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부우는 사람이 참불자/고우스님

2011. 11. 11. 12:4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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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비우는 사람이 참불자/고우스님

 

 

지난 99년부터 안거기간에 하루 15시간씩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해온 태백산 각화사가 ‘1년 가행정진’이라는 새로운 가풍을 선언했다.

하루 4시간만 자면서 15시간이상씩 무섭게 정진하는 가행정진 수행처로 이름높은 각화사가 이번 삼동결제부터는 아예 1년내내 가행정진을 하겠다는 것.

1년 가행정진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각화사의 새 가풍수립 결정 중심에는 ‘가일층 공부를 하여 앞으로 10년만 계속한다면 이러한 일이 저변확대가 되어 한국불교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는 선원장 고우(古愚)스님의 원력이 자리하고 있다.

동안거는 아직 두달여가 남았지만 방부들인 수좌가 이미 30명이 넘었다고 귀띔하는 고우스님은

“서로서로 배우고 탁마하고 공심을 기준으로 판단하도록 노력하면서 정(定)을 익혀가는 선방으로서의 특색을 살리고 싶다”고 말한다.

 

도올 김용옥씨가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책에서 참선하는 스님들을, ‘아편쟁이들이 아편으로 도달하는 경지나 술꾼들이 술로써 도달하는 경지 등과 유사하다’고 표현했다. 또 오슬로대학의 박노자 교수는 스님들이 참선만을 중요시하고, 어려운 이들을 보살피는 사회적 봉사에는 등한시한다며 ‘하화중생없는 한국선’ 제목의 기고를 통해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불교계 밖에서 나오는 이같은 비판에 대해 대표적 선승의 한 사람으로서 어떠한 설명을 하실지 궁금했다.

 

 “봉사는 남한테 도움을 주니까 장려해야 하고 참선하면 남한테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얘기는 불교에 대해 정말로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예요. 불자 아니라도 착하게 살고 남 도와주는 이들 많아요. 그렇다면 불자는 무어냐. 자기 비우는 공부를 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비워 부처님 법에 계합시키는 것이 불교입니다.

나를 비우는 공부를 열심히 하다보면 어떤 일을 하든지, 참선을 하든지 봉사를 하든지, 그 하는 일에 대해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을 하기에 그 일이 즐겁습니다. 그러니 남을 돕는 일이나 봉사도 의무가 아니라 신이 나고 보람찬 일이지요. 착한 일을 하더라도 자기를 비우는 데까지 나아가야 불자라고 할 수 있어요.“

고우스님도 김용옥씨가, 산중에 가부좌 틀고 참선에 열중하는 스님들과 저 태릉선수촌에서 선수들이 땀을 흘리며 열중하는 것과 무어 다를 것이 있느냐고 말한 기사를 읽으셨다고 했다. 스님은 그사람이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지적하신다.

 

“불교는 자기 비우는 수행이 요점이예요. 자기를 계속 비워서 간단(間斷)없이 지속해 가는 수행을 삼매(三昧)라고 합니다. 삼매를 통하지 않고는 깨달음이 올 수가 없어요. 삼매란 ‘자기 비우는 의식이 지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당신이 깨달은 세계를 이렇게 표현했어요.

‘이 세상에 있는, 형상이 있거나 형상이 없거나, 모든 존재는 연기로써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연기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사람은 여래를 본다. 부처님이 태어나기 이전에도 모든 만물이 연기로써 존재했었고, 태어난 후에도 그렇게 존재해 있다. 여래가 멸한 후에도 그렇게 존재할 것이다. 그것을 보는 사람은 여래를 본다’ 그랬어요. 부처님이 깨달았다는 것은 연기를 깨달았다는 말이예요. 연기 원리를 몸으로 체험한 사람을 ‘도인(道人)’이라 그러지요. 스님들이 산속 도량에서 공부하는 것은 그 연기를 깨닫기 위해서 입니다.“

 

수행의 결과가 어찌 수행자 자신에게만 이득이 될 수 있으랴. 달은 하나지만 천강(千江)에 비쳐 천개의 달이 빛나듯 한사람의 수행력이 수많은 대중들에게 회향되어 정신적인 혁명을 일으키게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고우스님은 기복신앙을 멀리하고 자기비우는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강조하신다.

 

“우주만물의 존재 원리인 연기법을 알아 그 진리에 따라 생활하는 것을 도(道)라고 합니다. 그렇게 살게될 때 이기심이 없어지고 저절로 공심(公心)으로 살게 되지요. 요즘처럼 이기심과 경쟁이 만연된 사회에서 불교야 말로 수행을 통해 불국토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대안입니다. 산속에 앉아있는 것보다 저자거리에 나가 선행(善行)을 하라는 얘기는 불교를 모르고 하는 이야기지요. 보통 사람들은 선행을 노력이나 의지로 하고자 해 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나 수행을 해 연기의 이치를 체험하게 되면 선행이나 봉사라 따로 얘기할 것도 없어요. 자동으로 행위 자체가, 나도 즐겁고 남에게도 좋은, 선행이 되고 봉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요즘 참선에 대한 관심과 참여도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참선이 어렵다고들 야단이다. 오랜 기간 가부좌를 틀고 앉아도 공부진척도 없고 망상만 피어오른다는 사람도 꽤 된다. 왜 어려울까.

“절에만 오래 다니면 뭘해요. 부처님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법에 대한 가치를 모르고 있는데. 부처님은 그 법을 깨닫기 위해 태자 자리도,왕궁도 내버렸어요. 일체의 세속적인 모든 부귀영화를 버렸지요. 그만큼 이 법의 가치가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세속적 행복의 조건들을 버릴 수 있는 가치있는 것이 부처님법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먼저 전제해야 합니다. 아직 그걸 모르고 있으니 잘 안되는 거예요. 이렇게 위대한 법인데 우리가 이 법을 체득하기 위해 무엇을 던져버렸습니까?

이해를 하고 그 가치를 인정한다면 왜 공부가 안되겠어요? 그만큼 이해도 못하고 모르니까, 모른 상태에서 공부하려니까 안 되는 거예요”

 

공부 안된다는 사람들을 대해보면 실제로 그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 세속적 가치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고 한다. 말로는 부처님법을 추구하지만 실제로는 부처님이 헌신짝처럼 버렸던 부귀영화를 좇고 있다는 것이다.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니 아무리 가부좌를 틀고 앉아도 될 턱이 없다.

고우스님은, 출가한 스님들조차 세속적 행복의 조건을 추구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조계종 스님이 1만명 가량 되는데 과연 이 법을 이해하고 법의 가치를 알고 승려노릇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부처님법에 대한 이해가 투철한 사람을 몇 명 보지 못했다고 하신다. 산사에 계신 스님마저 제대로 된 수행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한국불교의 미래는? 한국불교가 도닦는 일보다는 물질주의로, 세속화로 치닫고 있는 근본 이유는?

 

“기복불교 때문입니다. 기복적인 사고를 하면서 중노릇 하는 사람이 많아요. 신도들한테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고. 기복불교가 뭔지 압니까?” 입시 합격, 건강, 재물, 승진 등등을 간절히 부처님전에 기원하는 어머니들의 모습이 떠오르는데…

“기복불교는 다른 게 아닙니다. 한마디로 좋은 것은 만나고 나쁜 것은 안 만나겠다는 게 기복불교예요. 좋은 일 만나고 나쁜 일 안 만나는 것이 불교가 맞긴 맞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좋은 일과 나쁜 일을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가 나를 욕해서 기분나쁘고, 칭찬해서 기분좋고, 손해보여서 기분나쁘고, 다친다든지 그런 나쁜 일을 가급적 피했으면 합니다. 그런데 근본적인 것을 이야기해봅시다.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나쁜 일인데 그것 안 만나나요? 만나는데 그것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빈다고 해서 안만나지냐는 거지요. 만나고 싶지않은 것을 안만나게 하고, 만나고 싶은 것을 만나게 하는 그것을, 부처님법에 의해 그것을 이해하고 자기가 해결해 가는 것이 진짜 안 만나는 거예요.

 

늙고 병들고 죽는 그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러니 그것을 법에 입각해 바로 보고 해결해 가는 방법이 진짜 안만나는 거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피하는게 아니라, 그 자체를 <금강경>을 이해하는 눈으로 바로 보고 그것을 해결해 가는 것이 진짜 안만나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기복신앙 하는 사람은 무조건 안 만나게 해 달라고 빌어. 무조건 나쁜 것은 안만나고 좋은 것만 만나게 해 달라고 하는 그 마음이 있는 한 부처님앞에 가서도 욕망만 커집니다. 욕망이 커지면 커질수록 마음은 좁아지거든. 거기에선 탐진치가 일어날 수 밖에 없어요.

세속에서 찌든 마음, 탐진치를 제거하고 뭔가 잘 살아보자고 부처님앞에 온 사람들이 도리어 탐진치 키우는 일에 집착하면서 그것을 모르고 있어요. 그런 집착심이 강한 사람이 갑자기 사고를 당한다든지 병이 든다든지 하면 부처님만 원망해. 스님 원망하고 심지어 ‘그렇게 열심히 믿었는데 이렇게 나쁜 일을 만나게 한다고’ 개종도 하고…”

 

간화선에 대한 일부의 비판이 나오면서 소위 ‘제3수행법’이라 불리는 수행에 대한 관심과 동참자들이 늘고 있다. 심지어 스님들도 많이 체험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수행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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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수행은 첫째가 정진 단계, 그 다음에 삼매 단계, 다음에 깨달음 단계, 이렇게 세 단계로 나눌 수가 있어요. 정진단계도 그렇고 삼매단계도 그렇고 깨달음 단계도 그렇고 거기에 일관되게 공통된 점이 하나 있어요. 일관된 공통점이라는 것은 수행하다 보면 우리 의식이 그렇게 공통되어 간다는 뜻이지요. 정진단계에 들면 우리 의식이, 불교가 아닌 다른 수행의 삼매에서는 거의 적적(寂寂), 고요지요. 즉 그 수행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모든 행위가 정지해요.

의식도 정지하고 생리작용도 정지해요. 깊이 들어가면 먹지도 않고 배설도 않고 생리작용도 정지합니다. 그런데 불교수행은 다릅니다. 처음에 싣달타가 출가해 웃다라라를 찾아가 배운 수행이 그랬어요. 삼매에 들면 마음이 참 편하고 좋은데 삼매에서 깨고 나면 불안하고.... 깨어있을 때나 삼매 들어 있을 때나 마음의 평화를 얻어야 진짜지 이것은 아니다 해서 독자적으로 공부해 모든 삼라만상의 존재원리를 깨달으신 것이잖아요.”

 

불교의 삼매 특징에 대한 설명을 이어가셨다.

 “적적(寂寂)과 성성(惺惺)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겁니다. 불교공부 외에는 ‘적적성성’의 경지에 들어갈 수 없어. 적적성성하면 아무리 삼매에 깊이 들어가더라도 배가 고프면 정확하게 밥먹으러 식당으로 갑니다. 또 용변보고 싶으면 정확하게 변소에 가요. 적적만 있다면 삼매에 들었을 때, 용변보러 간다는데 식당으로 갈 수가 있고, 밥먹으러 간다며 변소로 갈 수가 있어요.

삼매에 들었을 때나 깨어있을때나 양쪽 다 삼매를 성취하는 것, 이것이 불교수행의 특색입니다. 수행자가 정진단계에서도 적적성성 삼매를 이루려고 막 노력을 해요. 그러나 지속되지 않고 간단(間斷)이 생기죠. 됐다 안됐다, 됐다 안됐다 하는데 이것을 정진단계라 해요. 그러다 수행이 깊어져 삼매단계에 이르면 적적성성이 오래 지속됩니다. 그 지속되는 단계를 뛰어 넘으면 깨달음으로 가는 것이고, 적적성성 삼매가 완성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대할 때 그것을 이기심으로 대하고 처리하는데, 적적성성삼매를 100% 성취하면, 탐진치를 세탁을 해가지고, 이기심이나 욕망 하나 없는 순수무구한 의식으로 사고(思考)하고 행위하게 됩니다. 그러니 그 행위는 나에게도 남에게도 도움이 되지요. 그것을 공심(公心)이라 해요.”

 

 ‘적적성성’의 경지를 이룰수 있는 것은 불교수행뿐이지 다른 수행은 적적은 될지언정 깊이 들어갈 수 없으니 괜히 시간만 축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제3수행법’이란 것은 불교하고는 상관없는 수행이라고봐도 될 거라고 하셨다. 고우스님은 찾아오는 누구에게나 주는 책이 있다.

바로 성철스님의 <백일법문>. 두 권 한질을 한철에 100질씩 갖다놓고 스님이나 신도 누구에게나 보시하신다.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는 꼭 읽을 것을 약속받고 다음에 오면 집중적으로 물어보신다. 꼭 읽기를 바라는 스님의 마음이 느껴지는데 이렇게 하는 이유는 바로 불자라 하면서도 불교의 핵심인 연기, 중도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하다는 판단에서다.

 

“연기와 중도에 대해 체험은 못하더라도 이해만 해도 좋겠어요. 그렇게 되면 자기 하는 일에 대해서 가치와 의미를 발견해 냅니다. 그러면 생활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지요.

자기 하는 일에 대해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게 되면 그 일에 충실하게 돼요. 자기의 존재 원리 하나 알면 삼라만상 원리를 아는 것이고 같은 원리로 존재하니까 그것에 대한 이해가 굉장히 중요해요. 그것을 이해하게 되면 자기생활에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지요. 연기법만 제대로 이해해도 우리 사회가 굉장히 맑아지고 안정될 겁니다. 남 해치는 일은 일체 없을 테니까.”

 

스님은 티베트불교보다 한국불교의 수준이 엄청 높지만 달라이라마 만큼 세계인들에 감복과 신뢰감을 주지 못하는것은 실천의 유무 때문이라고 하셨다. 티베트 사람들은 자기가 아는 것을 생활화하고 실천에 옮기고 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스님은 한국불교가 언행일치가 되지 않는 것은 바로 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라고 보신다.

법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언행일치가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다. 그래서 스님은 지금처럼 출가한 지 6개월만 되어도 사미(니)계를 주는 제도를 보완해 최소 3~4년을 한 곳에서 교육받게 했으면 좋겠다고 하신다.

 

“철저하게 세속적인 가치관에서 부처님이 말하는 법의 가치관으로 바뀌어야 중노릇이 제대로 됩니다. 그게 안 바뀐 사람이 수행한다는 것은 산에 가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