산 끝에 작성됐고, 스님이 가까스로 서명하셨다고 한다. ‘남기는 말’과 ‘상좌들 보아라’ 등 2장으로 되어 있다.

‘남기는 말’에서 스님은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에 주어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토록 해달라. 그러나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는 출간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상좌들 보아라’에서는 “덕조는 맏상좌로서 다른 생각하지 말고 결제 중에는 제방선원에서, 해제 중에는 불일암에서 10년간 오로지 수행에만 매진한 후 사제들로부터 맏사형으로 존중을 받으면서 사제들을 잘 이끌어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또 “덕인 덕문 덕현 덕운 덕진과 덕일은 덕조가 맏사형으로 존중받을 수 있도록 수행을 마칠 때까지는 물론 그 후에도 신의와 예의로 서로 존중하고 합심하여 맑고 향기로운 도량을 이루고 수행하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첫 번째 유언은 자신의 사후 논란의 핵심이 될 사안을 확실히 정리해 준 것이다. 자신에게 남은 모든 것을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에 준다는 의미이자, 사후 인세(印稅)로 인한 갈등과 분란의 싹을 자르겠다는 뜻이다. 스님의 말년을 정성으로 시봉했으나 상좌들과 신도들의 질시를 받은 어느 시인을 겨냥한 조치로 읽히기도 한다. 스님은 당초 저작권 관리를 시인과 ‘분당 보살’에게 위탁하려 했고, 주위 사람들은 이를 강력 반대했다. 스님의 와병 중에도 시인이 이런저런 명목으로 책을 펴내는 것을 보면서 속으로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을 했다. 아무튼 시인과 보살은 스님의 말년 2년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이다. 스님은 시인의 책 만드는 열정과 솜씨를 높게 평가했고, 그가 스님께 바친 정성도 남달랐다. 하지만 그는 지나치게 스님을 ‘독점’하고자 했고 이로 인해 상좌 및 다른 신도들과 갈등을 빚었다.

두 번째 유언은 맏상좌 덕조에게 자중자애할 것과 다시 한 번 기회를 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2009년 봄과 가을 시인이 엮은 스님의 법문집 서문에는 덕조 등의 이름은 빠지고, 덕인 덕현 덕진 세 상좌와 시인의 이름만 올라 있다. 누구보다 스님을 잘 모셨고, 사랑도 듬뿍 받은 덕조가 맏상좌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덕조에 이어 길상사 주지직을 승계한 덕현까지 스님 1주기를 앞두고 길상사를 떠나버렸다. 이 또한 스님의 업(業)일 것이다.

스님은 1987년 공덕주 김영한 여사가 요정 대원각을 불교재단으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8년 뒤, 스님은 청학 스님과 대도행 보살 등의 권유로 시주를 받아들였다. 스님은 대원각을 송광사 말사인 ‘대법사’로 등록한 데 이어 1997년 ‘길상사’로 이름을 바꿨고, 2월 14일 청학 스님을 초대 주지로 1차 도량정비불사 회향식을 거행했다. 스님은 당시 “길상사는 어느 누구의 소유도 아닌 공찰(公刹)”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스님의 병이 깊어지자, 상좌들은 조계종 총무원이나 본사인 송광사가 길상사를 ‘접수’할 것을 염려해 ‘창건주’ 승계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조계종 종법에 따라 창건주는 후임 주지를 임명할 수 있다. 한 상좌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미국으로 건너가 스님으로부터 ‘건강상 이유로 창건주 권한을 덕조에게 인계한다’는 문건을 받아왔다.

하지만 송광사 측에서 이를 인정해 줄 수 없다며 스님과의 ‘직접 면담’을 요구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급해진 덕조는 ‘무리수’를 두었고, 이 사실이 드러나 전격 교체됐다. 사태의 전말을 알게 된 스님은 2009년 8월 27일 길상사 창건주를 ‘법정’에서 ‘송광사’로 변경하고, 사설사암에서 ‘공찰’로 전환토록 했다.

송광사는 종무회의를 열어 ‘길상사의 주지 추천권은 공찰이므로 종법에 의거하여 본사인 송광사 주지에게 권한이 있으나 창건주의 권한을 이양하고 길상사를 중흥시킨 공덕을 고려하여 법정 스님 문도에서 문도회의를 거쳐 추천한 사람은 종법상 결격사유가 없는 한 송광사 주지가 이의 없이 총무원으로 주지 품신 하도록 한다’고 의결했다. 조계종은 9월 10일자로 길상사의 공찰 전환을 승인해 법적 절차를 완료했다.

나는 스님이 대원각을 받지 않았다면 훨씬 더 좋은 말년을 보내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스님이 이 절과 인연을 맺는 바람에 청학 스님 등 승속의 ‘좋은 인연’들을 잃게 됐고, 상좌들도 ‘욕심’을 내게 됐다. 길상사는 법적으로 누구의 것이든, 정신적으론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무소유’의 사찰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깜’이 아닌데 단지 법정 스님의 문도라고 해서 길상사를 차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스님이 입적한 후 남긴 저서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출판사들이 무리해서 책을 더 찍어내고,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앞다퉈 스님에 대한 신간을 냈다. ‘글빚을 남기기 싫으니 책을 절판하라’는 스님의 유지는 출판업자들의 이해가 갈려 지난해 말에야 이행됐다. 마구잡이로 찍어낸 서책은 재고가 50만 권이나 됐다고 한다. 유묵전이 열렸고, 기념관 건립과 장학사업, 다큐멘터리 제작 등이 추진됐다. 1주기를 맞아 대여섯 권의 신간이 더 나왔다. 다 부질없는 일이다. 제발 더는 법정 스님을 팔아 장사하지 말았으면 싶다.

스님은 생시에 말과 글로 여러 차례 자신의 사후 처리에 대해 언급했다.

“나 죽은 다음에 시줏돈 걷어서 거창한 탑 같은 것 세우지 말고, 어떤 비본질적인 행위로도 죽은 뒤의 나를 부끄럽게 만들지 말라.”

“재단이건 장학사업이건 내 이름을 건 어느 아무것도 하지 마라. 만약 내 이름을 팔아 쓸데없는 일을 도모한다면 저승에서라도 벌떡 일어나 호통을 치겠다.”

말년의 스님은 참 외로웠고, 상상하기 힘든 고통 속에 지냈다. 안타깝고 또 안타까운 일이다. 스님 법정! 참으로 큰 이름이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큰스님’이 되기를 완강히 거부하면서 오직 ‘맑고 향기롭고 자유롭게’ 살고자 했던 ‘대(大)자유인’이었다.

오명철 문화전문기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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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동님 그림에 詩를 붙이다

 

 

 
 
살아온 날들이 지나갑니다 아! 산다는 것
사는 일이 참 꿈만 같지요 살아오는 동안 당신은
늘 내 편이었습니다 내가 내 편이 아닐 때에도 당신은
내 편이었지요 어디에서 그대를 기다릴까 오래 생각했는데
이제, 어디에서 기다려도 그대가 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김용택...그대를 기다리는 동안)
 
 
 
 

흰 꽃 곁을 그냥 지나쳤네

한참을 가다 생각하니

매화였다네

돌아가서 볼까 하다 그냥 가네

너는 지금도 거기 생생하게 피어있을지니

내 생의 한 때 환한 흔적이로다

(김용택...生生)

 

 

 
 
해가 지면 나는 날마다 나무에게로 걸어간다
해가 지면 나는 날마다 강에게로 걸어간다
해가 지면 나는 날마다 산에게로 걸어간다
해가 질 때 나무와 산과 강에게로 걸어가는 일은 아름답다
해가 질 때 사람을 그리워하며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산그늘처럼
걸어가는 일만큼 아름다운 일은 세상에 없다
(김용택...연애 1)
 
 

 
 
당신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당신 방의 책장을 지금 잘게 흔들고 있을 전화 종소리
수화기를 오래 귀에 대고 많은 전화 소리가 당신 방을 완전히 채울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래서 당신이 외출에서 돌아와 문을 열 때,
내가 이 구석에서 보낸 모든 전화 소리가 당신에게 쏟아져서 그 입술 근처나
가슴 근처를 비벼대고 은근한 소리의 눈으로 당신을 밤새 지켜볼 수 있도록...
다시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마종기...전화)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
겨울같이 단순해지기로 했다
창밖의 나무는 잠들고 형상의 눈은
헤매는 자의 뼈 속에 쌓인다
항아리를 그리기 시작했다
빈 들판같이 살기로 했다
남아 있는 것은 모두 썩어서 목마른 자의 술이 되게 하고
자라지 않는 사랑의 풀을 위해 어둡고 긴 내면의 길을
핥기 시작했다
(마종기...그림 그리기)
 
 
 
 
슬픔의 사랑스러움 예감의 사랑스러움
귓속에 가득차는 소리의 사랑스러움
발정의 사랑스러움
사원의 호수와 요리, 혹은 십년전 명륜동 목욕탕 수증기
종소리와 숲의 전경, 혹은 서울근교의 은행나무 이끼
정경의 아름다움 환청의 아름다움
밤늦게 끝까지 들리는 발정의 아름다움
(마종기...피아니스트 페라이어)
 
 
 
 
겨우내 돌보지 않던 뜰에서
튤립 줄기가 자란다
오래 잊고 지내던 여인이
싱싱한 풀향기로 내게 온다
(마종기...봄)
 
 
 
 
흰 배경으로 두마리 흰 새가 날아올랐다
새는 보이지 않고 날개 소리만 들렸다
너는 아니라고 고개를 젓지만
나도 보이지 않게 한 길로만 살고 싶었다
이 깊고 어려운 시절에는
말하지 않아도 귀는 듣고
서로 붙잡지 않아도 손은 젖는다
(마종기...피아니스트 폴리니 연주회)
 
 
 
 
내가 한 십 년
아무것도 안하고 단지 시만 읽고 쓴다면 즐겁겠지
내가 겨울이 긴 산속 통나무 집에서 장작이나 태우며
노래나 부른다면 즐겁겠지
당신에게 쌓이고 쌓인 모든 발걸음이
이제는 다만 아픈으로 남을지라도 즐겁겠지
십 년쯤 후에는 그 흙이 여물어
내가 만약 질 좋은 시인이 된다면
(마종기...내가 만약 시인이 된다면)
 
 
 
 
비가 그치면서 시가는 안개로 덮였다
길고 어두운 우리들의 중년이
방향 없이 그 속을 날고 있었다
- 소소한 것은 잊으세요
- 중년의 긴 꿈은 무서워요
-멀리 보지 마세요
-중년의 절망은 무서워요
(마종기...중년의 안개)
 
 
 
 
하얀 탱자꽃 꽃잎은 하나 둘 셋 넷 다섯 장입니다
푸른 보리밭에 아침 이슬이 반짝입니다
밭 언덕에 물싸리꽃은 오래된 무명 적삼처럼 하얗게 피었습니다
세상을 한참이나 벗어 나온 내 빈 마음 가장자리 부근에
꿈같이 환한 산벚꽃 한 그루 서늘합니다
산이랑 마주 앉을까요 돌아서서 물을 볼까요...
(김용택...그대 생각1)
 
 
 
 
꽃이 필 때까지 꽃이 한 송이도 남김없이 다 필 때까지
꽃이 질 때까지 꽃이 한 송이도 남김없이 다 질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꽃잎이 날아갑니다
그대 생각으로 세월이 얼마나 깊어졌는지
깊어질 대로 깊어진 그 세월 속을 날아가던 꽃잎들이
그대에게 닿았다는 소식 여태 듣지 못했습니다
(김용택...그대생각2)
 
 
 
 
내 안에 이렇게 눈이 부시게 고운 꽃이 있다는 것을
나도 몰랐습니다 몰랐어요
정말 몰랐습니다 처음이에요 당신에게 나는
이 세상 처음으로 한송이 꽃입니다
(김용택...당신의 꽃)
 
 
 
 
그대 없이는 나 없는지 그대 없을 때 알았습니다
그대를 기다리는 동안 바람이 불고
새가 울었습니다 바람이 부는 그 길고 긴 시간
그대를 기다리는 그 길고 긴 시간 동안
달이 뜨고 꽃이 피었습니다
그대를 기다리는 그 길고 긴 시간
그대 없이 나 없는지 그대 없을 때 알았습니다
(김용택...그대 없을 때)
 
 
 
 
저기 저 꽃 피는 것 보니 당신이 오시는 줄 알겠습니다
저기 저 꽃 지는 것 보니 당신이 가시는 줄 알겠습니다
한 세월 꽃을 보며 즐거웠던 날들 당신이 가고 오지 않아도
이제는 꽃이 피고 꽃이 지는 줄 알겠습니다
(김용택...세월이 갔습니다)
 
 
 
 
간절하면 가 닿으리
너는 내 생각의 끝에 아슬아슬 서 있으니
열렬한 것들은 다 꽃이 되리
이 세상을 다 삼키고
이 세상 끝에 새로 핀 꽃 한 송이
(김용택...꽃 한 송이)
 
 
 
 
이 세상에 당신이 있어 내가 행복한 것처럼
당신에게 나도 행복한 사람이고 싶습니다
내 아무리 돌아서도 당신이 내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당신이 아무리 돌아서도 나는
당신 앞에 서 있는 사랑이고 싶습니다
(김용택...당신의 앞)
 
 
 
 
이 세상에 나만 아는 숲이 있습니다
꽃이 피고 눈 내리고 바람이 불어
차곡차곡 솔잎 쌓인 고요한 그 숲길에서
오래 이룬 단하나 단 한번의 사랑
당신은 내게 그런 사랑입니다
(김용택...단 한번의 사랑)
 
 
 
 
검은 산 하얀 달
저 달은 가며 날 보라 하고
어둔 산 하얀 꽃 저 꽃은 지면서
이 적막을 견뎌보라 하네
나 혼자 견뎌보라 하네
(김용택...이 적막에)
 
 
 
 
강가에 보라색 붓꽃이 피었습니다
산그늘 내린 강길을 걸어 집으로 갑니다
나는 푸른 어둠 속에 피어 있는 붓꽃을 꺾습니다
아 서늘한 이 꽃 그대 이마 같은 이 꽃 나를 바라보던
그대 눈 속 같은 이 꽃 내 입술에 닿던 그대 첫입술 같던 이 꽃
물 묻은 손 치마에 닦으며 그대는 꽃같이 웃으며
꽃을 받아듭니다
(김용택...집)
 
 
 
 
너를 향한 이 그리움은 어디서 왔는지
너를 향한 이 그리움은 어디로 갈른지
꽃잎은 바람에 날리고 사랑에는 길이 없다
나는 너에게 눈 멀고
꽃이 지는 나무 아래서 하루해가 저물었다
(김용택...그 나무)
 
 
 
 
어느 봄 날 당신의 사랑으로 응달지던 내 뒤란에
햇빛이 들이치는 기쁨을 나는 보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랑의 불가로 나를 가만히 불러내신 당신은
어둠을 건너온 자만이 만들 수 있는 밝고 환한 빛으로
내 앞에 서서 들꽃처럼 깨끗하게 웃었지요
아,
생각만해도
참.좋.은.당.신
(김용택...참 좋은 당신)
 
 
 
 
당신...
세상에서 그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는
그보다 더 따뜻할 수 있는
그보다 더 빛나는 말이 있을 리 없겠지요
당신...
(김용택...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해 언제 열렸는지
시립기만 합니다
밤이면 밤마다 당신을 향해 열린 마음 닫아보려고
찬바람 속으로 나가지만 빗장 걸지 못하고
시린 바람만 가득 안고 돌아옵니다
(김용택...빗장)
 
 
 
 
사랑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던가요
이 세상 하고 많은 사람 중에 내 사랑을 이끌어낼 사람
어디 있을라구요
(김용택...내게 당신은...)
 
 
 
 
당신의 마음과 당신의 말과 당신의 글이
내 마음과 내 말과 나의 글입니다
(김용택...편지)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 나무 한 잎 같이 쬐그만 女子
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말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오규원...한 잎의 女子)
 
 
 
 
정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병신 같은 女子, 시집 같은 女子,
그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오규원...한 잎의 女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女子.
(오규원...한 잎의 女子)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 이름을 불러 보리라
(황동규...즐거운 편지)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짝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즐거운 편지)
 
 
 
 
 
 
분홍지우개로 그대에게 쓴 편지를 지웁니다
설레이다 써버린 사랑한다는 말을
조금씩 조금씩 지워나갑니다 그래도 지운 자리에서 다시 살아나는
그대 보고 싶은 생각 분홍지우개로 지울 수 없는
그리운 그 생각의 끝을 없애려고 눈을 감아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지워질 것 같습니다
(이하석...분홍지우개)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이성복...서시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몸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 한 죄
(이문재...노독)
 
 
 
 
 
 
오늘 밤에는 네 꿈을 꾸고 싶다
절대로 안된다고 떼쓰지 마라
정말 꿈이란 어딜 가나 지름길이다
꿈만 꾸고서도 하늘까지 갔다 온 기쁨
내일 밤에도 네 꿈을 꾸고 싶다
(이생진...꿈을 꾸고 싶다)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 았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에게 길고 긴 머리카락이 있다면
저 산안개처럼 넉넉히 풀어헤쳐
당신을 감싸리라
(류시화...산안개) 
 
 
 
 
 
 
나에게 나무가 하나 있었다
나는 그 나무에게로 가서 등을 기대고 서있곤 했다
내가 나무여 하고 부르면 나무는 그 잎들을 은빛으로
반짝여 주고 하늘을 보고 싶다고 하면 나무는
저의 품을 열어 하늘을 보여 주었다
(류시화...나무)
 
 
 
 
 
 
내 몸에서 마지막 피 한방울
마음의 여백까지 있는대로
휘몰아 너에게 마구잡이로
쏟아져 흘러가는
이 난감한
생.명.이.동
(신달자...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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