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신행의 목적

2012. 2. 17. 14:2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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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과 신행의 목적

 

 

신앙과 신행의 목적에 대하여

첫째 불자라고 하면 승속(僧·俗)간에 신심이 있어야 합니다.
신심이 없는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신도라고 할수도 없고

스님이라고 할수도 없습니다.

우리 불교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는 믿는 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화엄경』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신위도원 공덕모요 장양일체 제선근(信僞道源功德母요 長養一切諸善根)이라고 하시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은 도의 근원으로 공덕의

어머니가 되며 일체 모든 선근을 길러준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우리 인생은 믿음의 연속입니다.
나이 대로 보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첫번째로 믿는 것은 자기의 부모입니다.

그리고 어려서 초등학교에 가면 우리는 선생님을 믿게 됩니다.
그때는 부모님 말씀도 잘 안듣고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만 합니다.
선생님이 돈이나 물건을 가져오라고 하면 기어이 가져가야 합니다.
만약 부모가 주지 않으면 울고 불고 야단이 납니다.
여러분들도 어려서 다 한번쯤 경험이 있지요?

다음은 중·고등학교 때 사춘기가 넘으면 누구나 선생님 말씀도 잘 안듣습니다.
그 때는 자기 애인이 최고입니다.
남자는 여자친구가 제일이고 여자는 남자친구가 제일입니다.
공부하다가도 애인이 생각나면 공부가 안되고

꿈에라도 애인이 나타나면 벌떡 일어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결혼을 하면 이 때는 자기 남편과 자기 아내가 제일입니다.
얼마동안 그들은 사랑에 빠져 깨가 쏟아집니다.

그러나 사십이 넘으면 달라집니다.
남편은 아내의 말을 잘 안듣고 아내 또한 남편 알기를 우습게 여깁니다.
그 때는 힘이 넘치니까.

남자는 자기가 제일이고 아내는 보상심리까지

발동을 해서 싸우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육십이 넘으면 상황이 바뀝니다.
남자는 정년퇴직을 하고 아내 또한 힘이 빠져서

서로 지난날을 회고하고 반성한 다음 다시 사랑하게 됩니다.

그때 노부부가 하는 사랑을 망태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칠·팔십세가 넘으면 우리 인간은 누구나다 자기 자식을 믿습니다.
그래서 말년에 자식이 없으면 허전해서 슬퍼하는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물론 못된 자식을 원수덩이라고 합니다만.

어려서는 자식이 부모를 믿고 늙어서는

부모가 자식을 믿는 게 우리 인생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어서는 무엇을 믿습니까?
그것은 누구도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무도 죽어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극락세계 천당에 있는

아미타 부처님께 왕생극락해야 합니다.
그보다 더좋은 것은 해탈하여 열반에 들도록 견성성불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바른 신앙은 바른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은 자유라고 하지만 맹신(盲信)이나 광신(狂信)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자기 자신을 알고(自覺)난 다음 우리는 진리(法)를 깨달아야 합니다.

특히나 불·법·승(佛法僧) 삼보를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우리 불자들은 계·정·혜(戒定慧) 삼학을 신행의 목표로 하여

 최고 목적인 구경열반에 들도록 인연을 잘 지어야 합니다.

『법화경(法華經)』에 보면, 부처님께서

이 세상(娑婆世界)에 오신 것도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도 알고 보면 인연노름입니다.

첫째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부모님을 인연으로 한 혈연(血緣)입니다.
그리고 그 지역에 태어난 것을 우리는 지연(地緣)이라고 합니다.
또 우리는 학교에 가면 학연(學緣)이 생기고 직장에 가면 직장연(職場緣),

우리 같이 부처님을 만나면 불연(佛緣) 또는 법연(法緣)이라고 합니다.

어찌 됐든 우리 인생은 인연이 좋아야 합니다.
좋은 인연은 복(福)이라 하고 나쁜 인연은 화(禍)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초년에 부모를 잘 만나면 그 사람은 부모복이 있고,

말년에 자식을 잘 두면 자식복이 있고,

중간에 처를 잘 만나면 처복,

남편 잘 만나면 남편복, 가는데마다 돈이 생기면

돈복 또는 재복(財福), 먹을 게 잘 생기면 식복이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매일 얻어 맞고 사는 사람은 매복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생은 복·불복이라고 합니다.

어찌 됐거나 우리는 좋은 인연 지어서 좋은 인연

만나는 좋은 인생· 행복한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인연이란 말은 우리가 가장 많이 쓰는 말로써,

근본 원인(因)과 보조연(緣)을 합쳐서 된 평범한 진리입니다.
이 세상 모든 존재와 일이 인연 아닌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해와 달과 별이 다 서로 밀고 당기는

역학관계로 운행을 하고, 지구에 있는 산과 바다,
식물과 동물, 크고 작은 물건들이 서로 인연생기(因緣生起)하고 있지 않습니까.
모든 존재의 상호관계는 인연법(因緣法)이고

그 내용은 인과법(因果法)이며 우주만유의 삼라만상은
연기법(緣起法)이라고 합니다.

일찌기 우리 부처님께서는 ‘인연을 아는 자 나를 보고

나를 아는 자 인연을 깨달으리라’ 하시고,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此有故彼有 此滅故彼滅)’고 우주의 생성원리를 설파하시었습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 머리카락 하나,

풀 한포기 까지도 자기 혼자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지구가 없다면 여러분과 내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나무 없이 나무잎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식물 없이 동물이 살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모든 존재가 인연생기하고 있는 실상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자연을 사랑하고 동물과 식물,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비심(慈悲心)이

가슴속에서 자연히 우러나게 됩니다.

우주의 근본진리인 연기법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무자비하게 살생하고, 도적질하고, 삿된 음행하고,
거짓말 잘하고, 술먹고 횡포하는 막된 인간이 되고 맙니다.

사람을 우리 스스로 고등동물이라고 하고,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자칭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에게 불심(佛心)이라고 하는 자비심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기를 인정과 자비심이 없는 사람은

그 놈은 인간이 아니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비 뒤에는 반드시 보시(布施)가 따라야 합니다.
보시가 없는 자비는 말 뿐입니다.
그래서 원효(元曉)대사께서는 ‘자비보시는

시법왕자(慈悲布施 是法王子)’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비심으로 남에게 베풀어 주는 것

이것이 진리 가운데 가장 훌륭한 왕자라는 뜻입니다.

진실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며

자연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자들은 살생하지 않고 방생(放生)을 하는데

어려운 생활을 하는 인간 방생부터 미물인 미꾸라지까지 살려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들은 자기 혼자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은 불자들은 남을 위하는 것이

결국 자기 자신을 돕는다는 이치를 터득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 인생은 주고 받는 사회생활을 원만히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옛날부터 동양에서는 인생의 진리를 수수작용(授授作用)이라 하고

서양 사람들은 기브앤드 테이크(give and take)라고 합니다.
둘다 주고 받는 것이 사회생활의 진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 불교는 주체, 객체가 다 준다는 입장입니다.

자, 보십시요. 지금 내가 말해주면 여러분은 들어주지요
남편이 음식을 먹여주면 아내는 먹어주지요.
아버지가 아들을 때려주면 아들은 맞아주지요.

이 세상 모든 것이 주는 것입니다.

야구시합을 보십시요.
우선 핏처가 볼을 던져주면 켓쳐가 받아주지요.
그리고 중간에 배트 든 타자가 쳐주면 수비가 받아주지요.
수비하는 선수가 볼을 받으면 냉큼 베이스로 던져주지요.
베이스에 있는 선수는 재빨리 받아 가지고 그 볼을 자기 베이스에 찍어 주지요.
그리고 핏처에게 던져주면 야구의 한동작은 끝납니다.

우리 말은 보시 - 준다는 말이 생활화 되어 있습니다.
우리 눈으로는 봐준다, 귀로는 들어준다, 코로는 맡아준다,
입으로는 먹어준다, 손으로는 만져준다. 발로는 가준다,
머리로는 생각해준다, 그저 준다는 말이 들어가지 않으면 감칠맛이 없습니다.

이렇게 좋은 말이 다른 세상에는 없을 줄로 압니다.
준다는 보시사상이 철저하게 뇌리와 생활 전반에 뿌리박힌

우리 민족, 우리 국가 이외에 다른 곳에는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한민족을 우수하게 만든 불교의 자랑이요
민족종교, 호국불교가 된 원인입니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아무렇게나 아무것이나 주어서는 안됩니다.
보시는 반드시 주는 사람의 마음이 깨끗하고

받는 사람의 마음도 깨끗하며 주는 물건도 깨끗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가지 주어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남에게 겁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만약 상대에게 겁을 준다면 받는 사람은 기가 죽어서

아무일도 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옛날 할머니들은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시집살이 시킨다고

겁을 주어서 결국은 손주가 기죽은 놈이 나와 가지고

그 집안이 망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젊은 며느리들이 늙은 시어머니에게 겁을 준대요.
어떻게 주느냐고 물으니까, 시어머니가 실수를 할 때

치매에 걸렸다고 몰아 부치면서 양로원에 보내버리겠다고 공갈을 친대요.
그러면 그 집안도 망합니다.
왜냐 하면 시어머니가 그 집안에 산 귀신인데, 집안 주인이 맥을 못쓰면

그 며느리는 제 멋대로 업대로 놀다가 보면 술집으로 다니다가

결국은 제비족이 채가버릴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 집은 망쪼가 날 것 아닙니까?

어떻든 보시는 상대가 잘 되도록 도와주는 것이 참다운 보시입니다.
보다 더 한차원 높은 것은 무주상(無住相)보시입니다.
무주상보시는 무엇을 남에게 줄 때 아까운 생각없이 주고,

주었다는 생각마저 없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시의 부작용을 없애주는 정신문화의 높은 경지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보시를 한 사람이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있는데

보시를 받은 쪽에서 고맙다는 표시도 없고 갖잖게 생각하는 것을 안다면

그 인연이 피차 나쁜 결과를 맺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꼭 알아둘 것은 주는 사람은 무주상보시를 하되 받는

사람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여유가 생기면 반드시

그 은혜에 보답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두 사람 사이가 더욱 의리있고 그 사회가 복지사회가 될 것입니다.
사랑보다 더 깊은 자비심으로 보시하는 것이 신행의 근본입니다.

믿음과 사랑은 우리 인간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뿐만 아니라

신앙과 신행의 목적인 피안(彼岸)에 도달하는 최상의 방편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살아서 행복하고 죽어서는

극락세계 천당에 가고 영원히 생사를 초월한 열반에 들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원대한 소원을 가지고 지혜스럽게 참고 정진하는

우리 불자들은 맹세코 이루어야 할 서원(誓願)이 있습니다.

나는 맹세코 이 세상 모든 중생들을 건지겠습니다.

나는 맹세코 나의 무진장한 번뇌를 끊겠습니다.

나는 맹세코 한량없는 부처님의 진리를 다 배우겠습니다.

나는 맹세코 위 없는 부처님의 길을 닦아 이루겠습니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 이 해인 - 하얀 눈 밑에서도 푸른 보리가 자라듯 삶의 온갖 아픔 속에서도 내 마음엔 조금씩 푸른 보리가 자라고 있었구나 꽃을 피우고 싶어 온몸이 가려운 매화 가지에도 아침부터 우리집 뜰 안을 서성이는 까치의 가벼운 발결움과 긴 꼬리에도 봄이 움직이고 있구나 아직 잔설이 녹지 않은 내 마음의 바위 틈에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일어서는 봄과 함께 내가 일어서는 봄 아침 내가 사는 세상과 내가 보는 사람들이 모두 새롭고 소중하여 고마움의 꽃망울이 터지는 봄 봄은 겨울에도 숨어서 나를 키우고 있었구나.

 

James Galway - The Thorn Birds ( 가시나무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