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까스와 방생

2011. 4. 2. 11:1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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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까스와 방생

단현 2010. 03. 01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국법으로 육식을 금한지 1.200년만에 명치유신 때 다시 육식을 허용했지만, 고기를 먹어보지 못하여 맛을 모르고 요리법도 모르던 일본인들은 고기를 먹지 못합니다. 그래서 쇠고기나 닭고기를 기름에 뽁아 먹다가 결국 돼지고기에 빵가루를 붙여 튀긴 고기에 우스타소스를 뿌려 먹었던 것이 입에 맞았는데 그것을 돈가스라 했습니다.

 

돈가스 조리법은 고기를 먹어라고 권장해도 먹지 않는 국민들에게, 일본이 국가적으로 보급하고 권장했기에 차츰 그 맛을 알게 된 일본국민들은, 우리가 불고기를 먹듯이 돈가스는 어려서부터 워낙 많이 먹어 수시로 먹고 싶어하는 일본 국민음식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돈가스를 유럽에서 전래된 요리로 알고 있지만 실은 일본식요리입니다.


1.200년간 고기를 못 먹었던 그들은 몸이 왜소해서 우리 조상들은 고대부터 왜놈, 왜국이라고 불렀지요. 지난 6, 70년대에 일시적으로 우리보다 그들의 키가 조금 더 큰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우리가 훨신 더 큽니다. 우리 선수들이 일본선수들에 비해서 훨씬 스케이팅을 잘하는 이유도 육식을 많이해서 체력이 좋은 덕일 것입니다.

 

우리 경제가 급속도로 일본을 따라잡고 있는 요즘은 살 맛도 더 납니다. 경제가 일본을 따라잡거나 앞서고 있는 원인 역시 육식으로 다져진 체력으로 밤새워 연구하는 연구원들이 있고, 밤새워 일할 수 있는 체력이 강한 노동자가 있는 덕이겠지요.


결국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일본에 들어간 불교 때문에, 육식을 하지 않은 일본불교 덕에 우리가 이 영화를 누리고 있다는 것이지요.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아직 평균수명은 일본이 앞섭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물가가 워낙 비싼 탓에 소식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인데, 우리도 나이가 들수록 소식하고 채식하는 습관을 들인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봄이 되니 절마다 방생법회한다는 회원모집광고가 넘쳐납니다. 사람의 음식으로 잡거나 길러서 주어진 생물을 돈으로 구입해서 다시 물에 집어 넣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우리가 물에 집어 넣는만큼 다시 잡아 올려야 하는 것을, 내가 복 받기 위해, 내가 생명을 살려주었으니 내가 천국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은 너무 속 보이는 것은 아닐까요?

 

육식, 생선 하나 덜 먹는 것으로 방생을 대신하면 좀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미국의 경제재제 때문에 못먹고 산 북한의 35세 미만의 인민들은 평균키가 160cm밖에 안되지요. 우리 초등학생 6학년보다 더 작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걱정이 너무 큽니다. 우리가 지금 정치적인 이유로 그들을 먹이고 치료하지 않아서 굶거나 병으로 죽어가는 동포가 얼마나 많은데도 애써 외면하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요?

 

후일이 더 걱정입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우리의 후손들이 지불해야할 통일비용이 너무 막대하니까요. 지금 우리가 의료비용으로 소득의 5.3%를 지불하지만 통일이후에는 15%이상 내야합니다. 그래서 지금 북한 인민을 먹이는 것이 그 효과가 10배 100배 더 큰 것입니다.

 

이 비극이 너무 오래되어서일까요? 북한 부녀자들이 우리 돈 100만원에 중국 변방의 농촌으로 팔려가서 온 집안 남자들의 성노리개가 된다는 뉴스나, 시궁창에서 국수가락을 주워 먹는 꽃제비 아이들, 평양 외 지역 유아들의 해골 같은 모습들은 이제 지겹도록 듣고 보았던 탓인지 흥미조차 잃어버리고 안타깝다는 감정도 말라버린 것 같습니다.

 

너무 많은 음식으로 비대해진 몸매를 가꾸기 위해, 비싼 돈 들여 다이어트를 하기 전에, 내 욕심 채우려 방생하는 행사에 참여하기보다는, 조금 덜 먹고 다이어트하면서 북한의 형제를 먹여 살릴 수 있다면, 우리의 방생의 공덕은 죽어 천상에 태어날 큰 공덕이 될 것입니다.

 

 

조금 가졌어도 나누어주면서

험한 길을 함께 가는 좋은 벗처럼

그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도 죽지 않는다.  <잡아함경 48권>

 

전재성 역주)

여기서 '죽은 자'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탐닉하여 나누지 않는 자를 말한다. 보시는 단순히 공덕을 쌓아나가는데 있지 않고, 나눔의 공덕이 바로 자신과 뭇삶의 의지처가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전재성 著 오늘 부처님께 묻는다면 (한권으로 읽는 쌍윳따니까야)--

 






      화암사 내사랑 - 안도현 인간세 바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미워하는지 턱 돌아앉아 곁눈질 한번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화암사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세상한테 쫓기어 산속으로 도망가는 게 아니라 마음이 이끄는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습니다 마을의 흙먼지를 잊어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산은 슬쩍, 풍경의 한 귀퉁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구름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 한 채 그 절집안으로 발을 들여 놓는 순간 그 절집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 구름의 어깨를 치고가는 불명산 능선 한자락 같은 참회가 가슴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이 화암사 안마당에 먼저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의 뒤를 그저 쫓아다니기만 하였습니다 화암사, 내 사랑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주지는 않으렵니다 안도현의 <화암사가 있는 풍경> 화암사는 낡고 작다. 허름하다. 세월에 부대껴 기둥은 까매졌고, 단청은 희미해졌다. 목어에는 두껍게 먼지가 내려앉았다. 세월을 끄덕 없이 버텨온 잘 단장된 절 같았으면 눈길조차 받지 못했을 텐데…. 사람처럼, 아니 우리들처럼 세월에 지치고 늙어가서 더 마음이 가는 절, 그게 화암사다 ( 심인보 저 '곱게 늙은 절집' 글 중에서 ) 음악 : "겨울아침의 정경" - 유은선 (해금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