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불멸의 고향으로/청화스님

2011. 6. 11. 11:4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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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慧)해탈과 정(定)해탈을 갖춘 구해탈(俱解脫),

영생불멸의 고향으로

 

청화큰스님


지금 우리 불자님들이 함께 깊이 음미하신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은 그냥 보통 우리가 누구나 할 수 있는 법문(法門)이 아니라, 이 협소한, 협착하고 옹졸한 우리 마음을 한도 끝도 없이 무한대로 확장하고 확대하는 법문입니다.

우리 마음은 본래 모양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원래로 한도 끝도 없이 무변무량한 것이지만, 우리 중생이 잘못 살아서, 버릇 때문에 우리 마음이 아주 옹색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마음을 본래 마음자리로 돌리지 못하면 우리 인간은 참다운 발전이 없습니다. 참다운 해탈이 없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성불이나 해탈이란 것도 그냥 이 마음 그대로 두고서 해탈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한도 끝도 없이 무량무변한 본래의 마음자리로 돌아가고 동시에 우리 몸도 그만큼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 따로 몸 따로 생각합니다만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이 가령 한 5쯤이나 정화가 되면 우리 몸도 역시 5쯤이나 정화가 되어야 됩니다. 부처님 법을 정확히 모르는 분들이 더러 우리 몸 행동은 설사 어떠한 경우에 음식도 함부로 먹고 남녀 이성 간에 사귀는 것도 함부로 그렇게 불순하게 하더라도 우리 마음만 깨달으면 그만 아닌가라고 그릇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또는 근대에,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음따로 몸따로, '마음은 깨달아 도인이 되었는데 몸은 무애행이라 조금도 거리낌 없이 함부로 행동한 도인도 있다' 이렇게 그릇 전달 된 가르침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령 계율을 두고 봅시다. 계율은 도덕적인 행위인데 이 도덕적인 행위가 없이 우리 마음이 해탈이 될 수가 없습니다. 어째서 그런고 하면, 해탈 곧 깨달음이란 것은 욕계 번뇌를 떠나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욕계에 있습니다. 중생이 업 따라서 생사 윤회하여, 이쪽 저쪽으로 전락(轉落)이 됐다가 또 훨씬 더 초승(超乘)이 되는 등, 오르내리는 것은 모두 다 우리가 지은 업 따라서 자업자득으로 그렇게 됩니다.


헌데 우리 중생의 업(業)이 제일 무거운 데가 욕계(欲界) 아닙니까. 욕심이 좋기야 상당히 좋겠지요. 뭘 맛있게 먹어도 좋고, 또 자기 마음에 아주 내키는 이성과 함께 사랑해도 좋고, 또는 명예욕(名譽慾)도 좋고 말입니다.


요즘 더구나 선거철이라 명예 때문에 모든 문제가 상당히 복잡해지고, 본인들도 괴롭고 여러 사람한테도 괴로움을 주고 그런 사례가 많지 않습니까. 물론 선거가 필요 없다고 말씀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든 간에 오욕(五慾)-이른바 음식 욕심, 잠 욕심, 또는 이성 욕심 또는  명예 욕심, 재물 욕심이 오욕 아닙니까- 이 다섯 가지 욕심이 꽉 차있는 것이 이른바 욕계입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 누구나가 다 추구해 마지않는 오욕이 차근차근 줄어져야 욕계에서 벗어나는 것이지, 그렇지 못하면 절대로 욕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욕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참다운 자유인이 못됩니다. 자유 없이 행복이나, 우리가 바라는 바의 해탈이 있겠습니까.


부처님 가르침은 정확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아주 수학같이 정확합니다. 꼭 우리가 사는 대로, 느낀 대로 우리가 그 과보를 받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욕계 번뇌를 해탈하고, 색계 번뇌, 색계 번뇌란 우리 인간은 물질이란 것이 우리가 소박하게 보는 대로 내 몸뚱이도 있고 저 대상도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반야심경에 제법이 공이라, 모든 법이, 나라는 것이나 너라는 것이나, 대상적으로 우리한테 감각 되는 것이나, 모두가 다 허망한 것이다, 라고 허두에 나와 있지 않습니까.

이른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색즉공(色卽空)이라, 간단한 말씀입니다만 심심미묘(甚深微妙)한 우리 인생관, 세계관이 거기에 다 들어 있습니다.

즉 색계번뇌(色界煩惱), 색계 번뇌란 것은 우리가 여기에 태어나서 죽고, 또 저기에 태어나고 하는 윤회의 가르침, 지금 우리 불교인 가운데도 불교를 깊이 음미하지 못하신 분들은 이 윤회의 가르침은 하나의 방편설이다,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들한테 바르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방편으로 말씀하신 것이지, 불교의 본래 깊은 심오한 진리는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윤회란 비단 부처님만 역설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 철인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기원전 5세기), 이 분도 역시 윤회설을 말하고 있고, 이 보다 더 앞선 그리스의 아주 위대한 분들도 말씀했고, 지금 서구철학(西歐哲學)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소크라테스(Socrates, 469~399 BCE)라든가 플라톤(Platon, 428/427~348/347 BCE)이라든가 또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 BCE) 나 이런 분도 모두 윤회설을 긍정하고 역설했습니다. 이른바 오르피시즘(Orphism 또는 Orphicism)이라, 이 윤회설이란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진리란 것은 우리 동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서 볼 때, 마음을 깨달은 성인들 말씀은 다 똑같습니다. 얼마만치 성인들이 투철하게 인생과 우주의 진리를 깨달았는가 그런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진리의 지향점은 다 똑 같습니다


참선 공부란 것은 '우리 마음이 본래로 부처다' 이런 자리에서 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저번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참선은 그와 같이 돈오(頓悟)라, '문득 내 마음이 본래로 부처고, 천지우주가 모두 다 바른 눈으로 보면 부처 아님이 없다' 여기에서 부터 출발해야 참선이 됩니다. 참선 공부와 다른 공부와의 차이는 거기에 있습니다. 다른 공부는 점차로 한 단계씩 올라가는 공부지만 적어도 참선한다 이럴 때는 본래면목 자리, 인생과 우주의 참다운 자리, 이런 자리를 문득 깨달아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화두를 들고 의심을 하고, 또는 염불을 하고, 또는 잠자코 명상하고, 이런 것도 모두 다 그런 본래면목 자리를 문득 깨닫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문득 깨달아서 '나나 또는 이것저것이 모두가 본래로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알면 참선의 본래적인 의미에서 말하면 화두 타파라고 그러죠. 타파라, 화두 타파를 미처 못하니까 의심이 필요하고, 뭣이 필요한 것이지, '나나 너나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 다 본래로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안다고 생각할 때는 다시 의심할 아무런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참다운 참선의 시초 돈오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이치로 해서는 조금도 의심이 없이 확실하니 안다 하더라도 우리가 과거생(過去生)부터 지어 내려온 그런 나쁜 습관성, 불경(佛經)에 보면 일념오백세(一念五百世)라 계념무량겁(繫念無量劫)이라 이런 법문이 있어요, 이 말은 무슨 말씀인고 하면, 일념이, 한 생각 한 생각 우리가 낸다고 생각 할 때, 한 생각이 우리가 순간 동안 한 생각을 내지 않겠습니까, 밉다든가 좋다든가 욕심을 내든가.

한 생각 내는 그 생각이 오백세라 그대로 사라지지가 않고서 한 생각 내면 500생 동안이나 우리 마음 잠재의식에 흔적이 남아 있단 말입니다. 계념무량겁이라 미운 사람, 저 놈이 못됐으면 되겠다, 저 놈 죽었으면 되겠다, 이렇게 계속해서 생각한다면 맬 계(繫) 자 생각 념(念) 자 계념(繫念) 이라 계속해서 우리 마음으로 생각한다고 할 때는 무량겁(無量劫) 이라 오랫동안 우리 잠재의식에 흔적이 남는단 말입니다. 사람 미워하면 더욱더 미워지지 않습니까, 누구 사랑하면 더욱더 사랑해지지 않습니까, 이런 것도 모두가 우리 잠재의식에다 우리가 그때그때 생각을 내는 족족 흔적을 둡니다. 자리를 둔단 말입니다.


우리가 문득 내 본래 면목이나 모두가 본래로 부처다, 이렇게 재주가 있는 분들이 문득 깨달아서, 이것도 업장이 무거우면 잘 안 됩니다, 업장이 가벼워서 부처님 말씀을 100 프로 잘 받아들이는 그런 분들은 아 본래로 내가 부처가 아닌가, 천지 우주는 모두가 다 텅텅 비어있는 제법 공이 아닌가, 이렇게 해서 우리가 납득이 되었다 하더라도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잠재의식에 남아있는 그때그때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생각하고 그 이른바 습기(習氣)라, 이것보고 불교에서 습기라 그래요 익힐 습(習) 자 기운 기(氣) 자 말입니다. 습기(習氣) 란 것은 그냥 쉽게 단박에 끊어지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능엄경(楞嚴經), 능엄경은 선수(禪髓)라, 참선의 골수(骨髓) 같은 경이라고 그래요. 능엄경에 보면 참선하는데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할 것인가, 그런 것이 아주 소상히 다 나와 있습니다. 참선할 때는 전제적으로 먼저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런 가운데 중요한 것 하나가 선단음심(先斷淫心)이라 먼저 선(先)자 끊을 단(斷)자 음탕할 음(淫)자 마음 심(心)자 먼저 음탕한 마음 끊으란 말입니다.


우리 욕계 번뇌 가운데 식욕도 무섭지만 남녀 이성간의 욕심이 굉장히 무서운 것 아닙니까. 우리 인간이 지금까지 이와 같이 번창하고 있다는 것도 역시 음탕한 마음 때문에 그럽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더욱 더 수가 많아져서, 인구가 더욱더 팽창되어서, 지금보다도 2 배 3 배 더해도 무방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나 그런 분들은, 자본주의의 폐해만 없어지면 인구야 얼마든지 팽창해도 무방하다는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 팽창해서는 안 됩니다. 너무 팽창해서는 인구 과잉이 되서 우리가 못살아 갑니다.


지금 2차 대전 이후에 우리 세계 인구가 거의 1~2 배 가까이나 불었다 그래요. 한 50~60년 동안에 우리 인구가 2배 가까이나 불었다고 생각 할 때는 앞으로 또 한 50~60년, 100년 지나가면 우리 인구가 얼마나 불겠습니까. 사람이 불어나면 자동차도 그마만치 수가 불어나겠지요. 이것은 남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인구를 줄여야 합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많이 죽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나 하고, 그런 비도덕적인 비윤리적인 행동으로 인구를 감소시킬 수는 없는 문제 아닙니까.


우리 인간의 자제력으로 해서 우리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 가운데 무서운 욕망의 하나인 음욕을, 남녀 간의 음욕을 우리가 절제해야 한단 말입니다.

기독교를 보고, 이슬람을 보고, 또 불교를 보십시오. 부처님께서나 성인들이 성직자한테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기독교 신부나 수녀나 또 불교의 비구나 비구니나 모두가 다 독신생활을 강력히 요구하셨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내내야 식욕이나 음욕이나 욕계 번뇌입니다. 한사코 우리가 욕계 번뇌를 떠나야 합니다.


가령 우리가 부부관계가 되어서 아주 화목하고, 아 좋은 2세를, 후대인들을 길러내고, 그런 것도 중요한 일 아닙니까. 그러나 욕계 번뇌를 절제하는 것은 그 못지않게 그 이상으로 중요합니다. 저는 가끔 육재일(六齋日) 말씀을 드리지 않습니까. 육재일이라, 육재일은 8일, 14일, 15일, 23, 29, 30일, 한 달에 여섯 번 재일이 육재일 아닙니까. 재일이란 것은 우리 인간이 정말 청정하니 욕계 번뇌를 하다못해 그날만이라도 꼭 지켜야 한다는 부처님의 간곡한 가르침이 육재일입니다.

육재일은 어떻게 사는고 하면 우리 중생은 평소에 너무나 많이 먹어요. 많이 먹으니까 하다못해 육재일만이라도 하루에 한 끼를 먹으라는 것입니다. 또는 그날만이라도 아무리 내외간 금슬이 좋다 하더라도 그 날 만이라도 절대로 남녀 이성관계를 말라는 것입니다. 술도 먹지 말고, 담배나 그러한 불필요한 것은 먹지도 말고, 하루 동안만이라도 그렇게 해야 자제하는 좋은 습관이 길러집니다.


불자님들 우리는 그렁저렁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본래의 자리가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한도 끝도 없는 무량 공덕을 갖춘 진여 불성이 우리의 본래의 자리입니다. 이 본래의 자리를 우리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냥 아무렇게나 거기에 따르는 공덕 없이, 우리의 선근이 없이, 들어갈 수가 없단 말입니다. 선근도 길러야 되고, 또는 이른바 도업(道業) 이라 길 도(道) 자 업 업(業) 자 도업을 길러야 됩니다.


도업은 무엇인고 하면, 우리가 해탈하기 위해서, 해탈이란 우리 모든 존재의 지상명령(至上命令)입니다.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 동물도 그렇습니다. 비록 현세에 소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돼지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항시 돼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차근차근 그네들이 영원의 길로, 해탈의 길로 지금 가고 있습니다. 풀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의 풀이 이파리 나와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고 다 모든 것이 영원적인 자리, 영원적인 하나의 진리자리.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플라톤이나 또는 플로티노스(Plotinos, 204~270 CE)나 그런 위대한 철인들은 다 그와 같이 말씀을 하셨어요. 모두가 다 한결같이 영원적인 해탈로 나가고 있습니다. 가장 선구적인 분들이 성인으로 먼저 해탈을 했고, 또 우리한테도 해탈을 그만 독려하고 다 그러지 않습니까.


해탈에도 구해탈이라, 함께 구(俱)자 구해탈(俱解脫) 이라,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 중생들이 우선 이치로 철학적으로 꼭 해탈을 해야겠다는 당위성을 알아야 되겠지요. 우리가 남한테 뭘 베푼다 하더라도, 아 저 사람 불쌍하니까 베푼다, 이보다도 아 저 사람과 나와 본래로 하나의 생명이 아닌가, 이와 같이 철학적으로 동일성(同一性)을 알고서 베풀어야 무주상(無住相), 상이 없는 베풀음이 됩니다.


따라서 구해탈이라 먼저 이론적으로 먼저 체계를 갖추어야 된단 말입니다. 하이젠베르크와 같은 분도 위대한 물리학자 아닙니까만, 훌륭한 실험을 하려면 이론이 먼저 앞서야 합니다. 정확한 이론 없이 훌륭한 실천이나 실측이나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 예수님 가르침, 또는 공자님 가르침, 노자님 가르침, 다 모두가 다 한결 같습니다. 먼저 이론적으로 해탈하지 않으면 안된다, 꼭 욕계 번뇌를 떠나야 된다, 이런 당위성을 먼저 철학적으로 굳건히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재주가 좀 있는 사람들은 철학적으로 알면 아 내가 지금 공부를 지금 무던히 했다, 나는 지금 공부가 다 됐다, 이렇게 제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치로 알고서 공부가 다 되었다 해가지고서, 함부로 행동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제가 함부로 지적하면 그야말로 상당히 문제가 생기겠지요. 저는 그런 지적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만 구해탈(俱解脫) 이라, 구해탈은 결국은 우리 마음이 우리 본래 면목을 증명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 생리 자체도 정화를 시켜야 된단 말입니다.


공자님은 70세에, ‘나는 70이 되어서 내 마음대로 행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는 말씀을 했지 않습니까. 그것은 마음대로 술도 먹고 담배도 먹고 이것저것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공자님이 70 이 되어서 마음으로 조작을 않더라도 그냥 자기 스스로 모두가 다 좋은 행동만 해진단 말입니다.


자기 몸뚱이와 남과 둘이 없고, 천지와 더불어 내가 둘이 없다는, 그렇게 사무치게 확실히 안다고 생각할 때에 함부로 행동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이치로라도 즉 당위적으로 철학적으로 천지우주가 원래 뿌리가 같고 나와 남이 더불어서 다 하나다, 이렇게 우리가 앎과 동시에, 우리 스스로 본래 면목자리, 생명의 본래의 자리, 생명의 본래의 자리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불성 아닙니까. 부처 불(佛) 자 성품 성(性) 자 진여 불성의 자리, 이 자리가 바로 모든 존재의 근원적인 자리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와서 거기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의 근본 고향이 진여 불성입니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빠르고 더디고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다 지금 불성자리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대로 다른 짐승은 짐승대로. 따라서 그 불성 자리를 증명을 해야 함께 구 자 해탈이라 구해탈이라, 온전히 해탈이 된단 말입니다. 성자란 분들은 온전히 해탈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성자가 미처 못되어 이치로 확실히 안 분들은 불교적인 의미에서는 현자(賢者) 라고 그래요. 어질 현(賢) 자 놈 자(者) 자 말입니다. 따라서 현자도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사람이 절대로 아닙니다. 충분히 자기 의지로 해서 도덕적인 행동을 충분히 할 수 있는 분이 이른바 현자란 말입니다.


성자는 우리의 인간적인 욕계 번뇌 색계 번뇌 무색계 번뇌 모두를 다 떠나버린 영원적인 참다운 진리의 당체인, 진여 불성을 온전히 깨달은 분이 이른바 성자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것을 짧은 인생에 내가 어떻게 다 할 것인가 이렇게 생각을 마십시오. 사실은 그 길이 제일 쉬운 길입니다. 천지 우주는 지금 그런 길로 지금 가고 있어요. 모두가 가고 있는 것인데 우리가 업장 때문에 자꾸만 정지를 시키고 후퇴를 하려고 그런단 말입니다.


함께 구(俱) 자 구해탈 이라, 구해탈을 꼭 명심해 두시기 바랍니다. 이치로만 본다고 할 때는 동양권의 성자들 또는 그리스 로마의 성자들 모두가 다 영원적인 길, 영원적인 하나의 진리의 길로, 그러나 그것으로만 만족하지 말고 우주가 하나의 생명이다. 하나의 고향으로 우리가 다들 돌아가고 있다. 우리 중생은 더불어 서로 피차 돕고, 내외 간이 구성되더라도 좋은 동지가 되서 말입니다. 남편이 너무 욕심내면 아내가 그만치 견제하고 말입니다. 아내가 욕심내면 또 남편이 또 견제하고. 이렇게 더불어 동지가 되어서 구해탈, 영원한 우리의 고향, 자유와 행복과 모든 가능성이 깃들어 있는 영생불멸한 고향자리로 일로 매진하시기를 간절히 빌어 마지않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2002년 6월 2일 성륜사 정기법회 법문

 

 

 

 

 

 

일심(一心)이란 무엇인가?

 


 

중생심의 바탕 됨은 모양도 없고 성품도 없어서 바다와 같고 허공과 같다.

원효는 <기신론소>에서 성취해야 할 법이 왜 일심(一心)인가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일심법을 세운 것은 법을 의심하는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대승의 법에는 오직 일심만이 있으니, 일심 밖에 다시 다른 법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다만 무명(無明)이 자신의 일심을 미혹하여 모든 물결을

일으키고 육도(六道)에 유전한다.
그러나 비록 육도의 물결을 일으키지만 일심의 바다를 벗어나지 않는다.
진실로 일심이 움직여 육도를 짓기 때문에 널리 제도하려는 원을 일으킬

수 있다.
육도가 일심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동체대비심을 일으킬 수 있다.
이와 같이 의심을 제거해야 큰 마음을 일으킬 수 있다.”

일심이라고 이름한 이유에 대해서는

“더러움과 깨끗함의 모든 법은 그 본성이 둘이 없어 거짓과 참됨의 두

문이 다를 수 없기 때문에 ‘일(一)’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이 둘이 없는 곳이 모든 법 가운데의 실체이나, 허공과 같지 않아서

본성이 스스로 신령(神靈)하게 이해(理解)하기 때문에 ‘심(心)’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일체 경계가 자신의 마음과 다를 바 없는 일심을 깨달아야, 주객이

한몸인 줄 알고 자비의 마음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일심을 대승의

유일한 법으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일심이라고 이름한 뜻은 진여가 일체법의 본질이지만, 분별심이 없고

신령한 작용을 일으키는 마음을 중심으로 말하기 때문에 일심이라고
이름지어 부르는 것입니다.
<무량수경종요>에서는 일심(一心)은 번뇌에 물든 중생심이 아니라
중생심의 본체임을 이해하도록 중생심의 본성(衆生心性)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미타경소>에서는 이를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서
“중생심의 바탕 됨(衆生心之爲心地)은 모양도 없고 성품도 없어서

바다와 같고 허공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일심은 연기의 세계관을 신해(信解)하여 ‘연기즉공(緣起卽空)'을

통찰함으로써,일체 경계는 일심임을 주체적으로 증득한 지혜입니다.
일심(一心)은 대승의 유일한 법(法)이며,
여래의 마음이고, 중생심의 본성입니다.
무아의 생명이며, 나의 생명이고, 우주적 생명입니다.

일심은 자신에게 있으면서 일체의 경계를 포함합니다.
자신의 마음은 보는 마음이고, 일체경계는 보이는 마음입니다.
곧 일체 경계는 자신의 마음이 나타낸 모습입니다.
일심의 경지에서는 색(色)과 심(心)이 둘이 아니고,
예토와 정토, 생사와 열반이라는 상대적 개념도 사라져 버립니다.

원효는 ‘일체 경계는 일심’이라는 부처님의 지혜를 우러러 믿어야

한다(仰信)고 하였습니다.
‘우러러 믿어야 한다’는 것은 곧 종교적 신념입니다.
원효에게는 깨달음 혹은 열반이라 하여도 그것은 일심의 다른 이름이며,
정토 역시 종교적 신념으로 염원해야 할 세계인 동시에 스스로 깨달아
일심의 바다에 나아가는 한 문이었습니다.
이치가 이러한 때문에 허망한 번뇌를 여의고 꿈에서 깨어나 마음의

근원에 돌아가면, 예토와 정토, 생사와 열반 등 일체의 상대적 경계는

일심이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심의 근원에 있는 사람이 불보(佛寶)입니다.
일심으로 인도하는 가르침이 법보(法寶)입니다.
일심으로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승보(僧寶)입니다.
일심은 곧 삼보입니다. 

 

 

- 옮겨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