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하40송

2011. 8. 2. 20:4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염불 불보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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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하40송

 

 

 

 

 

문수보살님께 귀의합니다.

 

악의 힘을 파괴하신 분께 귀의합니다.

 

 

 

1송

 

고요한 물에 바람이 불면 물결이 부서듯이

 

왕께서는 단일한 것으로부터 여러 가지 것들을 만들어 내십니다.

 

한 사람의 궁수(弓手)인 이 사라하를 여러 얼굴로 보십니다.

 

 

2송

 

사팔뜨기 바보는 하나의 램프를 두 개로 보지만

 

보이는 것과 보는 자는 하나입니다.

 

그대 조각조각으로 부서진 마음이여!

 

 

3송

 

많은 등불이 집 안에 켜져 있지만

 

장님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있습니다.

 

무위(無爲)가 모든 곳에 스며들어 있지만

 

어리석은 자는 자기 코 밑에 있는 것도 보지 못합니다.

 

 

4송

 

마치 많은 강들이 바다에서 하나가 되듯이,

 

모든 절름발이 진리는 하나의 진리에 흡수됩니다.

 

햇빛이 모든 어두운 구석을 비추듯이!

 

 

5송

 

바다로부터 물을 빨아들인 구름이 비가 되어 땅에 내리면,

 

늘어남도 없고 줄어듦도 없듯이,

 

실재(實在)는 푸른 하늘처럼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습니다.

 

 

6송

 

깨달음의 완전함으로 가득차 있는

 

무위(無爲)가 유일한 본성(本性)입니다.

 

존재들은 무위 속에서 태어나고 무위 속으로 사라지지만

 

무위에는 존재도 없고 비존재도 없습니다.

 

 

7송

 

축복을 저버린 어리석은 자는 밖으로 떠돌며 세속적인 쾌락을 바랍니다.

 

그대의 입은 지금 달콤한 꿀로 가득차 있으니

 

삼킬 수 있을 때 얼른 삼키십시오!

 

 

8송

 

어리석은 자들은 고통을 회피하려고 애쓰지만

 

지혜로운 자들은 고통스런 자의 역할을 연기해냅니다.

 

다른 사람들이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갈망할 때

 

당신은 천국의 감로수를 들이키십시오!

 

 

9송

 

파리가 전단나무의 향기를 싫어하고 쓰레기를 먹듯이,

 

열반에 관심 없는 사람은 자신의 혼란만 가중시킵니다.

 

천박한 속세를 목말라 하면서.

 

 

10송

 

소발자국을 가득 채운 빗물이 해가 뜨면 증발해 버리듯이,

 

완전한 마음의 불완전한 요소들은 완전함 속에서 모두 사라집니다.

 

 

11송

 

짠 바닷물이 증발해 구름이 되면 짠 맛이 사라지듯이,

 

격렬히 반응하는 마음의 독약이

 

사심 없고 굳센 마음 속에서 불사약(不死藥)이 됩니다.

 

 

12송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고통이 없고,

 

명상(冥想) 아닌 것이 참된 즐거움을 줍니다.

 

우리는 천둥 소리를 두려워하지만,

 

구름에서 내린 비가 곡식을 영글게 합니다.

 

 

13송

 

처음과 끝의 본성(本性)은 지금 여기입니다.

 

그리고 처음은 끝 없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생각할 줄 아는 바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면서,

 

자비(慈悲)와 공(空)을 분리시킵니다.

 

 

14송

 

벌들은 태어날 때부터 꽃 속에 꿀이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가 어떻게 알게습니까?

 

윤회(輪廻)와 열반(涅槃)이 하나라는 것을.

 

 

15송

 

거울 속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면서

 

어리석은 자는 낯선 모습이라고 여깁니다.

 

진실을 잊고 있는 마음은 바깥의 헛된 망상을 섬깁니다.

 

 

16송

 

꽃의 향기는 붙잡을 수 없지만, 공기 속에 실재로 퍼져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만다라(曼陀羅)의 원상(圓相)을 알 수는 없지만,

 

지금 여기에 모습 없이 분명 있습니다.

 

 

17송

 

고요한 물에 차가운 바람이 불면 딱딱한 톱니 모양으로 얼음이 얼어 버립니다.

 

다정다감한 마음을 거슬리는 생각이 뒤흔들면

 

모양 없는 마음은 딱딱하게 굳어서 바뀌기 힘들게 됩니다.

 

 

18송

 

본래 깨끗한 마음은 윤회와 열반이라는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늪에 빠진 보석과 마찬가지로

 

비록 그 광채를 가지고는 있지만 빛나지는 않습니다.

 

 

19송

 

정신적으로 게으를수록 순수한 깨달음은 줄어들고,

 

정신적으로 게으를수록 고통도 역시 증가합니다.

 

새싹은 씨앗에서 나오고 잎은 가지에서 자랍니다.

 

 

20송

 

마음 속에서 다양성(제법(諸法))으로부터 동일성(진여(眞如))을

 

분리해내면빛은 차차로 어두워지고 우리는 더 낮은 경지에서 헤매게 됩니다.

 

눈을 뻔히 뜨고서 불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21송

 

이성(異性)을 포옹하는 즐거움에 얽매인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이 궁극적 진리를 알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의 집 앞에 서서 시시득거리며

 

섹스에 관하여 지껄이는 사람과 같습니다.

 

 

22송

 

텅빈 공(空)의 집 안에 바람이 일어나

 

감정적 쾌락의 망상(妄相)을 자극하면,

 

그 자극에 쏘인 고행하는 요가 수행자는

 

거룩한 공간으로부터 떨어져 나약해져 버립니다.

 

 

23송

 

쌀과 버터를 가지고 불꽃 속에 제물로 바치는 브라흐만의 제사장(祭司長)처럼,

 

성스런 진여(眞如)를 보이는 모습으로 그려내는 사람은

 

꿈이 궁극적 실재라고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24송

 

정수리에 있는 브라흐마의 집에 불을 밝히고

 

제멋대로의 즐거움 속에서 회음부를 어루만지며,

 

쾌락에 구속되는 것을 정신적 해탈이라고 착각하여 믿으면서

 

하망한 바보는 자신을 요가 수행자라고 부릅니다.

 

 

25송

 

선행(善行)은 본질적 깨달음과는 관계 없다고 가르치면서

 

그는 자물쇠를 열쇠라고 잘못 알고 있습니다.

 

보물의 참된 본성(本性)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는 푸른 유리를 에머랄드라고 부릅니다.

 

 

26송

 

그의 마음은 놋쇠를 금이라고 착각하며

 

덧없는 한 순간의 경험을 성취된 실재라고 착각합니다.

 

덧없는 꿈의 즐거움에 집착하면서

 

그는 잠시 왔다가는 자신의 삶을 영원한 축복이라고 부릅니다.

 

 

27송

 

상징인 에밤(=여시(如是))을 이론적으로 이해하여 이 순간을 나누어

 

사성제(四聖諦)를 만들고, 그의 덧없는 한 순간의 경험을 무위(無爲)의

 

본성(本性)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영상(影像)을 거울이라고 잘못 알고서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28송

 

정신이 혼미한 사슴이 물의 신기루로 뛰어 들어가듯이

 

미혹한 바보들도 무명(無明) 속에서 바깥의 모습에 집착합니다.

 

그리고 풀리지 않는 자신의 갈증에 얽매여서

 

그들은 자신의 감옥을 미화(美化)하여 행복인 채 합니다.

 

 

29송

 

상대적으로 진실한 것은 분별심(分別心)을 들락거리지만

 

절대적으로 진실한 마음은 활동할 때든 고요할 때든 분별심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높은 것 가운데 가장 높고 완전한 지도(至道)입니다.

 

친구여, 이 높고 신성한 진리를 깨달으십시오!

 

 

30송

 

분별에서 풀려난 삼매(三昧)에 젖어든 마음 속에서

 

열정(熱情)은 티 없이 깨끗합니다.

 

연못 바닦의 진흙에 뿌리내린 연꽃처럼

 

이 숭고한 실재(實在)는 경계에 오염되지 않습니다.

 

 

31송

 

당신이 보는 모든 모습들이 꿈 속의 모습들임을 명심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문득 깨닫고 해탈하여 평안할 것입니다.

 

강한 마음이 무명(無明)의 마구니를 묶어 놓으면,

 

생각 너머에서 당신은 자성(自性)을 만날 것입니다.

 

 

32송

 

겉으로 드러난 모습들은 자신의 근원을 떠난 적이 없고,

 

모습 없는 모습은 분별되는 자성(自性)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변함 없고 오염 없고 분별 없는 명상(冥想)의 마음이고,

 

한 개의 유일무이한 명상(冥想)입니다.

 

 

33송

 

그러므로‘나’는 분별하는 마음이고 마음의 여러 모습들입니다.

 

‘나’는 곧 ‘세계’이니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서로 다르게 나타납니다.

 

‘나’는 곧 무한히 다양한 보는 자요 보이는 사물입니다.

 

‘나’는 곧 욕망(=탐(貪))이고 분노(=진(瞋))이고 어리석음(=치(癡))이고...

 

그리고 ‘나’는 곧 깨달음의 마음(=보리심(菩提心))입니다.

 

 

34송

 

지금 무명(無明)의 어둠 속에 하나의 등불이 켜져 있어,

 

분별로 말미암아 찟어진 상처를 치유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의 모든 오염들이 지워집니다.

 

누가 해탈인 본성을 정의(定義)할 수 있겠습니까?

 

 

35송

 

그것은 부정할 수도 없고 긍정할 수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에 얽매여 있지만,

 

생각에서 자유로우면 완전한 본성(本性)이 있습니다.

 

 

36송

 

다양성과 단일성이라는 개념들을 통해서는 원융(圓融)함에 이르지

 

못합니다. 오직 깨달음을 통해서만 사람은 해탈에 도달합니다.

 

의식의 근원을 알아차리는 것은 강력한 명상입니다.

 

고요하고 흔들림 없는 마음에 머물러 계십시오.

 

 

37송

 

즐겁고 가슴 벅찬 땅에 도달하면

 

안목(眼目)이 넓어집니다.

 

그리고 기쁨과 웃음이 있고,

 

경계를 뒤쫓을 때조차도 아무런 분리(分離)가 없습니다.

 

 

38송

 

기쁨으로부터 순수한 쾌락의 싹이 트고

 

지복(至福)의 꽃이 활짝 핍니다.

 

그리고 밖으로 끄달려 나가지 않는 동안은

 

말할 수 없는 축복이 확실히 성숙해갈 것입니다.

 

 

39송

 

무엇인지 어디인지 누구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애정과 집착이든 무욕(無慾)이든

 

이 모든 일의 모습은 전부 공(空)입니다.

 

 

40송

 

돼지처럼 우리는 이 탐욕적인 진흙탕 속에서 딩굴고 있지만,

 

그러나 무엇이 우리의 순수한 마음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그 무엇도 결코 이 마음을 오염시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무엇에 의해서도 우리는 결코 묶일 수 없습니다.

 

 

 

 

-----------------사라하의 노래-라즈니쉬 강의록에서 발췌--

 

 

 

사라하(Rahul-Bhadra)는 불교 탄트라를 최초로 창립 하였으며 대승불교의 창시자입니다.PEOPLE DOHAS(180송), QWEEN DOHAS(80송)에 이어 KING DOHAS(40송)이알려졌지요.

 

우리불교 삼귀의처럼 "최상의뜻 이루는 마음으로 내가 일체중생을 여의주보다 더 늘 소중하게 여기소서"를 생활하고 실천토록 노력한다고 합니다.

 

불멸후 346년 인도 남부 마하슈트라지방의 바다르부하에서 출생하였으며 나가르쥬나

 

(용수)의 스승이며 베다의최고 통달자입니다.

 

사라하송은 초기불교 아함경보다 300년정도 앞선 비교적 붓다의 사상에 근접한 현대에 최근 알려진 불교 최고의 고전이라 보시고 한송 한송의 의미를 보시면 공부에 많은

 

도움이될것입니다.

 

훌륭한 왕의 스승인 사라하는 왕의권유를 뿌리치고 낙향하여 수행하는데 왕은 스승을 모셔오라고 대신 여러명을 보냈으나 사라하의 180송을 듣고 귀의해버렸지요 대신을 잃은 왕은 당신이가서 모셔오라고 왕비를 보내었는데 사라하의 80송을듣고 왕비보다 제자가 되겠노라고 또 귀의해버리니 마지막 왕이 친히 찿아보게 되었지요. 이때 사라하는 지금올려드린 40송을 말하고 이를 들은 왕까지도 그대로 귀의하는바람에 잠시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는 말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무슨말씀이기에 왕과 왕비의 자리도 버렸을까? 불법의 위대함을 각자 음미해보시기 바랍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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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자체가 짐이다


 한 개그맨이 TV에서 ‘인생의 짐을 함부로 내려놓지 마라’는
강연을 해 큰 반향을 일으킨 적이 있다
대학생들 앞에서 그는 지리산 등반 때 일화를 소개하면서
“지고 가는 배낭이 너무 무거워 벗어버리고 싶었지만 참고
정상까지 올라가 배낭을 열어보니 먹을 것이 가득했다”며
“인생도 이와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요즘들어 그의 말이 자꾸 생각난다.

세상 살기가 팍팍해지면서 많은 사람이 인생의 짐을 지고
헉헉거리는 것 같아서다.
특히 대지진과 쓰나미, 원전 방사능 공포로 이어진 일본의
대재앙 소식을 접하면서 부쩍 더해진 것 같다

짐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저마다 힘든 짐을
감당하다가 저 세상으로 간다.

 


생각해 보면 어느 한때 시리고 아픈 가슴 없이
살아본 적이 있었나 싶다.
기쁨과 즐거움의 햇살이 비치는가 하면 어느 한쪽
슬픔과 아픔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인생 자체가 짐이다.
가난도 짐이고, 부유도 짐이다.
질병도 짐이고, 건강도 짐이다.
책임도 짐이고, 권세도 짐이다.
헤어짐도 짐이고, 만남도 짐이다.
미움도 짐이고, 사랑도 짐이다.

 

살면서 부닥치는 일 중에서 짐 아닌 게 없다.
이럴 바엔 기꺼이 짐을 짊어지자.
다리가 휘청거리고 숨이 가쁠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짐이라면 지는 게 현명하다.

언젠가 짐을 풀 때가 되면 짐의 무게만큼 보람과
행복을 얻게 될지 아는가.

아프리카의 어느 원주민은 강을 건널 때
큰 돌덩이를 진다고 한다.
급류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란다.

 

 

무거운 짐이 자신을 살린다는 것을 깨우친 것이다.
헛바퀴가 도는 차에는 일부러 짐을 싣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짐이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정호승 시인의 ‘내 등의 짐’이라는 시는 감동적이다.
시인은 자신의 등에 있는 짐 때문에 세상을 바르게 살았고,
사랑과 용서와 겸손을 알게 됐다고 했다.

그 짐이 자신에게 선물이고 스승이고 조련사였다고 했다.
이 정도면 짐을 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래도 짐은 무겁다. 가벼우면 짐이 아니다.

 

그래서 짐은 지는 것이다.
손쉽게 들거나 주머니에 넣을 수 있다면 그건 짐이 아니다.
짐을 한번 져 보자.
자연스럽게 걸음걸이가 조심스러워진다.

절로 고개가 수그러지고, 허리가 굽어진다.
자꾸 시선이 아래로 향항다.
짐을 지고서는 기고만장 날뛸 수 없다.

그래서 짐을
지는 것(負-짐을 지는 것)은
지는 것(敗-승부에 져주는 것)이고,
지는 것(沒-아래로 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좋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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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lion Allyh Roz/Alla Pugache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