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삼삼후삼삼(前三三後三三)

2011. 5. 21. 21:4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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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삼후삼삼(前三三後三三)

 

 

이 말은 문수보살과 무착 선사의 문답으로 <벽암록>에 나오는 선어이다.
문수보살은 모든 보살 중에서도 지혜가 가장 뛰어나서 '지혜의 문수'라고 일컬어진다.
옛날부터 지혜의 대표자로 존경받고 있다.
문수보살은 이타의 자비문을 맡은 보현보살과 마주하여 석가 모니
부처님의 왼쪽에 앉아 있는데, 이 셋을 삼존불이라 부른다.


 

무착 선사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여러가지 설이있으나
일단은 위앙종을 개창한 앙산혜적(仰山慧寂)의 법을 이은 무착문희(無着文喜)로 본다.
문수의 출현이나 무착의 역사적 사실성에 대해서는 여기서는 다룰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문수와 무착의 문답 내용이다.
무착이 문수보살의 영험 도량인 중국 산서성 오대산에 참예하러 갔다가
문수를 만나 문답한 이야기다.


 

<벽암록>에 나오는 양자의 문답을 살펴보자.


문수:어디서 오는가?


무착:남쪽에서 옵니다.


문수:남쪽의 불법은 어떠한가?


무착:말법 세상이라서 계율을 지키는 자가 적습니다.


문수:그 무리가 어느 정도인가?


무착:삼백에서 오백 정도입니다.


 

이번에는 무착이 물었다.


무착:이곳은 어떻습니까?


문수:범부와 성인이 동거하고 용과 뱀이 섞여 있다.
 

무착:그 무리가 어느 정도입니까?


문수:앞도 셋셋 뒤도 셋셋이다.


 

이 '앞에 셋셋 뒤도 셋셋'의 의미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 다.
첫째는 앞뒤를 피차로 해석해 '저쪽에도 셋셋 이쪽에도 셋셋'으 로 보는 것이다.
피차간에 수가 같으며, 적지 않은 수라는 것을 나타낸 말이다.
둘째는 셋셋은 헤아릴 수 없고 한량없다는 뜻으로 앞도 뒤도 무수하다는 설이다.


 

선의 입장에서는 물론 후자의 설을 취한다.
즉 셋셋은 무수무한 (無數無限)이기 때문에
문수가 답한 '앞도 셋셋 뒤도 셋셋'은 앞뒤를 막론하고
그 수가 무수히 많다는 말이다.
요컨대 불법을 수행하지 않는 자가 없다는 뜻이다.


 

문수의 절대지의 입장에서 보면 범부와 성인,
선과 악의 차별 없이 모두 평등한 인격적 가치를 갖춘 존재라서
앞뒤 셋셋의 수량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범부와 성인, 선과 악의 차별이 없다는 뜻에서
문수는 '범부 와 성인이 동거하고 용과 뱀이 섞여 있다'고 답한 것이다.


 

그 수량이 무한하고 무수하다고 하지만,
이는 출세간적인 절대의 경지에서 나온 수량이라서 수량을 초월한 수량으로 보아야 한다.
무착이 답한 삼백에서 오백정도의 수량은 세간에서 통용되는 통속적인 표현이다.
앞뒤나 셋셋의 수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집착은 문수의 참뜻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이며, 선의 핵심을 체득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일체의 망상분별을 끊고 고차원에 서서 비춰보아야 한다.
무착은 문수가 답한 "앞도 셋셋 뒤도 셋셋"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문수와 헤어진 뒤 어느 동자 의 깨우침에 의해 비로소 이해했다고 한다.

 

<碧巖錄>

 

전삼삼前三三 후삼삼後三三

김대철(如泉茶文化 원장)

 

 

 

밝은 도인(道人)을 만난다는 일은 언제나 가슴을 뛰게 한다. 어느 해 봄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차(茶)단체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는 차인회(茶人會) 식구들과 함께 통도사 극락암(極樂庵)을 찾았다.
 

지금은 극락선원(極樂禪院)으로 불리지만, 당시 경봉(鏡峰) 노스님이 오랜 세월 주석했기에 더 유명했던 극락암은 언제 어디에서 봐도 명당이었다. 극락(極樂)’에 오르자 곧바로 선사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선사의 그 유명한 ‘삼소굴(三笑窟)’을 마주한 요사채였다.
 

찾아온 이들이 차문화(茶文化)를 연구하고, 차(茶)운동하는 차인(茶人)들이라 소개하니 선사는 대뜸,
 “차 몇 잔 마셨느냐?”
 하고 선문(禪問)을 던졌다.

 선문(禪問)의 비수가 아닌, 조주(趙州)선사의 ‘차 한잔 들게나〔喫茶去〕’라는 화두처럼 노스승의 배려였다. 마조(馬祖)의 고함도 아니요, 덕산(德山)의 방망이도 아닌 참으로 차 한 잔과 같은 따뜻한 물음이었지만, 그 뜻밖의 질문에 모두들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러자 경봉 노사(老師)는 빙그레 웃으며 우리에게 화두를 던졌다.
 “전삼삼(前三三) 후삼삼(後三三)”
 ‘차(茶)를 마신 만큼 선(禪)이 된다’는 의미를 그 당시 알았더라면 어떤 답이라도 했을 텐데……. 허나 이미 머리를 굴린 것 자체가 선문답이 아니지 않는가.
 

차를 즐겨 마신다는 것, 차를 통해 도(道)를 느낀다는 것, 다도 수련을 하며 마음공부에 들어가는 일이 바로 사람공부이리라. 한 잔의 차에 인생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자는 청복(淸福)을 누리는 자유인이리라.

 ‘전삼삼 후삼삼’이라니 모두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선사의 처소를 빠져 나왔다. ‘차 몇 잔 마셨느냐?’란 숙제를 가슴에 안은 채.
 파초 잎이 절집 뜰에 늘어져 선방(禪房)의 운치를 더해 주었다. 노선사의 방을 ‘파초실(芭蕉室)’이라 부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산머리에 걸린 달은 운문雲門의 떡이요
      문 밖에 흐르는 물은 조주의 차茶일세 
      이 중에 어느 것이 진삼매眞三昧인가
      구월 국화는 구월에 피는구나.

 

 알려진 노선사의 ‘다선일미(茶禪一味)’라는 글이다.
구월 국화가 구월에 피는 이치를 알려면 ‘삼소굴’ 뜨락에서 경봉선사의 감로차(甘露茶) 한 잔 마셔보면 알리라.

지금은 경봉선사도 열반에 들어 ‘극락(極樂)’에 없다. ‘극락’에 길이 없는데 어떻게 왔느냐?”며 찾아온 이에게 경쾌한 선문을 날리던 스님이었다.
 그러던 선사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 후, 다시 한 번 경봉선사를  친견했는데 그 때는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땀을 줄줄 흘리며 찾아간 극락암에서, 절 세 번을 올리고 경봉스님을 만났다. 당시 경봉스님은 몸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대뜸 내 나이와 직업을 묻더니, “한창 좋은 때다” 하며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벽암록』의 “인생의 가장 행복한 때가 언제인가? 바로 오늘이다”란 글귀가 불현듯 생각났다. 지금 이 순간 말고 가장 좋은 때가 언제란 말인가. 어제는 지나갔고, 내일은 오지 않았다. 아니 내일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날이지 않는가. 원효스님이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에서 간절히 당부하던 ‘…그 수많은 생을 헛되이 살면서 이 한평생을 닦지 않는가. 이 몸은 끝내 죽고야 말 것인데 다음 생은 어이 하랴…’는 절절한 이야기가 가슴을 쳤다.

 “스님, 손 한번 잡고 싶습니다.”
 노스님은 양 손 모두를 내밀었다. 노스님의 양 손을 잡은 채 바라 본 깊고, 그윽한 경봉선사의 눈빛은 나를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한 심경으로 바꿔 놓았다.
 무언가 삶의 근원적인 문제에 목말라 하던 내 영혼의 언저리를 감싸주던 포근함이었다.

 

엇이 문제인가. 문제없는 삶이란 없다. 인생 그 자체가 문제 덩어리이리라. 난제(難題)란, 늘 동행하는 것이고, 그 해답은 그대들에게 있다.

 평상시 차를 즐겨하던 차승(茶僧)이었기 때문일까. 말로만 듣던 감로차(甘露茶) 한 잔 마신 기분이었다. 선사(禪師)의 눈빛은 선(禪)이었고 내 마음은 차(茶)가 되어, 심신의 탐진치(貪塵恥)를 씻어버린 느낌이었다.

 차 마시는 일, 선(禪) 아닌 것 없으니, 다선일미(茶禪一味)란 말이 가슴에 와 닿는구나.
 어디에서 또 이런 스승을 만날까. 예나 지금이나 곳곳에 눈 밝은 도인(道人)은 숨어 있다지만, 그 인연 그 행운을 통도사 솔숲 길을 거닐며 그리워한다.

 

       
      ◆ 말 한마디 ◆
      
      
      
      허공을 향해 화살을 쏘았거니, 
      화살은 날아가고 찾을 수가 없구나 
      날아가는 화살의 자취를 
      뉘라서 그 빠른 것을 따라잡을 수 있는가. 
      허공을 향해 노래를 불렀거니, 
      노래는 자취를 찾을 수 없구나 
      날카롭고 강한 눈인들 
      날아가는 그 노래를 따를 것인가. 
      세월이 흐른 후 참나무 밑둥에 
      화살은 원래의 모습으로 꽂혀 있었고, 
      노래는 처음부터 끝까지 
      친구의 가슴속에 새겨져 있었다. 
      많이들 애송하는 시,
      롱펠로우의 화살과 노래입니다.   
      얼핏보면 허공과 화살은 특별한 것 같지만
      우리의 일상에서 만나는 것들입니다.
      그렇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오늘이 더욱 소중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자신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들,
      말이나 행동거지,등등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생각을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말이나 행동이 타인에게
      화살이나 노래처럼 잊혀지지 않고
      오래도록 기억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하면 
      더더욱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