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1. 18. 12:59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처음 공부하는 사람이 어떤 마음 자세로 공부에 임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 공부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나,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인 사람이나 마음가짐이라고 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마음가짐은 결국 공부에 대해서 얼마나 갈증을 가지고 있는가,
얼마나 목이 말라 있는가, 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죠.
비유를 들면, 젖먹이 어린애가 엄마한테 젖 달라고 우는 것 같은 그런 심정,
어린애가 생각으로 헤아리고 계산해서 젖 달라고 하는 게 아니거든요.
그저 배가 고파서 우는 거죠.
그런 것처럼 이 공부도 내가 머리로 ?뭘 어떻게 해야 되겠다.?
이런 의도적인 것이나 의식적인 것, 그런 것들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배고픈 어린애와 같은 그런 절실함이 중요한 것이거든요.
이 공부가 이렇게 저렇게 좋으니까, 그런 이유가 있고
그래서 그런 이유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공부를 해야 되겠다는 그런 계산적인
발심이 아니고, 자기도 모르게, 어린애가 배고프듯이, 그냥 배가 고픈 겁니다.
공부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라고 해도 좋고, 뭐라고 딱 꼬집어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그냥 배가 고픈 겁니다. 그런 식으로, 진실로 배가 고프면 멀지 않아서
반드시 응답이, 거기에 대한 반응으로서 진실한 자리가, 공부의 결과가 나오는 겁니다.
이것은 아주 상식적인 거죠. 무슨 이치가 있는 게 아닙니다.
그냥 우리 삶에 있어서 아주 상식적인 원리죠.
그런 원리지, 무슨 이치가 있어서 그 이치에 따라서 이렇게 하면 저렇게 된다,
그런 것이 아니에요. 누구나 다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고, 자연스럽게 행할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공부라는 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공부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란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아니, 대단히 중요한 것 정도가 아니라 공부의 전부입니다.
마음가짐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공부가 아주 짧은 시일에,
어떤 사람은 6일을 이야기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3일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 내에 가능하다는 거죠. 사실 그렇습니다.
그러나 마음가짐이 잘못되어 있으면 수십 년을 해도 항상 수박 겉핥기예요.
공부가 안 된다 이겁니다. 늘 그냥 그 상태죠.
그런 사람들을 보면 자기 스스로 마음가짐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은 모르고,
?뭔가 방법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서 온갖 여러 가지 방법이나 사람을 찾아서,
이런 방법도 써보고 저런 방법도 써보고 사람도 만나보고 하는 거죠.
그런데, 그건 머리에서 나오는 계산이기 때문에 안 맞는 겁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젖먹이 어린애가, 아직까지 머리로 계산할 줄 모르는,
그저 배가 고프니까 젖 달라고 우는 그런 순수함! 계산이 전혀 개입되지 않는
그런 배고픔, 목마름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으로 공부는 되는 겁니다.
본래면목의 응답이란 것은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본래면목이란 것은 우리에게 이미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갖추어져 있는 것이 왜 드러나지 않느냐?
그것은 우리들의 계산, 의식적인 헤아림 때문에 안 드러나는 것입니다.
첫 질문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느냐고 하셨는데
정말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것이 공부의 시작이자 공부의 전부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방법은 소용이 없어요. 방법이란 것은 어떤 방법을 쓰든 별 상관이 없어요.
기도를 해도 좋고, 절을 해도 좋고, 화두를 하든, 뭘 하든 상관없어요.
제가 볼 때는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제일 좋아요.
어떤 방법도 취하지 않는 게... 왜냐하면 그런 방법이란 것에 잘못 매여 들어가면
그런 방법이 주는 어떤 일시적이고 조작적인 효과에 매여가지고
그것들이 공부인 양 착각하는 수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방법은 없는 게 좋습니다.
다만 진실로 목이 마르다고 한다면 자기 자신의 본래면목,
자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멀리 둘러간다거나
어떤 특별한 방법을 통해서 드러나는 게 아니란 말이죠.
바로 즉각 그 자리에 바로 드러나는 게 이거거든요.
그 어떤 무슨 깨져야 될 껍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버려야 할 번뇌나 업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자기 자신의 진실한 존재, 자기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니까,
아무 조건 없이 있는 그 자리에서 즉각 드러나는 것이지
특정한 방법을 통해서 갈고 닦아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오직 필요한 것은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헤아림이 아니라,
진실하고 꾸밈없는 정말 절실해서 피할 수 없는 그런 발심입니다.
그런 목마름, 배고픔, 그것이 이 자리를 문득 체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작이자 끝이죠.
공부를 10년 동안 해온 사람이나 하루를 한 사람이나
이 자리를 모르면 조건은 똑같은 겁니다. 아무런 차이가 없어요.
알거나 모르거나 이지, 십년을 해온 사람이라고 해서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게 아니에요.
십년을 해왔든 하루를 공부했든, 진실한 목마름, 진실한 배고픔,
이것 하나만 갖추어지면 멀지 않아서 그 자리를 보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은 이렇게도 생각해요. ?나는 정말 공부를 하려고
발버둥을 많이 쳤다. 그래서 나는 발심이 되어 있다.
정말 나는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도 왜 안 되느냐?
내가 뭔가 방법이 잘못된 게 아니냐?? 이렇게 질문할 수가 있단 말이죠.
그런데 제가 볼 때 그분은 아직 방법을, 요령을 찾고 있기 때문에
진정으로 배고픔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진정 배가 고픈 사람은 요령을 찾을 겨를이 없어요.
정말 배가 고프면 눈이 뒤집어지거든요.
쟝발쟝이 눈앞의 빵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진열장을 깨고 빵을 훔쳐 먹을 만큼
그런 배고픔! 그 상황에서 ?내가 유리창을 깨고 빵을 훔쳐 먹으면 처벌받을 텐데...?라는
그런 계산이 나온다면 아직까지는 배가 덜 고프다는 거죠.
진정 배가 고프다면 요령을 계산하는 그런 생각이 떠오르질 않아요.
그냥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일 뿐이지...
이렇게 하면 되고, 저렇게 하면 안 될 텐데 하면서...
헤아리고 따지고 있는 동안에는 아직은 배가 덜 고픈 거죠.
그러니까 자기가 생각할 때는 ?나는 정말 공부가 하고 싶은데...?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이런 방법, 저런 방법을 따져 보고 헤아려 보고 있다면
진정 배가 고픈 게 뭔지를 아직 모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진정 배가 고프면 눈에 보이는 게 없어요. 그만큼 절실해야 되는 겁니다
출처- 무심선원
살기가 어려워서 도울 수 없다는 건 핑계
부처님께서 마가다국에서 유행하실 때의 일이다.
마침 흉년이 들어 세간의 살림살이가 매우 곤궁했다.
하지만 부처님을 따르는 대중들은 비구가 1250인이었고,
우바새가 1000명이었으며, 걸식하는 사람이 500명이나 되었다.
부처님은 이 대중들을 데리고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유행하시다가
어느 날 나라(那羅)라는 마을에 있는 호의암라원(好衣菴羅園)에
이르셨다.
이 마을의 촌장은 외도 니건(尼)의 제자였는데 흉년에 2000명이
넘는 대중이 찾아오자 걱정이 되었던지 스승 니건을 찾아갔다.
니건은 촌장의 방문을 받고 부처님을 난처하게 할 처방을 일러주었다.
즉 부처님께 찾아가 “항상 모든 집이 복과 이익을 두루 갖추고
더욱 풍요로워지기를 기원하며, 이와 같은 서원을 세우고 말하는지”
물어보라고 했다.
만약 부처님이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대가 어리석은 범부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라고 다그치라 했다.
또 부처님이 그렇게 서원한다고 말하면 “어찌 지금처럼 흉년든 때에
세상을 유행하고 다닙니까?
1250비구와 1000명의 우바새와 500명의 걸식인을 데리고 마을에서
마을로 다니는 것은 마치 큰 홍수가 나고 큰 우박이 쏟아지는 것과
같아서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칠 뿐 세상을 유익하게 하는 일이
아닙니다”라고 반문하며 말과 행동이 모순됨을 따지라고 했다.
그렇게 하면 부처님은 말할 수도 없고 말하지 않을 수도 없는 곤경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니건의 계략은 난처한 질문을 통해 부처님은
‘공양 받을 자격(應供)’이 있다는 인식을 무력화시킴으로써
비구들에게 시주하는 것을 피해보자는 속셈이었다.
촌장은 부처님을 찾아가 문안을 올린 다음 니건의 지시대로 물었다.
그러자 부처님은 “여래는 오랜 세월 동안 모든 가정에 복과 이익이
늘어나기를 원하고, 항상 그렇게 되도록 기원한다”고 답했다.
촌장은 예정된 대답이 나오자 그런 서원을 세우신 분이 흉년에
수많은 대중을 이끌고 마을을 찾아오는 것은 사람들에게 폐해만
끼칠 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자 부처님은 “91겁 동안 내려오면서 비구에게 보시한 것
때문에 가산을 탕진하고 망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돈과 재물이 많고 권속들이 많은 큰 부자들은 하나 같이
오랫동안 보시 베풀기를 좋아하고 적정(寂靜)한 곳에 머문 집들이라고
말씀하셨다.
가산이 탕진되는 것은 “왕으로부터 위협을 받거나, 도둑들에게
약탈당하거나, 불에 타거나, 물에 떠내려가거나, 창고가 무너지거나,
빚을 돌려받지 못하거나, 원수에게 빼앗기거나,
못된 자식이 낭비하거나, 무상한 것”과 같은 아홉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이런 인연을 제쳐두고 ‘사문 고오타마는 남의 집을 망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며, 그 같은 나쁜 말과 소견은 마치 쇠창을 물에
던지는 것과 같아서 몸이 부서지고 죽은 뒤에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하셨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두려움을 느낀 촌장은
자신의 잘못을 사죄하고 물러갔다.
잡아함 32권에 실린 이 내용은 가뭄과 흉년이 드는 시기에 수많은
대중을 이끌고 유행하셨던 부처님이 어떤 고난을 당했는지 짐작케 한다.
그리고 1000명의 우바새와 500명의 걸식인이 함께 했다는 대목은
흉년으로 곤궁해진 사람들이 부처님을 따라 다니며 연명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경전의 메시지는 지금은 살림이 어려우니까 보시하거나
남을 도울 수 없다는 사람들의 심리를 경책하는 것이다.
재산을 모으지 못하거나 가산을 탕진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나열하신 이유 때문이지 보시하고, 가난한 이웃을 도와서가 아니다.
우리는 보시를 행해야 할 순간에 자신의 어려움과 처지를 핑계로 삼는다.
그러나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은 나보다 못한 사람들도 남을 돕는데
아무런 모자람도 없다는 사실이다.
부처님의 말씀처럼 보시하는 것 때문에 가산이 탕진되는 일은 없다.
참답게 복락을 누리는 삶은 언제나 삼보를 공양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보시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 서재영/불교신문에서
밤바람 - 유치환
너의 편지에
창밖의 저 바람소리 마저
함께 봉하여 보낸다던 그 바람 소리
잠결에도 외로와 깨어 이 한밤을 듣는다
알수없는 먼 먼데서 한사코
적막한 부르짖음 하고 달려와
또 어디론지 만리나 날 이끌고 가는
고독한 저 소리!
너 또한 잠 못이루는 대로 아득히 생각
이 한밤을 꼬박이 뜨고 밝히는가
그리움을 모르는 이에겐
저 하늘의 푸르름인들 무슨 뜻이리
진정한 밤 외로운 바람은
너와 나만을 위하여 있는것
아아 또 적막한 부르짖음 하고 저렇게
내게로 달려오는 정녕 네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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