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나'를 보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2011. 5. 21. 21:0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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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이 몸과 마음으로는 '참 나'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참 나'를 보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 답변 >

 지금 질문하는 게 누구요?· · · · · · · · · · · · '나'가 됐건 '너'가 됐건, '나'라고 혹은,
'나' 아니라고, 그런 식으로 지칭할 수 있는 대상이 도무지 없소.· · · · · ·

질문의 내용은 차치하고 우선 그 질문이 어디서 나오는가를 먼저 알아야 하오.· · · · · ·

그 육신은 질문할 수가 없소. 지각이 없기 때문이오. 일체 모든 일어나는 현상은,

그것이 심리현상이 됐건 물리현상이 됐건, 전부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이지 주제자가 없소.

하긴 하는데 하는 자가 없다 소리요. 모든 사람이 '하는 자가 있어서 그가 무엇을 한다'는

구도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참된 하나를 놓치고 모든 것을 이원적으로 파악하면서

이쪽저쪽 하는 버릇 때문에 생긴 거요.

 천지 삼라만상이 온통 '나'인데, 또 '참 나'를 알고 싶다니?· · · · · ·

'참 나'를 알고싶다는 그 물음이 나온 곳을 알면 '참 나'가 뭔지 저절로 알게 될 거요.· · · ·

그렇다고 궁리 끝에 "아, 이것이 '참 나' 구나" 하고 알면, 벌써 알음알이 굴려서 바깥을

더듬으며 하는 헛소리요. 천지가 온통 '나 혼자'뿐이라면 '참 나'를 어떻게 알겠소?· · · · · ·

어느 날 허공이 "허공이 뭔지 모르겠는데, 허공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고

있는 격이오.

 마음이 부처고, 마음의 성품이 '나'고 하는 일련의 말들은 전부 방편으로 하는 소리요.
온통 '마음뿐'이라고 하면서도, '마음뿐'이란 사실을 '내'가 알았다고 한다면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한 말이요?· · · · · ·

만약 굳이 얘기한다면 자각(自覺), '스스로 깨닫는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그것은 깨달은

자가 있고 깨달은 바가 있는 그러한 관계가 아니오.· · · · · ·

'소 타고 와서 소를 찾는다'는 말을 깊이 참구해 보시오.

 

 

< 질문 > '지금'도, '여기'도, '나'도 없어서 금시인(今時人)을 다 날려버리니

              도무지 할 말이 없습니다.



< 답변 >

 이것도 저것도 다 없다면서 뭔 말이 그렇게 주절주절 많소?· · · · · ·

단 한 마디 말이라도 자기가 하는 말의 뜻을 철저히 사무치고 말하시오. 그렇게 한 토막

지견을 추켜들고 뻔지르르한 말로 싸 발라서는 전혀 아무 공덕도 없소.

오히려 점점 멀어지기만 할 뿐이오.

· · · · · · 시간도 공간도 다 없는데 지금 누가, 무슨 질문을, 누구한테 한 거요?· · · · · ·
말장난하지 마시오. 심지어 불법공부 합네 하면서 옛 선사들 선문답이나 어디서 줏어 읽고
그런 어투나 흉내내면서 자기도취에 빠진 한심한 사람들이 많소. 자기가 자기 자신을 속여
뭐하겠소?· · · · · · 이 법은 지극히 평상한 법이오.

 '지금'이 없다고 그러지만, '지금'이 '지금'인 채로 '지금'이 없는 거지, '지금'이 없어지는
게 아니오. 있는 게 없는 거고, 없는 게 곧 있는 거라 소리요. 늘 하는 소리 아니오? '없다'는
소릴 들으면 '있다'만 보내는 게 아니라, '없다'까지 마저 보낼 줄 알아야 그가 바로 보살
이라고.· · · · · · 있음에도 머물지 않고 없음에도 머물지 않는, 그 어간에서 알아차려야
하오. 말만 배우고 알음알이만 굴려가지고는 천 년, 만 년 가도 가망 없소.

 법이라는 것은,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해서 법이라고 짓지 않으면, 법 그 자체는 스스로
세워질 수가 없는 거요. 전부 인간 두뇌의 산물에 불과한 거라 소리요. 이 말은 그 법이
옳은가 그른가, 참인가 허망인가 하는 따위의 그 내용의 문제가 아니오.

그런데도 계속 말만 배우고 말에만 매달려서 십 년이 가도, 이십 년이 가도 여전히 이건가

저건가, 옳은가 그른가에만 온통 마음을 빼앗겨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일이오.· · · · · ·

 

만법이 성품이 없소. 그렇다면 모든 헤아리고 더듬는 추리, 추론은 그 자리에서 즉시 종언

(終焉)을 고해야 하지 않겠소?

 

 

 

 

인연이 깊을수록 미안한 것이 많다.

 

  

인연이 깊을수록 미안한 것이 많다.

"불교신행에 있어서 참회가 매우 중요하다.

그릇된 업을 고쳐가는 지름길이 참회에 있다.

 

참회라고 말하면

큰 죄를 지은 사람이 용서를 비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도덕적 부담감이 큰 죄의식의 참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르고 지나갈 번한 작은 에러성의 자신에 대한 참회도 있고

남에게 실수한 사소한 잘못을 자책하는 가벼운 참회도 있다.

 

참회란 범어의 크사마(ksama)의 역어인데

쉽게 말하면 미안해하는 마음이다.

 

사람이 쓰는 인사말 가운데 "미안합니다"라는 말이

어느 나라 말에도 예외 없이 다 있다.

인사말이 있다는 것은 언어적 습관을 통해 우리는 때로 남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말의 경우 윗사람에게는 "죄송합니다"라고 경어를 써 예를

갖추어 말하면서, 정말 수줍고 부끄러운 표정으로 사과를 하는

겸손한 인사는 스스로의 도덕 수준을 높이는 인격수양의 모범이 된다.

 

물론 예의로서의 인사가 인륜의 도리를 세워가는

도덕률 제고의 큰 역할을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자칫 사람들은 이 예를 잃고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구나 현대의 사회심리 현상을 보면

도덕적 정신박약증이 점점 깊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환자에게 있어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자기가 걸려 있는 병을 아예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잘못을 자각하지 못하고 사는 것은 병든 환자가

자기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과 같다.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의 수행은 자각정신에서 이루어진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 꼭두각시나 허수아비의 삶을 면할 수 없다.

자각정신을 일깨우는 가장 좋은 방법이 참회의 생활이다.

 

이는 우리들의 생활을 개선하는 지극히 소중한 친화력과

화합력을 얻게 하는 원동력이다.

사람사이에 일어나는 불화의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이는 어느 누구의 마음에 잘못이 참회되지 않고

나쁜 업력의 기운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회는 자기의 업장을 소멸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시쳇말로 팔자가 좋지 않다는 것은 업장이 두텁다는 말과 뜻을 같이 한다.

때문에 참회는 곧 자기 팔자를 고치는 일이기도 하다.

문명의 세계 속에서 의.식.주 고급을 누리고 사는 오늘의 현대인들이

예상외로 고압적이고 딱딱한 주관을 가지고 적대감정으로 남을 대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남을 곧잘 무시하고 예사로 실례를 범하며 예의가 결여된 행동으로

남을 불쾌하게 하는 사례가 빈번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을 불교에서는 강강중생(剛强衆生)이라고 한다.

강철처럼 단단하여 굽어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겸손해 할 줄 모르는 사람, 다시 말하면 참회할 줄 모르는

업장이 두터운 중생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많으면 자꾸 불화가 조성되어 개인의 가정이나

단체의 사람들이 불화에 빠지고, 그 여파가 사회적 불안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사람들은 어디로 가나 제 잘난 체만 하지 사람 사이에 친화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시비를 따지고 불평을 하는 데는 남에게 뒤지지 않지만

남의 입장을 배려해 주는 데는 아주 인색해져 버린다.

생존경쟁이라는 말이 있어도 인생은 경쟁만이 아니다.

물자의 생산에 있어서 경쟁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도덕적 우위를 점유하기 위해서는 양보와 겸손이 필요하다.

 

또한 삶이란 너와 나의 대립적 자존심 경쟁도 아니다.

이해와 포용으로 정신공간을 더 확장해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참회는 증오의 마음을 푸는 일이며

자기 자신을 개혁하는 의지를 가다듬는 일이다.

또한 참회는 자기 마음의 정서를 가장 부드럽게 하는 일이다.

어둠을 비춰주는 등불처럼 내 마음의 등불을 켜서,

내 마음속의 어둠을 없애는 것이 참회이다.

 

내가 미안해하면 상대방도 미안해한다.

상호간에 밝은 마음을 소통하여 믿어 주고 기도해 주는

순수한 인간애가 참회의 정신에서 나온다.

 

그럼에도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이 참회의 마음을 놓치고 산다.

맺어진 인연이 주는 의무와 권리가 동시에 있다면

참회는 분명히 그 인연 속에 지켜야 하는 하나의 의무이다.

그것은 누구를 위해 기도를 해 주는 마음과 똑같은 것이다.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이런 질문을 한다고 한다.

"그대는 자기가 지은 죄를 얼마나 참회하고 왔느냐?"

좋은 일을 얼마나 하고 왔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죄를 얼마나 참회하고 왔느냐고 묻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인연이 깊으면 참회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것이다.


 

■ 지안(志安) 스님

 

 

 

♬배경음악:가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