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성 스님 직접 쓴 ‘참회록’ 찾았다 / 발굴, 용성 스님의 ‘나의 참회록(懺悔錄)’

2012. 2. 27. 12:3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728x90

 

 

 

 

무아사상이 아닌 영원히 존속하는 영(靈)을 찾는 유아사상화 되어버린 대승적인 가르침이지만 나라와 민족 그리고 정법을 향한 용성스님의 불퇴전의 수행의 모습은 후학들의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33인의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지사들 중 유일하게 변절하지 않은 진정한 민족과 불교의 참 스승이신 용성스님께 귀의합니다_()_

 

 

발굴, 용성 스님의 ‘나의 참회록(懺悔錄)’ 전문

법보신문 이재형기자 2012.02.20

 

 

“역경 골몰한 탓에 극도로 쇠약해졌네”

 

 

용성 스님이 ‘삼천리’ 제8권 12호(1936년 12월1일)에 투고한 ‘나의 참회록 전문’. 원문 그대로를 게재하되 일부 단어들은 현대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맞춰 수정했다. 1936년 당시 게재된 원문은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백용성’을 검색하면 한국근현대잡지자료 분야에서 볼 수 있다. 편집자

 

 

용성 스님

 

 

계모 지나친 학대 속에서 불교 인생관이 큰 희망 

승려 결혼 허가한 것은 부처님 참뜻에 어긋나 

살아서 대각 못 이루면 죽어서라도 꼭 이룰 것

 


聞爾胡僧在太白 들으니 호승이 태백산에 계시니

蘭若去天三白尺 삼백척 바위 위의 움막에 사네

此僧年紀那得知 이 스님 나이를 어떻게 알까?

手植靑松今十圍 손수 심은 푸른솔 열아름일세

 


이 글귀는 20년 후의 내 흉금에 지극히 힘찬 자극을 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삭발한 승려가 되어(削髮爲僧) 입산수도하기로 결심을 하고 출가하던 때의 나는 이 글귀를 무한히 즐겨하였다.


하루에도 몇 번 입속으로 외워보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냉정히 말하면 ‘手植靑松今十圍(손수 심은 푸른솔 열아름일세)’의 신념을 굳게 먹고 불도의 길로 나섰다기보다도 솔직한 고백으로 말한다면 어린 시절의 내 가정에 대해서 나는 정신적으로 적지 않은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나이어린 나에게 닥쳐오는 계모의 지나친 학대였다. 계모의 학대는 20전후의 철없는 나로 하여금 포근한 가정을 뛰쳐나가게 하고야 말았었다.


이것이 불도로 들어서게 되는 첫째의 커다란 이유가 되었다. 아직도 20전후 하던 약관의 몸으로 가정에 애착을 두지 못하게 되었었으니 세상이 곳 없이 적막한 감이 들었다. 정신적으로 퍽도 고적(孤寂)과 비애 속에서 헤매던 나에게


此僧年紀那得知 이 스님 나이를 어떻게 알까?

手植靑松今十圍 손수 심은 푸른솔 열아름일세


이러한 불교의 인생관은 나에게 커다란 희망을 가져다주는 듯싶었다. 그래서 출가하여 산 속에 들어가 불경을 읽고 ‘석가(釋迦)’를 따른 지 이제 70유여년(有餘年), 내 머리에는 흰 터럭만이 하나 둘 더해가고 낙명의 고비를 찾아 80의 고개에 이르고 보니 지난날 걸어온 길이 비록 단조로웠다 하더라도 한두 가지의 고난을 맛보지 않았었다.


승려가 된지 70년간, 물질적 육체적 고난도 많았었지만 영적, 정신적, 고애(苦哀)에 이르러서는 말할 수 없는 고투를 쌓아왔다고 하겠다.


이 70년간 고투의 기록을 적기에는 너무도 복잡하고 장황하다. 이제 영적인 모든 고난을 물리처가며 오늘날까지 걸어온 길을 다시금 반추해보는 오늘날까지 순간은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내 수하에서 소승(小僧)되고 대승(大僧)되어 이리 갈리고 저리 갈려간 사람이 무릇 몇 천으로 헤아릴 것이로되 참된 나(眞自我)를 찾아 ‘대각(大覺)’이 된 이 그 몇이나 될런가? 아니 대각에는 이르지 못할망정 그 진오(眞悟)만이라도 찾은 이가 과연 몇 사람이 될 건가 이러한 의문의 뒤에는 반드시 고적과 우울(憂鬱)이 자주 따르게 된다. 내 80평생을 사회는 물론이요 가정까지도 잊어버리고 바쳐온 결과가 그 무엇인가? 이럴 때마다 ‘육진연영(六塵緣影-육진의 그림자)’은 사정없이 고개를 쳐들게 된다. 머리는 퍽도 산란해지고 생각은 여러 갈래로 흐트러지고 만다. 내 몸은 그지없이 괴로웁다.


‘先度當年害我人’
‘그를 탓하여 무엇하랴! 아직도 내 힘이 모자라는 탓이다’


환영에 이끌려가는 내 머리 위로는 ‘부처님’의 이러한 말씀이 뚜렷하게 명(命)하는 것이다. 나는 곧 참선하게 된다. 이 때야 비로소 육진연영(六塵緣影)은 해탈되고 만다. 모든 유혹에서 건져지는 내 몸은 태연자약 마음은 텅 비어진다. 텅 비어진다고 목석과 같이 되는 것이 아니고 ‘진자아(眞自我)’의 법열경(法悅境)에 이르게 된다.


나는 지금도 자주 이러한 순간을 가지게 된다. 아직도 대각(大覺)이라고 할 만치 완전한 진오(眞悟)를 이루지 못한 내가 과연 그 어느 때에나 완전한 ‘대각’이 된단 말인가? ‘부처’가 되어질까? 내 머리는 또한 잡념에 사로잡힌다. 텅 비어졌던 머리에는 어느새 육진연영(六塵緣影)이 나타나며 정신은 이리저리로 흔들리워진다.


내 영은 몹시 괴로웁다. 순간 걸어온 과거에 허무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는 내고민하는 영(靈)에 ‘부처’님의 말씀이 또한 들려온다.


‘생전(生前)에 못되면 생후(生後)에 가서라도 될 테이니 네 자신의 힘이 적음을 알지라.’


그렇다! 육신은 비록 오래지 않아 썩어진다 하더라도 내 영(靈)만은 영겁의 것이다. 이 영(靈)은 언제까지나 있을 것이다. 육신은 없어질지라도 영(靈)만은 반드시 진오를 깨달을 것만 같고 대각을 이룰 것만 같다. 내 육신은 머지않아 죽어질지라도 내 영(靈)만은 영원할 것이다.


나는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부처님의 말씀대로 행하고 있다. 육신이 죽어가기 전에 못되면 육신이 죽어진 뒤에라도 ‘부처’가 될 것만 같다. 그러나 때때로 텅 비어진 마음을 흐리게 하는 순간은 퍽도 마음 괴로운 순간이다.


약 10여년 전 나는 어떤 일로 해서 감옥에를 가서 약 3년간 지냈었다. 그때 재감자들 중에는 기독교인이며 기타 여러 교인들이 있었는데 다른 교(敎)의 교리는 쉬운 언문(諺文)으로 퍽 많이 번역되어 있지마는 불교의 교리만은 아직도 어려운 한문으로만 남아 있어 지금 사람들에게는 좀체로 알려지지 못할 것이 당연한 일인 것 같아서 크게 유감으로 생각하고 감옥에서 나오는 길로 불경 번역에 곧 착수해서 오늘까지 수천여 권을 번역하였었다. 내 혼자서 이 거대한 사업에 손을 대어서 근 7~8년간을 뇌를 썩여가며 너무나 골몰하였던 탓으로 지금은 신경이 극도로 쇠약해지고 두뇌가 흐려져서 똑똑한 정신을 잃어버릴 지경에 이르고 보니 오직 죽을 날만이 머지않은 듯싶으며 최후의 날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까지 내게는 조고만치한 재산도 없고 처자와 가정도 못 가졌었다. 70년 동안 걸어온 길이 오로지 진오(眞悟)와 대각(大覺)만 찾아 걸어왔었다. 그런데 합병 이후 정부에서는 불교도들에게 남녀간 혼인을 허(許)하여 주었다. 이것은 부처의 참뜻에 어그러지는 바이다. 그 뒤 나는 분연히 불교에서 물러나 대각교(大覺敎)란 일파를 따로히 형성시켰다.


‘불즉대각(佛則大覺)이요 대각즉교(大覺則敎)’인즉 부처님의 말씀을 따름에는 불교와 아무런 차이가 없을지나 다만 결혼만을 엄금하여 오는 것이 특색이라고 하겠다. 그러다가 그만 요사이에 와서 유사종교니 뭐니 해서 대각교(大覺敎)를 해산시켜야 한다는 당국의 처사에 어찌할 수 없이 또다시 불교로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모든 것이 고애(苦哀)와 비애(悲哀)뿐이다. 나의 걸어온 과거 70년간을 회고하면 얻은 바 소득이 무엇인가? 내 공벽일여(空碧一如)한 흉중에는 또다시 육진연영(六塵緣影)이 어지럽게 떠오른다.


나는 두 눈을 내려 감고 정좌한 뒤 참탄(參憚)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 어느 때나 ‘대각(大覺)’이 되려노. 아무래도 내 육신이 죽어가기 전에는 이 뜻을 이루지 못할까부다.---

 

 

용성 스님 직접 쓴 ‘참회록’ 찾았다

 

 

진관 스님 본지에 제공
평소사상·인간미 ‘물씬’
참회록 관련 연구 주목

 

 

3·1운동을 이끌었던 민족의 대표이자 근세 최고의 선지식 중 한 분인 용성(1864~1940) 스님이 만년에 직접 쓴 참회록(懺悔錄)이 발견됐다.  


불교인권위원장이자 근대불교연구자인 진관 스님이 최근 근대잡지를 조사하던 중 1936년 12월 간행된 ‘삼천리’ 제8권 제12호에서 용성 스님이 직접 쓴 ‘나의 참회록’을 발견해 2월15일 본지에 전해왔다.


이번에 새롭게 발견된 용성 스님 참회록은 ‘용성선사대전집’은 물론 ‘대각사상’ ‘용성’ 등 기존 연구서에도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특히 이 글은 용성 스님이 70대에 쓴 글로 출가 동기, 여러 고난들, 후학 지도에 대한 느낌,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못한데서 오는 회한, 언젠가는 반드시 대각을 이루리라는 확신, 불경번역을 하게 된 배경과 힘겨움, 대각교를 만든 이유와 그것을 없애는 상황에 직면한 심경 등이 여실히 드러난다. 용성 스님이 출가동기로 계모의 지나친 학대를 털어놓고 있는 점도 새롭다. 계모로 인해 가정에 애착을 두지 못하던 상황에서 ‘태백호승가(太白胡僧歌)’의 글귀를 계기로 입산수도를 결심했다는 것이다. 또 그렇게 출가해 불경을 읽고 오직 부처님을 따른 지 70년이 넘는 동안 머리에는 흰 터럭만 하나 둘 더해가고, 자신의 문하에서 수천 명이 공부를 했지만 정작 얼마나 많은 이들이 ‘참된 나’를 찾았을까를 떠올리며 우울해한다. 그리고 그것은 배우는 이들의 잘못이기에 앞서 ‘아직도 내 힘이 모자라는 탓’이라고 참회한다.


용성 스님은 이어 참선을 할 때면 법열의 경지에 자주 이르지만 완전한 ‘대각’에 이르지 못해 잡념과 허무를 느낄 때도 있음을 고백하고, 그러나 평생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부처님의 말씀대로 행하고 있으니 죽기 전에 대각을 못 이룬다면 죽어서라도 꼭 이루겠다는 점도 눈에 띤다.


또 불경번역과 관련해 3.1운동으로 인해 교도소에 수감된 후 그곳에서 다른 종교의 교리들이 쉬운 언문으로 돼 있는 것을 보고 시작하게 됐음을 밝히고, 하지만 7~8년간 역경에 너무 골몰한 탓에 두뇌가 흐려져서 정신을 잃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스님은 이어 대각교는 결혼을 엄금해 오는 것이 특징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름에는 불교와 아무 차이가 없음에도 유사종교니 뭐니 해서 대각교를 없애려는 당국의 처사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근현대불교 권위자인 김광식 박사는 “당시 불교계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수행 경지를 솔직히 털어놓고 앞으로 더욱 정진할 것임을 고백하고 있는 데에서 참다운 수행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용성 스님은 14세, 16세 때 출가했다는 기존 학설과 달리 ‘나의 참회록’에선 출가 나이를 20세 전후로 밝히고 있는 등 용성 스님 연보와 관련된 연구도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각자의 주장이 근본불교와 다를 수 있습니다

 

 


 
 
 사보이지 않는 인연/피천득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엔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찾아오는 인연도 있나 봅니다.

이제껏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이제껏 각각 다른 모습으로 살다가
어느날 문득 내 삶속에 찾아온 그...

그가 나에게 어떤 인연일까...?
항상.. 의문을 가지면서
시간은 흐르고... 이제...
그와의 인연은 우리의 인연...

그냥 스쳐 지나가는 가벼운 인연은
아니란 생각을 갖게 하는 사람...


이런 인연을 운명이라고 할까요?
 
 
-= IMAGE 1 =-
 
 
서로 많은 기다림으로...
서로 많은 생각을...
서로 많은 궁금함을...
간직해야 하는 운명...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에게 행복을, 친절함을,
그리고, 눈물겹도록 고마운
마음을 보여주는 사람...

보이지 않는 인연도
이 세상에 존재함을
알게 해준 사람...
 
 
 
      홍난파 가곡 연주곡 모음 - 연속 듣기 1. 그리움 / Roman De Mareu 2. 사랑 / James Galway 3. 옛 동산에 올라 / 남택상 4. 장안사/Sofia Soloists Chamber Orchestra 5. 봉숭아 / 팬플룻 연주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