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信心)이 성지(聖地)다 - 농산행 / 성철스님

2011. 11. 18. 12:4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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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信心)이 성지(聖地)다 - 농산행 / 성철스님  

 

 

일본 비예산은 천태종 본산으로 여기에 연역사라는 절이 있읍니다.

천태종이 전교 대사에 의해 개종한 지는 약 1,200년이 되었는데,

1,200년을 계속 내려오면서 12년을 단위로 농산행이라는 수행을 합니다.

 

그 당시 적국적으로 가장 영리하고 가장 신심있는 사람을 골라서

12년 동안 비예산의 정토원이라는 절에 앉혀두고 공부를 시켰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농산행이라고 합니다.

12년 만기가 되기 전에는 절대로 밖으로 나올 수가 없읍니다.

이런 공부 방법이 1,200년 동안 한번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왔읍니다.

12년이 지나면 다른 사람이 들어가서 대를 잇고 또 12년이 지나면

다른 사람이 들어가기를 100년째 계속 해온 것입니다.

들어가는 첫째 조건은 대승계를 받는 것인데 그 때의 계는 부처님에게서

직접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부처님에게서 받느냐 하면

기도를 간절히 하면 부처님께서 나타나 계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서상(瑞相)을 본다'는 것입니다. 농산을 할 때는 반드시

기도를 하여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계를 받아야 합니다.
어떤 방법으로 기도하느냐 하면 하루에 삼천배씩 절을 합니다.

 

이 때 삼천 불명경이란 것이 있어서 이것을 펴 두고 부처님 명호를

한번씩 부르면서 절을 하는데, 오체투지로 아주 정성껏 해야 하며,

절을 한번씩 하고는 가루 향을 한번씩 사루고 다시 절을 해야 합니다.

아주 천천히 하루종일 스무네 시간 동안 절만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백련암에서 삼천배 절을 시켜보면 어떤 사람은 제트기가 날아가듯

빨리 하여서 세 시간이나 네 시간만에 끝내는 사람도 있읍니다.

그러나 농산행을 할 때는 이렇게 아주 시간을 많이 들여 천천히 절을 하되

부처님께서 직접 나타나서 계를 주기 전에는 그칠 수가 없읍니다.

 

삼천배를 마치고 나서는 또 쉬는 것이 아니라, 가사 장삼도 벗지 못하며

앉고 눕지도 못하고, 변소 갈 때 이외에는 언제나 장좌(長座),

곧, 그대로 앉아 지내며 누워서 자지도 못합니다.

2년이든 3년이든 부처님이 나타나서 계를 줄 때까지는 그치지 않고

삼천배를 하면서 온 정성을 다 바쳐 기도하며 고행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몇 달만에 부처님이 나타나는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3년이 걸리기도 합니다.

1,2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농산에 들어가서 부처님의 서상을 못 본 채

12년 동안 농산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읍니다.

모두 다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계를 받을 수 있었읍니다. 몇 해 전에도 12년

동안 농산을 하여 성취한 사람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났읍니다. 그는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를 드리니 부처님이 나타나서 계를 설하더라고 했읍니다.

 

농산행을 할 때는 그 먼저 농산행을 한 사람이 스승이 됩니다.

그것은 실제 부처님께서 계를 받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인데, 자신들이 직접

체험했으니 다른 사람은 그들에게 거짓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1,200년 동안 농산행을 계속하여 이어내려왔으니, 농산행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부처님을 친견하고 부처님에게서 직접 계를 받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한두 사람이  개인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일본의 모든  불교 단체와 불교도가 다 아는 일입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부처님이 돌아가셨으니 그만이라고 할 수는 없읍니다.

자신이 못 본다고 그러한 사실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눈 감은 봉사가, 누군가가 "해가 참 밝고 좋다"고 하는 소리를 듣고 자신의

눈 앞이 캄캄하다고 해서 그를 미친 놈이라고 욕할 수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나 진리의 눈을 뜨면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읍니다.

 

천대 지자 선사가 혜사스님을 찾아가서 공부를 하고 바로 깨쳤읍니다.

그리고 나서 영산회상이 엄연부산(儼然不散)함을 자기 눈으로 보았읍니다.

이 말은 곧 영축산에서 부처님이 상주하여 수많은 대중을 거느리고

법을 설하는 것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지 수천 년인데 지금도 영축산에서 법을 설한다는 말은

도저히 믿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세상에 나느니 죽느니 하는 것은

꿈속에 사는 눈 먼 중생이 하는 말이요, 참으로 꿈을 깨어 눈이 뜨이게 되고

귀가 열리면 부처님이 항상 계시면서 법을 설함을 보고 들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천백억의 몸으로 나투어 시방세계에 다니시며 중생을 구하십니다.

그래서 설사 꿈을 깨지 못한 사람이라도 지극한 정성으로 부처님을 보려 하면

누구든지 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은 다만 그 사람의 정성이 부족한 탓입니다.

우주 전체의 중생들이 정성만 지극하면 한 날 한시에 다같이 볼 수 있읍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 정성을 들여 병을 고친 사람, 큰 액난을 면한 사람,

죽을 것을 살아난 사람 등 그밖의 여러가지 기적이 수없이 많지 않습니까.

모든 신통력 갖추고
널리 지혜 방편 닦아
시방 모든 국토에
어느 곳에든 현신 않는 곳 없다.

달이 뜨면 천 개, 만 개 강에 비치듯이, 부처님은 시방세계 어느 곳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현신하지 않는 곳이 없읍니다. 만약 부처님이 아주 돌아가

없어졌으며 모든 기적들은 절대로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에도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께 정성을 들여 그 정성의 정도에 따라

가피를 입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은 모두 꿈속의 중생들이 대하는 부처님이어서 잠깐 동안입니다.

그러나 꿈을 깨어 법의 눈을 밝게 뜨면 부처님을 항상 안 볼래야 안 볼 수 없는

것이니 부지런히 공부해서 속히 마음의 눈을 뜰 것입니다.

 

흔히 염기염멸(念起念滅)하는 것 곧 생각이 일어났다가 생각이 없어지는 것을

생사(生死)라고 합니다.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났다가 없어졌다 하는데,

이러한 생멸하는 생각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염기염멸하는 그 생각이 없으면 생사도 없읍니다. 이것이 철저하여,

제8아라야식의 근본무명, 무시무명(無始無明)까지 모두 끊어지면 미래겁이

다하도록 자유자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완전한 해탈을 얻을 수

있읍니다.
불교를 참으로 잘 믿으려면, 불교의 근본 복표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믿어야

합니다. 눈 먼 망아지가 요령소리만 듣고 따라가다가는 똥구덩이에 빠지고

흙구덩이에 쳐박히고 덫에도 걸리고, 심지어는 죽기까지도 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근본 목표는 생사해탈에 있읍니다. 해탈이란 일시적인 자유가 아니라

영원한 자유입니다. 영원한 자유라 함은 생전사후를 통해서 또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를 통해서 영원히 자유로운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보기에서도

보았듯이 엄연한 사실입니다. 결코 전설이나 설화가 아닙니다.

실제로 영원한 자유가 없다면 굳이 부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욕심대로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라면 아무도 고생하면서 수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자유, 영원한 해탈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희생하고 고행의 문턱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천자보다 더 높은 이라도 죽고 나면 아무 소용이 없읍니다. 그렇게 때문에 죽어도

그만이 아닌 영원한 자유를 구하기 위해 천자고 내버리고 참 진리에 도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 옮긴 글

 

 

 

***불이(不二)사랑......../ 무불스님

 

자기를 사랑 하거던 사랑 받기를 기다리지 마라.

 

성인도 허물이 없는 것이 아니다.

성인은 다만 허물 고치기를 주저하지 않은 사람이기에 성인이라 한다.

 

부처님이 많은 사람에게 존경 받고 사랑 받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의 허물과 끊임없는 수행(수고로움)을 통해서 탄생하신 것이다.

부처님의 본생담 에서 무한한 자기 희생을 극기한 것에서 얻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김치를 담구어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수 있는 마음의 여유(발상)를 가저라

자기 몸. 자기얼굴 치장만 하는사람은 인스탄트 사랑만 하는 사람이다.

 

화엄경 비유품에...

[ 비유하건대 어둠속에 있는 보배가

  등불이 없으면 보이지 않듯이

  부처님 법도 설해주지 않으면

  비록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알지를 못한다.]

 

어둠속에 있는 보배란! 자기 희생을 나타내는 말이다.

등블이 아니면 볼수 없다는 말은, 김치를 담글줄 모르면 줄 수가 없다는 말이다.

부처님 법이란 것이 경전 속에만 있다면

그것은 쓸모없는 휴지종이 만 될 뿐이라는 가르침이다.

 

"일생을 허덕이며 살아도 마음 하나다."

사랑 하는 마음, 사랑 받는 마음.그 본처도 하나다.

행복과 불행도 마음 속에서 얻어지고. 자유와 속박도 같은 마음 속에서 얻어진다.

 

"불교의 핵심은 수행이다."

수행이란 구도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생명이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생활이 곧 수행이다.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항상 같은 습관에 빠저 되풀이 돼서는 안된다.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꽃망울이 변하여 꽃이 피듯이 자신이 변해야 한다.

 

씨앗이 변하여 모종이 되고 새싹이 변하여 줄기가 되고 

줄기가 무성하여 고운 꽃이 피고. 꽃이 변하여 열매의 결실은 맺는 것처럼......

자신을 수행정진(일상의변화) 하여. 변할때

가족 모두로 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되는 것이다.

 

"무아법자" 을  "진시보살"이라 한다.

자기가 없다는 법.을 깨달은 사람이 진실된 지성인 이란 가르침이다.

 

불교의 참 사랑은 불이(不二)사랑이다.

당신과  나, 너와 내가 하나요, 생과 사가. 하나요.

색과 공이. 하나요. 시와 비가. 하나요. 중생과 부처가. 하나이다.

 

가슴에 변화한 사랑의 씨앗을 심고.

조건없는 사랑을 나누고 살길 축원 드린다.

 

 

 

♬배경음악:To Dori / Stamatis Spanoudak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