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여래가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안목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고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인가? 그것은 바로 팔정도이니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알아차림, 바른 선정이다.” - <초전법륜 경; S56:11>
“수밧다여, 어떤 법과 율에서든 팔정도(八正道)가 없으면 거기에는 사문도 없다. 거기에는 두 번째 사문도 없다. 거기에는 세 번째 사문도 없다. 거기에는 네 번째 사문도 없다. 수밧다여, 그러나 어떤 법과 율에서든 팔정도가 있으면 거기에는 사문도 있다. 거기에는 두 번째 사문도 있다. 거기에는 세 번째 사문도 있다. 거기에는 네 번째 사문도 있다.” - <대반열반경; D16>
수행 방법은 ‘선택’이지만
팔정도에 대한 이해는 ‘필수’
요즈음은 그야말로 정보의 홍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교통과 인터넷, 대중매체의 발달로 인해 나라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실시간으로 공유된다. 이런 현상은 수행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세계 여러 스승들의 가르침과 수행 방법들 또한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있다. 이처럼 넘쳐나는 수행에 관한 정보들은 분명 수행자에게 유용한 면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혼란을 주기도 한다. 전통이나 스승에 따라 가르침도 다소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가르침과 방법에 따라 수행해야 최상의 지혜를 얻을 수 있는가? 이러한 의문은 수행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가져보았을 것이다.
이에 대한 해답을 위의 두 법문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두 구절은 현대의 수행자들이 어떤 법에 의지해서 수행해야 하는지 명확한 기준을 제시해준다. 어떤 형태의 가르침이든, 어떤 스승의 가르침이든, 어떤 집단의 가르침이든, 거기에 팔정도가 있으면 깨달음이 있고 팔정도가 없으면 깨달음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한 마디로 불교 수행은 팔정도이고, 팔정도가 없는 수행은 불교 수행이 아니다.
수행자들은 반드시 팔정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의 인연에 맞는 수행법을 찾는 것이 좋다. 수행 방법은 인연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수행의 기준점이고 이정표인 팔정도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수행 방법은 ‘선택’이지만 팔정도에 대한 이해는 ‘필수’이다.
수행의 목적은 괴로움을 소멸하고 완전한 행복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길이 팔정도이다. 팔정도는 청정한 계율과 바른 견해로 시작된다. 청정한 계율은 바른 말(정어), 바른 행위(정업), 바른 생계(정명)이다. 바른 견해(정견)는 ‘사성제에 대한 이해’와 ‘선, 불선’을 구분하는 지혜를 말한다. 정견을 통해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없는 바른 사유(정사유)가 이루어진다.
정견을 바탕으로 불선한 마음을 내려놓고 선한 마음을 계발하는 것이 바른 노력(정정진)이다. 바른 노력은 곧 바른 알아차림(정념)을 계발하는 것이다. 바른 알아차림은 몸(身), 느낌(受), 마음(心), 법(法)을 알아차림으로써 계발된다. 바른 알아차림을 통해 바른 삼매(정정)를 얻을 수 있고 지혜(정견)는 성숙해진다. 삼매와 지혜가 성숙해지면 결국 괴로움의 원인인 불선한 마음이 소멸하고 완전한 행복인 열반을 실현하게 된다.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 팔정도의 완성이다. 결국 팔정도의 실천이 불교 수행의 시작이고 팔정도의 완성이 불교 수행의 끝이다.
[불교신문 2791호/ 2월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