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9. 18. 13:23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진리아닌 것이 득세하는 시대에, 영속론과 단멸론을 논파한 연기법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사상은 무엇일까.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중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연기법’을 들 수 있다. 그런 연기법을 우리나라 불자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나라 불자들은
우리나라 불자들은 연기법을 알기 전에 연기법을 부정하는 것 부터 먼저 배운다. 가장 쉬운 예로 ‘반야심경’을 들 수 있다. 반야심경에서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하고 외우기 때문이다.
또 어떤 선사들은 연기법을 ‘연기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마(Dhamma)’라 하는데, 이를 한역 하면 ‘법(法)’이라 부른다. 그런데 법을 법으로 부르지 않고 ‘설(說)’로 불러서 ‘연기설’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이자 가장 핵심인 연기법을 “공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없는 것과 같다”고 배우고, 또 단지 설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말하기도 한다.
심오한 가르침
연기법은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다. 또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서 부처님은 “아난다여, 이 연기는 심오하고, 또한 심오하게 드러난다(S.ii.92)”라고 하였다.
연기법은 한자어 ‘연(緣)’과 ‘기(起)’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풀이하면 “조건하여 일어난다”라는 뜻이다. 한자어 ‘연(緣)’을 ‘조건’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빠알리어 ‘빠띳짜(paticca, 緣, 조건하여)’를 조건으로 번역한 것이다.
그래서 연기를 빠알리어로 ‘빠띳짜사뭅빠다(paticca-samuppada)’라 한다. 그런데 뒤의 ‘기’를 빠알리어로 사뭅빠다(samuppada, 起, 함께 일어남)라 하는데, 이는 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일어남’을 말한다. 이는 원인이 없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조건을 가지고 함께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12연기도표
연기의 단어분석을 보면
연기법은 철저하게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고 보는 ‘상견’과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단견’을 배격한다. 그런 구체적인 설명을 5세기에 붓다고사 비구는 청정도론에서 ‘연’과 ‘기’로 이루어지는 단어를 분석하여 설명하였다.
앞의 단어(즉, 緣)로 영원함(常見)등이 없음을 뒤의 단어(즉, 起)로 단멸(斷見)등의 논파를 두 단어를 합쳐서 바른 방법(ṅāya)을 밝혔다.
(청정도론, 제17장 통찰지의 토양 21절)
붓다고사 비구는 연기의 연자 즉 빠알리어 ‘빠띳짜(緣)’로 상견이 없음을 설명하였다. 빠알리어 빠띳짜는 ‘조건의 화합’을 뜻하기 때문에, 영원하다거나, 원인없이 생긴다거나, 신이나 창조주 등이 거짓원인으로 부터 생긴다거나, 지배자의 의해서 존재한다는 학설 등으로 분류되는 ‘영원함(常見)’ 등이 없음으로 보여 주었다. 그렇다면 상견이란 무엇일까.
상견(常見, 사싸따딧띠. sassata-diṭṭhi)이란
마하시 사야도의 12연기 법문집의 주석서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상견(常見, 사싸따딧띠. sassata-diṭṭhi)
‘상견(常見)’으로 번역한 사싸따딧띠(sassata-diṭṭhi)는 sassata(영원, 항상함)+diṭṭhi(견해)의 합성어이다. 영혼이나 자아는 절대 죽거나 분해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한다고 믿는 삿된 견해이다.
즉 거친 육신이 소멸되어도 살아있는 실체인 영혼은 소멸되지 않고 다른 새로운 몸속으로 들어가서 계속해서 존재하며, 설령 세계가 무너지고 파괴될지언정 영혼은 영원히 존속하고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교외의 다른 종교는 대부분 이러한 상견을 취하고 있다. 요컨대, 영혼이나 자아가 죽은 뒤에도 소멸하지 않고 다시 새로운 존재로 옮겨간다고 보는 믿음들은 모두 상견이다. 그리고 이 상견과 결부된 갈애를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bhava-taṇhā)라고 한다.
(마하시사야도의 12연기 법문집, 김한상(수마나)님역)
불교를 제외한 지구상의 대부분의 종교가 상견에 빠져 있다. 사람이 죽어도 자아는 죽지 않고 영원히 지속된다는 삿된 견해를 말한다. 이런 사견은 어떻게 생겼을까.
자아와 세상은 영속한다고
브라흐마잘라경(범망경, D1)에 따르면 브라만들이 충분한 집중을 개발한 후에 수백 수천의 과거의 생을 보게 되었고, 그들은 이에 근거하여 항상한다는 견해를 말하게 되었다고 부처님은 말씀 하셨다. 영속론자들의 견해 4가지는 다음과 같다.
영속론자들-삼매를 얻어,수십만 생을 기억해내기 때문에(1) 영속론자들-삼매를 얻어,다섯 겁 생을 기억해내기 때문에(2) 영속론자들-삼매를 얻어,마흔 겁 생을 기억해내기 때문에(3) 영속론자들-스스로 규명했기 때문에(4)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 범망경, D1, 영속론자의 견해 4가지)
상견에 빠진 자들은 “자아와 세상은 영속하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저 앞에 있는 산봉우리가 마치 바위처럼 견고해 보여서 영원히 변치 않을 것 같이 보여서일 것이다.
하지만 한 번 형성된 것은 모두 사라지고 마는 제행무상의 법칙으로 인하여 언젠가 저 바위산봉우리 역시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 할 수 있다.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다. 이 이익되지 않음이 마치 산봉우리처럼, 바위처럼 확고하게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존재들은 돌고 돌다 죽고는 다시 태어난다. 이 사실만이 영원하다.”라고.
죽으면 끝난다?
다음으로 연기의 ‘기(起)’자 즉 ‘사뭅빠다(samuppada, 起, 함께 일어남)’는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단멸론’을 논파하는데 사용된다. 붓다고사의 설명에 따르면 이 단어는 법들이 일어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 조건이 화합하여 법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단멸한다거나, 허무하다거나, 도덕적 행위의 과보가 없다고 주장하는 ‘외도의 견해’를 논파하는데 사용되었다.
연기법은 이전의 조건에 따라 법이 연달아 함께 일어나는 것을 말하는데, 끊어진다든지, 텅비었다든지, 행위에 대한 과보가 없다든지 하는 견해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연기에서 빠띳짜(緣)가 주로 창조론 등으로 대표되는 상견을 논파하는데 사용된다면, 사뭅빠다(起)는 육사외도의 단견을 논파하는데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단견이란 어떤 것일까.
단견(斷見, 우쩨다딧티, uccheda-diṭṭhi)이란
마하시 사야도의 12연기 법문집의 주석서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단견(斷見, 우쩨다딧티, uccheda-diṭṭhi)
‘단견(斷見)’으로 번역한 우쩨다딧티(uccheda-diṭṭhi)는 uccheda(끊어짐, 멸절)+diṭṭhi(견해)의 합성어이다. 사람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으로 다시 태어나는 법이 없으며, 선악이라든가 과보는 없다고 주장하는 일종의 도덕적 허무론이다.
이러한 단견은 12연기의 인과관계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이 단견은 쾌락주의와 유물론적 인생관의 기초가 되고, 사람들로 하여금 악행을 짓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이 단견과 결부된 갈애를 비존재에 대한 갈애(無有愛, vibhava-taṇhā)라고 한다.
(마하시사야도의 12연기 법문집, 김한상님역)
단견의 특징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아도 과보가 없다고 본다.
도덕 부정론, 숙명론, 유물론
이와 같이 죽으면 끝나는 것으로 보고 또한 다시 태어남도 없고, 선악에 대한 과보도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을 단멸론이라 하는데, 육사외도 중에 뿌라나 까사빠(Pūrana Kassapa)와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āla)와 아지따 케사캄발린(Ajita Kesakambalin)의 사상이 대표적인 단멸론에 해당한다. 이들 외도의 사상을 보면 다음과 같다.
푸라나 까싸빠(Pūrana Kassapa) - 도덕 부정론
노예의 아들로 태어난 푸라나는 원인과 업보를 부정하는 주장을 폈다. 악한 일을 하거나 선행을 하거나간에 둘 다 선악의 과보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자유로웠던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āla) – 숙명론
아지비까(Ājīvika)교파의 개조인 막칼리는 삶의 모든 것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결정된 숙명에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체 생명체의 윤회나 해탈도 원인이 없으며, 다만 자연의 상황과 결정에 따른다고 하였다. 부처님 당시에 상당한 세력을 가졌으며 후대의 아소까(Asoka)왕 비문에도 독립종교로 기록되었으나, 후에 자이나교에 흡수되었다. 아지비카(Ājīvika)란 생계수단을 뜻하는 ājiva(命)에서 파생된 단어로 그들은 바르지 못한 생계수단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이해했기 때문에 중국에서 사명외도(邪命外道)로 옮겼다. 이들은 나체수행자들이었다고 한다.
아지따 케사캄발린(Ajita Kesakambalin) – 유물론
아지따는 모든 것이 지·수·화·풍의 4요소와 활동하는 공간인 허공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오직 현세만이 있을 뿐이며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도 없으며, 생명체가 죽으면 신체구성의 4요소가 자연계로 환원한다고 보았다. 존재론적으로는 유물론이고, 인식론적으로는 감각론이며, 실천적으로는 쾌락주의인 아지따의 사상은 푸라나의 도덕부정론에 대한 철학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유물론의 전통은 그 후에도 인도에 존재했는데, 이것을 로까야따(Lokāyata)라 하며 불전에서 순세외도(順世外道)라고 하였다. 또한 후세에는 쨔르바카(Cārvāka)라고도 한다.
(마하시사야도의 12연기 법문집, 김한상님역)
육사외도는 BC 5~3세기 인도 우파니샤드 철학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사상 가운데 세력이 컸던 여섯 유파를 말한다. 이들은 힌두교의 기본 성전인 베다와 우파니샤드에 배치되는 점이 많았고, 당시 전통의 문화에 대한 일종의 반문화 운동을 전개했었던 새로운 사상가들이었다.
일곱가지 단멸론자들의 견해
이와 같인 외도 중에 위에 언급된 세 명의 지도자들이 주장한 것은 크게 보아서 단멸론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들의 사상을 삿된 견해로 간주하였는데, 브라흐마잘라경(범망경, D1)에서 단멸론자들의 견해에 대하여 7가지로 정리하였다. 그 7가지란 무엇일까. 브라흐마 잘라경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사후)단멸론자들인데 7가지 경우로 중생의 단멸과 파멸과 없어짐을 천명한다
(브라흐마잘라경, 범망경, D1)
사후단멸론자-물질의 이 몸이 무너지면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51) 사후단멸론자-욕계 천상의 몸이 무너지면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52) 사후단멸론자-색계 천상의 몸이 무너지면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53) 사후단멸론자-무색계 천상의 몸이 무너지면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53) 사후단멸론자-식무변처의 몸이 무너지면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55) 사후단멸론자-무소유처의 몸이 무너지면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56) 사후단멸론자-비상비비상처의 몸이 무너지면 자아는 존재치않는다(57)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 D1, 단멸론자의 견해 7가지)
단멸론자들의 일곱가지 견해는 물질로 이루어진 이 몸이 무너지면 자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런 견해는 62가지 견해중 51번째에 해당된다. 52번째는 욕계, 53번째는 색계등으로 되어 모두 일곱가지 삿된 견해가 생겨나게 된다.
연기법의 논파대상
부처님당시에 부처님은 브라만교의 상견과 육사외도의 단견을 삿된 견해로 간주하고 연기법으로 ‘논파’하였다. 이를 연기법의 단어로 설명하는데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연기(緣起, 빠띳짜사뭅빠다, paticca-samuppada)의 논파대상
연기는 조건하여 함께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조건없이 스스로 일어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또 원인 없이 일어나는 것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 법들은 조건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에 조건이 생겨나지 않는 한 단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먼저 상견이 거짓인 경우는 다음과 같다.
영속론을 ‘빠띳짜(paticca, 緣, 조건하여)’로 논파함
사람이 태어날 때 부모로부터 태어나듯이 처녀가 애를 배어도 다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원인에 원인을 추적하다 보면 모두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창조주는 원인이 없다. 원인이 있다면 ‘그 분’이 유일한 원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조건화합에 따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연기법에 어긋난다. 따라서 창조론은 진리로서 인정되지 않는 것이다. 다만 사람의 마음이 만들어낸 개념으로 보는 것이다.
미술가가 귀신(또는 신)그림을 그려 놓고 그 귀신 그림에 현혹되어 사로 잡히게 되었을 때, 그 귀신은 화가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또 그 귀신은 개념이기 때문에 결코 늙고 병들고 죽는 일도 없다. 마음이 있는 곳에 항상있는 것이다. 그런 귀신을 자식에게 물려줄 수도 있다. 자식은 또 자신의 자식에게 물려 주어서 수백년 수천년 그 귀신을 흠모하며 예배하며 살아 갈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부처님은 브라만을 믿는 브라흐민들에게 “창조신을 본적이 있는가?”하고 물어 본다. 그러자 누구하나 창조신을 본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 것도 7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창조신을 본적이 있느냐고 물어보자 역시 본적이 없다고 말한다.
어느 누구도 창조신을 본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창조신과 합일하는 범아일여를 주장하지만 이는 고대 브라흐민들이 전승한 내용을 그대로 암송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터무니 없다’고 부처님은 말씀 하신다.
따라서 창조주가 조건이 되고 원인이 되는 것은 연기법에 어긋나므로 거짓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빠띳짜(paticca, 緣, 조건하여)로 ‘영속론’를 논파한 것이다.
단멸론을 ‘사뭅빠다(起, 함께 일어남)’로 논파함
모든 법은 조건에 따라 일어나게 되어 있다. 조건이 화합할 때 법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대상(根)과 감각기관(境)과 알음알이(識)가 서로 조우할 때 감각접촉에 조건지워진 조건발생의 산물로 보는 것이다. 이를 한자용어로 ‘삼사화합’이라 한다.
삼사화합이 일어나면 법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감각접촉에서 부터 시작하여, 느낌, 갈애, 집착으로 이어지면서 존재로서의 업(業有)이 생겨 나게 된다. 그 결과 태어남이 있고, 늙음과 죽음과 비애, 탄식, 고통, 비탄, 고뇌, 절망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조건에 따라 법이 일어나면 그 법 역시 다음 법의 조건으로 되어 끊임없이 연기가 회전 되는데, 이를 십이연기로 설명한다. 그런데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고 다음생은 없다”라는 삿된 견해를 가지면 어떻게 될까.
진짜 그렇게 된다면 다행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절반의 성공에 그칠지 모른다. 업이 남아 있는 한, 그 업의 힘으로 다음생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어서 새로운 생이 시작 되기 때문에 “죽으면 끝이다”라고 생각하는 단멸론을 삿된 견해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하여 법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단멸한다거나, 허무하다거나, 도덕적행위에 대한 과보가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 된다. 따라서 ‘사뭅빠다(samuppada, 起, 함께 일어남)’로‘단멸론’을 논파한 것이다.
연기법과 맛지마 빠띠빠다(majjima patipada,中道)
빠띳짜(緣)는 ‘법의 조건’을 말하고, 사뭅빠다(起)는 ‘법이 일어남’을 말한다. 이 두 단어를 합하면 빠띳짜사뭅빠다(연기)가 되는데, 이것을 청정도론에서는 ‘맛지마 빠띠빠다(majjima patipada,中道)’라 하였다.
중도는 담마짝까경(초전법륜경)에서 저열한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거나 자신을 학대하는 극단에 따르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그런 중도는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이라 하였는데, 이런 중도는 다름아닌 ‘사성제’를 말한다.
불교에서 진리는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사성제를 말한다. 그런 진리는 해탈과 열반으로 인도한다고 하여 ‘네 가지 성스런진리(四聖諦, cattari-ariya-saccani)’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성제는 중도라 하였다. 따라서 중도는 연기법이고, 연기법은 진리가 된다. 그렇다면 연기법으로 논파되는 상견과 단견은 무엇이라 불러여 하는가. 당연히 진리가 아니다. ‘삿된 견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21세기 아쇼카 선언’의 열린진리관을 보면
자아가 있다든가 세상은 영원하다든가 창조주가 있다든가 하는 영속론적 견해는 논파되어야 할 삿된견해로 보는 것이다. 또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믿으며 부도덕한 행위도 서슴치 않는 단멸론적 견해 역시 삿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한국불교에서는 소위 ‘21세기 아쇼카 선언’이라는 종교평화선언을 발표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불교는 ‘나만의 진리’를 고집하지 않으며 불교에만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이웃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21세기 아쇼카 선언,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초안 축약본), 2011-08-23, 조계종 화쟁위원회)
마치 1960년대 카톨릭에서 발표한 포괄주의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이러한 선언은 명분은 좋다. 누구하나 대놓고 반대할 수 없는 종교평화에 대한 열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선언은 진리를 양보와 타협의 산물로 보는 ‘훼불행위’와 다름없다. 부처님은 진리가 아닌 삿된 견해를 연기법으로 부수었는데, 영속론이나 단멸론등의 삿된견해에 대하여 진리라고 인정하기를 강요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조계종화쟁위원회가 발표한 열린진리관에 따르면 창조론과 같은 상견 뿐만 아니라, 부처님당시 육사외도로 대표되는 푸라나 까싸빠의 도덕 부정론, 막칼리 고살라의 숙명론, 아지따 케사캄발린의 유물론 또한 진리로서 인정해 주어야 한다.
‘육사외도’도 인정해야 하나
하지만 부처님은 진리가 아닌 삿된 견해를 연기법으로 논파하고 부수어 버렸다. 그렇게 한 이유는 삿된견해들이 결코 해탈과 열반에 도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견과 단견으로 대표되는 사견은 자아를 기반으로 하고 있고, 사견에 집착할 수록 자아 역시 더욱 더 강화 되어 고통에서 영원히 빠져 나올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견에 대하여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bhava-taṇhā)’가 있다고 보았고, 단견에 대하여 ‘비존재에 대한 갈애(無有愛, vibhava-taṇhā)’가 있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갈애를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해탈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으로 보았는데, 그런 열반은 반드시 ‘무아’이어야 성취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 무아를 단지 “내가 없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스스로 ‘무식을 폭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때 무아는 실존하는 “내가 없다”라는 것이 아니라 ‘조건지워져 발생되는 나’ 즉, 연기적으로 형성된 나를 무아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조건이 형성되지 않으면 더 이상 일어남이 없을 것이다. 그것을 ‘열반’으로 본다. 그런 열반은 죽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 생에서 ‘지금여기(here and now, 디따담마, diṭṭha-dhamma, 現法)’에서 실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부처님은 말씀 하셨다.
여래장사상에 기반한 ‘연기(緣起)’를 보면
불교에서 열반을 논하지 않으면 불교라고 볼 수 없다. 하지만 한국불교에서는 깨달음이나 해탈이라는 말은 많이 사용하지만 열반이라는 용어는 그다지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 이는 한국불교의 사상이 ‘여래장’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여, 불성, 본마음, 참나 등으로 불리우는 궁극적 실재와 합일하기 위해서는 고정된 자아가 있어야 한다. 마치 힌두교의 아트만과 같이 변치 않는 ‘개아(個我)’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이 부처님의 설한 연기법과 다른 점이다.
그래서일까 연기에 관한 믿음도 다르다. 조계종 화쟁위원회에서 발표한 아쇼카선언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연기적 세계란 모든 존재가 서로 연관돼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과 ‘저것’ ‘나’와 ‘남’은 서로 별개의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연관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21세기 아쇼카 선언,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초안 축약본), 2011-08-23, 조계종 화쟁위원회)
아쇼카선언에서 말하는 연기관에 따르면 모든 존재가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이것과 저것을 나눈다거나 내편과 네편을 가르는 것에 대하여 경계하고 있고, 둘이 아니라 하나로 보는 ‘불이론’를 주장하고 있다.
이런 연기관과 열린진리관에 따르면 단지 언어와 문자가 달라서 표현방법이 다를 뿐, 길은 여럿이지만 결국 정상에서 모두 만나는 것처럼 결국 진리는 하나라는 이야기이다.
화쟁위의 발표대로라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부정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타종교의 진리를 인정하지 않은 것처럼 되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연기법으로 창조론으로 대표되는 브라만교를 상견으로 간주하여 논파한 것도 이웃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만이 진리라고 고집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더구나 부처님은 45년동안 브라만교와 육사외도들의 견해를 논파하고 부수어서 불교라는 종교를 성립시켰는데, 이런 행위는 화쟁위의 아쇼카선언에 따르면 있을 수 없는 이야기로 되어 버린다.
진리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시대
화쟁위의 열린진리관과 전법의 원칙에 따르면 한국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타종교의 교리를 논파하는 것도 어긋나는 것이 되고, 더구나 타종교인이 삿된 견해에 빠져 고통받고 있는 것도 그냥 보고 넘어가야 한다. 진리를 진리라고 말하지 못하고, 진리아닌 것을 진리 아닌 것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부처님이 열반에 들자 부처님의 제자들은 매우 비통해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이리 저리 뒹글며 슬퍼하하였고, 또 어떤 이는 “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다. 그런데 어떻게 무상한 것을 영워하기를 바라겠는가”라고 하며 슬픔을 안으로 새기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나이가 많이 들어 출가한 ‘수밧다’라는 비구는 “그만하면 됐습니다. 그만들 슬퍼하시오. 우리는 위대한 사문으로부터 벗어났고. 스승께서 이것은 그대들에게 적합하고 이것은 그대들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우리를 억압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나 해도 되고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를 본 마하 깟사빠 존자는 위기를 느꼈다고 한다. 부처님이 열반한지 불과 10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부터 비법이 일어나고 부처님을 부정하는 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존자들이여, 담마가 힘을 잃고 담마 아닌 것이 득세하기 전에, 계율이 힘을 잃고 계율 아닌 것이 득세하기 전에, 담마를 말하는 사람은 약해지고 담마 아닌 것을 말하는 사람은 강해지기 전에, 계율을 말하는 사람은 약해지고 계율이 아닌 것을 말하는 사람은 강해지기 전에 담마를 함께 외웁시다. 계율을 함께 외웁시다.
(율장 쭐라왁가 11편,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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