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선과 간화선 / 청화큰스님

2011. 12. 9. 00:3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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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선과 간화선 / 청화큰스님

-- 흔히 염불선이 있고 한국불교에서 전통적으로 화두선 혹은 간화선이 있는데 염불선과 화두선(간화선)인 이 두 참선법의 같은 점은 무엇이고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 아주 참 좋은 질문이십니다. 대체로 아까도 말씀을 해 드렸습니다만 사실은 부처님 법은 다 모두가 성불이 목적이기 때문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습니다. 그러나 방법적인 차이는 있겠지요. 화두 공안선은 한국에서 주로 선원에서 전통적으로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육조 혜능스님 때까지 이 분들은 33조사로, 정통조사인데 그 때까지는 화두 공안선은 없었습니다.

없다가 중국 송나라 때 대혜 종고스님(大慧 宗고 : 1088-1163, 중국 송나라 임제종 스님) 때 화두를 하는 체계를 만드셨습니다. 송나라 이후에서야 비로소 발전이 되었습니다. 송나라는 한국으로 따지면 고려에 해당됩니다. 고려 때부터 한국 큰스님들이 중국에 들어가서 배워오셨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 한국은 국세가 작으니까 큰 나라에 의지하고 그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습니까? 그런 경향 저런 경향으로 해서, 고려 때 중국 들어가서 가령 그 당시에 태고 보우스님, 나옹 혜근스님 그런 위대한 분들이 중국 들어가서 법을 배워 가지고 왔어요. 한국에 나와서는 왕사가 되고 국사가 되고 하셨는데 그분들 때가 송나라 때였기 때문에 대혜 종고스님이 세운 화두 공안선을 배워 왔단 말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이조 오백 년 동안에는 우리 불교인들은 중국과 교류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고려 말엽까지 들어온 수행법이 그대로 이조 오백 년 동안에 산간에서 구족했단 말입니다. 오늘날도 이 여파로 해서 화두를 의심하지 않으면 참선이 아니다, 이런 정도까지 되어버렸지만 아까 말씀 드린 것과 같이 송나라 이전에는 화두라는 말도 없고, 그런 선도 없고 부처님 때부터서 달마를 거쳐 삼십삼조사 때까지도, 화두 공안선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이라는 것은 100% 부처님을 믿는 것인데 그 의심을 품는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우리가 이런 반문도 할 수가 있는 것이고 하기 때문에, 그러나 중국에서 한동안 이루어지고 한국에서 유포가 되고 지금까지도 각 선원이나, 일반 불자님들도 참선 그러면 화두를 의심한다 이렇게 됐으니까 그것이 굳이 참선법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요.

참선법이 하나인데 그것만이 참선법이다, 그러면 그것이 하나의 집착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선법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아까 제가 말한 바와 같이 화두를 의심한다 하더라도 그 본체를 여의지 않고 선오후수(先悟後修)하는 자세로 하면 좋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단을 품더라도 그냥 덮어놓고 의단이 아니라 그 본래 면목이 무엇인가? 참 나가 무엇인가? 그와 같이 본체의 자리를 추구하는 자세로 화두를 의심하면 좋습니다.

염불선은 한국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중국에서 송나라 이후부터 차근차근 중국에서 시대에 따라 불교가 변천이 되어오지 않습니까? 송나라 다음에는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인데 주로 송나라 때부터서 원나라, 명나라를 거쳐 오면서, 특히 명나라 때 불교가 아주 융성할 때, 중국의 그런 화두 공안선의 즉 임제종 내에서 명나라 때 이른바 4대 고승분들, 그분들이 화두를 이것이 무엇인가? 저것이 무엇인가? 하는 회의적인 화두보다는 차라리 아미타불로 화두를 하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중국명나라 때 사대 고승들이 염불 화두라 해서 아미타불을 화두화시킨 것입니다.

그것이 한국에서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명나라 때 4대 고승들이 주로 염불 화두 이른바 나무아미타불 화두를 했습니다. 화두를 할 때는 나무(南無)를 빼고 합니다. 우리가 소리를 낼 때는 여섯자 음조인 나무아미타불이 잘 들어맞아요. 그래서 여섯자로 하는데 화두할 때는 아미타불로만 합니다.

그렇게 된 것이 중국 명나라 때 이루어지고 한국이란 항시 중국에서 하면 그것이 한국으로 들어오나 한국이 이조 오백 년 동안은 불교인들이 중국하고 교류가 못됐단 말이에요. 그 의심하는 쪽에다 역점을 둔 송나라 화두법만 들어와서 선으로 굳어져 버렸기 때문에 한국 선원에서는 의심하는 쪽에다 역점을 둔 화두가 유포됐단 말입니다.

그래서 염불선하면 생소히 한단 말입니다. 사실은 중국에선 벌써 명나라 때 유포가 되고 또 지금도 중국이나 대만이나 월남이나 그런데는 아미타불 화두를 대부분이 합니다. 한국에서 나온 것도 아닌 것이고, 중국 명나라 때 보통 화두를 공부하는 의심하는 임제종파에서 나왔습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시대의 변천으로 해서 맨 처음에는 단순히 의심하는 쪽으로 대혜 종고스님이 송나라 때 화두를 그렇게 체계를 세웠는데 그 뒤에는 의심하다 보니까, 의심할 바에는 차라리 부처님 이름을 해주면 되겠다, 이런 요청에 의해서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아미타불 화두를 들었던 것입니다.

근래에 중국 쪽에서 위대한 스님이 계시는데 허운(虛雲)스님이 계십니다. 허운스님은 1959년에 돌아가신 분입니다. 굉장히 위대한 분이예요. 지금 참선요지(參禪要旨 : 도서출판 여시아문간)라는 책도 내고 화엄도 그분은 숭상합니다. 그분은 101세에 돌아가셨는데 그분도 염불화두, 아미타불화두를 하고 있고 또 대만에 가셔서 돌아가신 인광 스님도 위대한 선지식 스님이십니다. 지금 그분도 역시 염불화두를 합니다.

일본불교 선종에는 세 종파가 있는데 보통 화두를 의심하는 임제종파가 있,고 화두없이 잠자코 명상으로 하는 묵조선파가 있고, 아미타불로 염불하는 정토종파가 있어요. 우리 한국은 다만 보통 의심하는 임제종파만 있기 때문에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선 좀 치우친 편이죠.

그래서 뭣이 좋고 나쁘고 우위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다 특징이 있어서 일반적으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다 좋은데, 기본적인 것은 참선이란 것은 대체로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할 때 참선이라는 것은 본체를 여의지 않아야 참선입니다.

가령 몇 달을 굶고 명상을 하고 다 좋죠. 모두가 하나의 위대한 선인들의 명법이기 때문에 이것이 다 법인데 다만 스님들의 전제조건은 무엇인고 하면 꼭 본체를 안 여읜다는 것입니다. 본체를 안 여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천지 우주를 모두 다 하나의 생명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생명으로 본다는 그런 깨달음(해오)이 전제가 되서 선오후수라, 먼저 그런 깨달음을 전제로 하고 닦아 나가야 참다운 참선이기 때문에 우리가 우위를 논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참선의 본체적인 문제 그런 문제에서는 똑같아져 버립니다.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 깊은 잠을 자고 난 후 새삼 화두를 챙기지 않아도 마치 산 위에서 큰 돌이 무서운 기세로 굴러 오듯이 하고, 자는 동안에도 화두 의심이 더욱 커지고 있어서 알 수 없는 의심이 하루 종일 계속 커지는 경계가 오매일여라고 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 참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 같아서 칭찬합니다. 찬탄합니다만은 역시 그것이 온전한 오매일여는 못됩니다. 염불을 오랫동안 하다보면 염불을 굳이 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염불이 나오고, 저절로 염불이 나올 정도가 되면 몸도 마음도 시원스럽고 가쁜해져요.가뿐하니 모든 것이 신체적인 거북함도 다 풀리기도 하고, 좋은 경계가 많이 나오지만 그것이 온전한 오매일여는 아닌 것입니다.

역시 오매일여라는 것은 우리가 그야말로 자나깨나 한결같이 공부가 쭉 나가야 되는 것인데, 사실 원칙은 깨달은 성자가 아니고서는 오매일여가 못 되는 것입니다. 원칙은 참다웁게 깨달아서 망상이 없어져야 하는 것인데 우리 범부 중생은 그렇게 될 수가 없어요.

지금 우리 거사님들 얼만큼 공부가 깊이 되었나 제가 이제 점검을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말씀을 들어보고 만나 보지 않으면 알 수는 없으나, 역시 그 단계가 공부가 상당히 이끌어져서 선숙한 것은 사실이고 또 그런 대로 공부하면 앞으로는 정작 깨달아서 오매일여가 되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과 오매일여는 같다고 봐야 되요. 깨달아야 오매일여가 되고, 오매일여가 되야 깨닫고 말입니다. 이렇게 봐야 되는데 우리가 아직 견성을 확실히 못했다고 할 때는 그 때는 오매일여가 못 되는 것입니다.

-- 현재 영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영가가 씌울 때 무당은 신을 받아라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만은 본인은 이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몸이 아프고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기도를 하려고 해도 마음이 모아지지 않습니다. 이럴 때 불자로서 어떻게 공부하고 대처해 나가면서 생활해야 될 것인지 일러주십시오.

▲▲ 우리가 신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왜 그런고 하면 그런 신이라는 것은 아직은 저승, 저승은 불교용어로는 중음계(中陰界 : 사람이 죽은 뒤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의 세계)라고 하는데 이 중음계에 영가 되어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 영가는 고급 신이 아니라 저승에서 길을 잘 못 가고 헤매는 그런 신들입니다.

고급 신들은 사람한테 올 필요가 없고, 아까 말했듯이 저승을 헤매는 그런 신들이 인연 따라서 사람들에게 그렇게 오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막아야 됩니다. 그러나 막으려고 하면 그 때는 몸이 아프단 말입니다. 본인으로서는 굉장히 고민이 심하겠죠. 그럴 때는 죽어라 하고 애써서 불경을 외면 좋아요. 대다라니나 반야심경이나 말입니다. 무슨 경전이든 가능해요. 애쓰고 외우면 되는 그런 경우는 신이 안 들을려고 방해를 한단 말입니다.

허나 매서운 의지로 극복하고 애써 외우면 결국은 물러가고, 물러감과 동시에 그런 신도 역시 감화를 받는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이라는 것은 어느 누구한테는 필요하고, 어느 누구한테는 필요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람한테나 영혼한테나 다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이 잘 몰라서 엉뚱하게 제 갈 곳으로 안가고서 지금은 사람한테 붙어서 그러는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불경을 애쓰고 외우면 우선은 외우는 그 사람한테 좋고 영혼한테도 좋습니다.

영혼도 감화 받는 것이기 때문에 매서운 의지로 해서 끝끝내 불경을 외고 하면 다 떠나가요. 그러나 그래도 자기 힘이 미처 부족해서 잘 못 할 때는 절에서 스님과 상의해서 영가천도를 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법으로 정식으로, 법식대로 처리하는 법이 있으니까. 그런 법으로 한번 두번 되풀이 하다보면 훨씬 좋습니다.

-- 중생이 다 본래 부처라고 하시고, 본래의 부처라고 하면 왜 중생에게 무명과 윤회가 있었습니까? 또 끝으로 중생에게 근본 무명이 있다면 왜 부처를 이루었다고 하십니까?

▲▲ 예. 다 본래 부처인데 우주가 순환하다 보면은 그 중생들이 말하자면 순환 과정에서 본래 부처인 것을 깨닫지를 못한단 말입니다. 부처인 그대로 가만 있으면 좋을 것인데, 우주라는 것이 그야말로 형체가 이루어지고 생불이 살고, 인간 존재가 거기에서 태생이 되고, 여러 가지 그런 과정에서 아까 말 맞다나 본래 부처인 것을 훤히 알고 있으면 문제가 아닌데, 그 순환하는 과정에서 비추어 보지 못한단 말입니다.

무명이 따로 어디에 있어서 우리가 무명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 스스로 본래 부처인 것을 비추어 보지 못한단 말입니다. 가령 우리 스스로가 부처인데 스스로 무명 때문에 가리워서 우리가 보질 못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무명도 역시 본래는 허망한 자리인 것이고 본래는 부처자리입니다.

그러나 무명의 본신(本身)이 바로 법신(法身)이다, 이런 법문도 있어요. 무명이고 무엇이고 이것이고 저것이고 다 부처 뿐인데 우주의 순환과정에서 중생이 하나의 자리를, 하나의 법신 자리를 비춰 보지 못하니까 무명이 탄생한단 말입니다. 무명이 본래 없는 것인데 중생이 다 비춰 보질 못해서 그 때는 스스로 무명이 된단 말입니다.

-- 한번 깨달으면 다시 오염될 수 있습니까? 아니면 한번 깨달으면 영원히 지속됩니까? 만일 오염되지 않아서 영원한 자유를 이루는 자리라면 어째서 본래 면목이 다시 생사 윤회를 거듭하게 되는 것입니까?

▲▲ 우리가 모든 문제를 결과적으로 보는 것과 본래에서 보는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본래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모두가 다 부처고 그야말로 깨달음 아닌 것이 없고 하지만은, 그때그때 아까도 말한 바와 같이 우주의 자동적인 순환과정에서 이렇게 저렇게 형체가 바뀌어지면 온전히 하나인 자리를 미처 못 느끼니까 스스로 무명이 되어서 범부가 되고 그러는 것이지 범부가 본래 따로 있는 것이고 무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되든지 간에 모든 인민은 평등하여 진여불성뿐이단 말입니다.

다 법신 뿐이란 말입니다. 법신 뿐인데 우리 중생이 그 자리를 그때그때 우주의 순환과정에서 다 비춰 보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볼 때 무명을 내고한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명을 낸다 하더라도 무명을 내는 그 자체도 역시 현상적인 의미에서는 무명이 되고 하지만은, 근원적인 의미에서는 그 때는 무명이 없이 법신 뿐이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별적인 존재가 되어서 무명이 된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진여불성일 뿐이란 말입니다. 아까 말한 바와 같이 개별적인 데서 하나의 자리를 미처 비추어보지 못한데에서 스스로 무명을 짓는단 말입니다.

-- 원래 평상심이 깨달음 자체라고 하면 평상심으로 늘 그대로 있으면 되지 깨달음이라는 상을 지어 참선을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까?

▲▲ 우리가 본래에서 본다면 평상심이 다 되어서, 마음이 평화스럽고 자유가 되겠지만 우리 중생이 업을 지어서 업장에 가리우면 그 때는, 평상심이 본래 마음은 본래 마음인데, 평상심을 제대로 수용을 못합니다.

중생이 스스로 범부가 되어서 평상심을 못 느끼기 때문에 그 때는 닦아서 평상심으로 돌아가야 되겠지요. 우리가 어디서 볼 것인가? 본체론 쪽에서 본래 본다고 생각하면 그 때는 우주가 다 평화스럽고 행복스럽고 다 평상심이고 다 좋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이 현실적인 삶에서 생각할 때는 다생다겁(多生多劫) 동안에 업을 지었기 때문에, 업식으로 본단 말입니다. 업식으로 보기 때문에 그 때는 부처가 스스로 범부가 되고 무명 속에서 평상심이 못되고, 이제 고통스러우니까 닦아서 평상심으로 돌아가야 참다운 깨달음이 되겠지요.

-- 기독교에서는 하나님 창조설을 이야기하고 불교에서는 근본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마음은 무엇이 만들었는지 궁금합니다.

▲▲ (웃음) 다 모다 분별하기 좋아하는 분들이 한편으로는 가상하나, 또 한편으로는 딱하기도 하고 그래요. (웃음) 마음이라는 것은 어디가서 누가 만들어 온 것이 없이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 끝도 없고 한도 없이 마음 뿐인 것이고, 마음이란 것이 물질이라면 만들고 안 만들고, 또 오염도 되고 하지만, 마음이라는 것은 모양이 없는 생명 자체기 때문에, 물질이 아닌 순수생명이기 때문에, 누가 만들고 안 만들고 할 수가 없이 우주라는 것은 모두가 그야말로 마음이기 때문에 일체유심조고 그 마음은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있고 없는 것도 아니라 항시 결국은 우주에 충만해 있는 생명 자체란 말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라는 것도 역시 그네들이 부처님 가르침 같이 온전히 다 몰라서 창조나 뭣이나 그런 말을 내는 것이지 예수님을 성자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기독교인의 하나님 창조도 하나님이라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이나 다 같은 것이 안 될 수없단 말입니다.

다만 그 후대인들이 예수의 성현의 말을 제대로 다 옮기지 못 하니까 그렇게 어떤 한계가 있고 그런 쪽으로 말하는 것이지 적어도 예수가 성자라 그러면 부처님 말씀과 차이가 없을 것이고, 사실 바이블이라는 것도 그래요, 후대인들이 자꾸만 보태고 까고 그래 가지고 만든 것이지 예수가 스스로 다 말한 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기독교로 생각할 때도 그 예수를 성인으로 볼 것인가? 안 볼 것인가? 그것이 중요한 골자가 되요. 성인으로 본다고 생각할 적에는 부처님 가르침과 바이블이 조금 다르게 표현한다 하더라도 합일점을 이룰 수가 있는데, 성인으로 안 볼적에는 바이블 그대로 생각하면 불교하고 안 맞는 점이 많이 있겠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 부처님 가르침은 모두를 수용합니다. 예수나 누구나 마호메트나 모두가 부처님 아닌 게 없습니다 그렇게 나가야 일반된 불교적인 해석이 되겠지요.

-- 요즘에 윤회에 대해 의심이 들어서 스님께 질문하고자 합니다. 불교에서는 육도윤회를 한다 하고 기독교에서는 신이 인간에게 혼을 줬다고 합니다. 동양의 도교나 유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혼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으로 돌아가지 윤회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요즘 물리학이 발달 되서 체세포를 추려내서 동물도 복제하고, 인간도 복제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육도윤회라는 것이 정말 있는 것인가? 요즘에 이해가 안 되서 고민이 됩니다. 스님계서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현대의 물리학이라든가 양자역학이나 그런 현대적인 첨단 과학과도 불교는 절대로 모순이 안 되고 상치가 잘 안됩니다. 왜 그런고 하면 육도윤회 자체가 업식으로 해서 우리가 금생에 살다가 우리가 간다 하더라도, 각 세포로 구성된 이 육체는 허물어진다 하더라도 미세한 업식은 그대로 남는단 말입니다.

그대로 남아서 죽자마자 다시 생을 받아서 거기에 걸맞은 생을 사는 것이고 또 과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전생에 생명존재가 있다가 죽은 순간에 업식이 남아서 금생에 몸을 받듯이, 업식이라 하는 미세의식은 죽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불교라는 것이 불생불멸이고 그러지 않습니까. 불교는 항시 모든 문제를 개별적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우주 전체적인 근원적인데서 풀어간단 말입니다. 아까 말씀하신바와 같이 과학적으로 인간복제라든가 그런 것도 가능할 수 있겠죠.

그러나 그런 것이 우리 불교 부처님 가르침하고 상치 안돼요. 어느 것도 제 아무리 미세한 것에도, 하나의 조그마한 원자나 전자 가운데도 무시무시한 힘이 있듯이 그 속에 이 우주의 에너지가 다 포함되어 있단 말입니다.

어느 순간 어떠한 미세한 것도 우주의 에너지가 다 포함되어있기 때문에 어떤 기기묘묘한 짓을 다 한다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은 제가 말한 것같이 우리 불성 가운데는 만능이 돼어있습니다. 물리학에서는 어느 한계가 있는 정도까지 말하지만 우리 불교는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제 아무리 미세한 가운데도 무한한 정기가 들어있단 말입니다.

어떻게 과학이 발달 되서 기기묘묘한 별스러운 짓을 다 한다 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과는 절대로 반대가 안됩니다. 아까 말씀하신 윤회설을 봐도 서로 상치가 안돼요.

출처 : 부산불교신문

나무불타 나무달마 나무승가 ()...

 

In the twilight glow I see you
Blue eyes cryin' in the rain
When we kissed goodbye and parted
I knew we'd never meet again
Love is like a dying amber
And only memories remain
And through the ages I remember
Blue eyes cryin' in the rain
Blue eyes cryin' in the rain

Someday, when we meet up yonder
We'll stroll hand in hand again
In a land that knows no parting
Blue eyes cryin' in the rain
Love is like a dying amber
And only memories remain
And through the ages I remember
Blue eyes cryin' in the rain
Blue eyes cryin' in the rain

저녁놀이 질 때 나는 빗 속에서 울고 있는
그의 푸른 눈동자를 봅니다.
우리가 작별 키스를 나누고 헤어질 때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죠.
사랑은 꺼져가는 불씨 같은 것
추억만을 남겨둔 채로 말이죠
수 많은 세월이 지나도 나는 기억할 거예요.
빗속에서 울고 있던 푸른 눈동자를
빗속에서 울고 있던 푸른 눈동자를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되면
우리는 다시 손을 잡고 거닐 수 있을 거예요.
이별이 없는 곳에서
빗속에서 울고 있는 푸른 눈동자
사랑은 꺼져가는 불씨 같은 것
추억만을 남겨둔 채로 말이죠.
수 많은 세월이 지나도 나는 기억할 거예요.
빗속에서 울고 있던 푸른 눈동자를
빗속에서 울고 있던 푸른 눈동자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