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에게 잡아먹힌 마술사/아눌라 스님

2012. 3. 16. 11:0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728x90

 

 

 

마두삔디까숫따(Madhupindika Sutta, 꿀덩어리경)와 빠빤짜(papanca)’의 내용으로서 인터넷에서 아눌라 스님의 음성법문을 듣고 녹취하였던 것이다.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마술사

 

 

우리는 감각기관을 통하여 외부세계와 접촉하는데 이것이 인식과정의 시작이다. 예를 들어 눈이라는 감각기관이 대상을 만났을 때 접촉이 일어나는데 이 때 느낌도 함께 일어난다. 이때의 인식과정은 능동이 아니라 ‘피동’이다. 따라서 비인칭이다. 아직까지 나라는 개념이 들어가지 않은 상태이다.

 

따라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은 저절로 일어나는데 나라는 비인칭이므로 내 생각이라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비인칭은 ‘느낌’이 일어나는 시점까지라는 것이다. 그런데 비인칭이 떨어져 나가고 계획적이고 개인적인 행위가 일어나는 것은 내가 개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느낌이후에 벌어진다.

 

대상을 느끼는 순간 대상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때 “좋다”, “싫다”, “좋지도 싫지도 않다”라는 세 가지 느낌 중의 하나이다. 이와 같은 느낌을 받아들이는 순간 ‘상(相)’이 형성되는데 이는 ‘프린트’되어지는 것과 같다. 바로 이지점이 매우 중요하다. 위빠사나 명상을 할 때 바로 그 지점이 멈추어야 할 장소이다. 그리고 항상 깨어 있어야 하고, 사띠를 두어야 하는 곳이다.

 

‘사색망상’이 일어나기 전에 보면 ‘봄’, 들으면 ‘들음’등으로 그 내용을 보지 말고, 6기관으로 들어 오는 인지작용의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해야 할까. 왜냐하면 그 때 부터 번뇌망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번뇌망상은 어떤 단계를 거쳐서 일어나게 될까.

 

눈으로 그림을 본다면, 받아들인 그림에 대하여 사색을 하게 된다. 소위 생각하는 단계가 여기에서 부터 시작된다. 인식되어진 그림에 대하여 사색하면서 점차 개념적으로 확장해 나간다. 이렇게 사념이 그 대상으로 부터 확장되는 것을 빠빤짜(망상 papañca)라 한다.

 

이미 대상은 내 눈에서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상이 상으로 남아 인지(프린트)되어진다. 그 프린트 된 상을 가지고서 내가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정보를 연관시키면서 이제부터 생각을 해 나가는 것이다. 시계의 예를 들 수 있다.

 

손목시계를 보았을 때 이것이 시계라고 인식한다. 그런데 이 시계가 “일제인 것 같다”느니 “예쁘게 생겼다”느니 “나도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 와 같은 생각이 시계를 연하여 계속생각하게 된다. 여기서 나(我)라는 것이 개입된 것이다. 시계를 보고 좋다는 느낌이 들어 결국 그 시계를 내 것으로 끌어당기고 싶은 현상이 발생된 것이다.

 

이렇게 머리 속에서 그것에 대한 생각이 연이어 일어나게 되는데 이를 일반적으로 ‘망상’이라 하고, 빠알리어로 ‘빠빤짜’라 하는 것이다. 결국 빠빤짜는 사념이 계속 확장 되어지는 것을 말한다. 사념이 계속 확장되다 보면 어떤 현상이 발생될까.

 

이제 부터는 우발적 단계도 아니고, 그렇다고 계획적인 행위도 아니다.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거부할 수 없는 ‘굴종’의 상태가 되어 버린다. 이 단계는 어떤 단계일까. 이제까지 인식의 주체가 되어 행동하던 사람이 이 굴종의 단계에서는 생각이 주체가 되고, 그 사람은 피 할 수 없는 생각의 피동체가 되어 버린다.

 

예를 들어 그 사람만 보면 화가 나는 경우가 있다. 원수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 인간’만 보면 성질이 난다. ‘그 인간’을 보는 순간 머리 속에서 “그 인간은 나쁜 사람이야”라고 판단해 버리고, 그 인간과 관련하여 안 좋았던 생각들이 연이어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마구 화를 내게 된다. 그러면서 불쾌감과 괴로움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그 불쾌감과 괴로움을 누가 만들었을까. 바로 자신이 만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느끼는 ‘고통의 정체’라는 것이다. 계속 자기 생각 속에 빠져 자기가 괴로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굴종의 상태가 되어 버린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 수 있다. 시계를 보고서 그 시계가 좋아 보여서 그 시계를 가지고 싶다는 강박관념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꼭 그 시계를 가지고 싶다면 어떻게 할까. 극단적으로 훔칠 수 있다. 그 시계가 좋다라는 생각에 멈추었다면 도둑질이라는 행위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그 생각에서 멈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훔치고, 도둑으로 몰리고, 결국 형무소에 들어가게 되고, 고통을 겪게 된다.

 

시계를 훔치지 않고 그 시계를 꼭 사고야 말겠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시계를 사기 위하여 일을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탐진치가 일어나게 되어 있다. 하나가 연하여 수많은 일이 연이어 일어나는 것이다.

 

그 것은 느낌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느낌에서부터 행위가 발생되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가 만들어 놓은 행위로 인하여 자기의 세계가 형성되고, 그 세계의 노예가 되고, 자기가 만들어 놓은 개념에 의하여 사용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개념은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개념의 세계는 어떤 것일까.

 

사람이 개념적으로 확장하여 갈 때 바로 자기 자신이 만들어 놓은 그 개념의 확장, 그 확산적 경향 때문에 과거와 미래와 현재 모두 그 사람을 구속하여 버린다. 예를 들어 “나는 이런 삶을 살아가야 한다”라고 하였을 때, 그 세계는 자기가 만든 세계가 되어 버린다. 따라서 그 세계 속에 살면서 그 세계가 시키는 대로 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지 않으면 소위 세계라는 것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라한은 만들어 놓은 세상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에 다시 올 필요가 없다. 소위 말하는 세상은 내가 만들어 놓은 세상이기 때문에 다시 오는 것이다. 그런 세상은 모두가 다르다. A라는 사람이 인식하는 세상이 다르고, B라는 세상이 인식하는 세상이 모두 다르듯이 각자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세계는 자신이 만들었고, 그 세계 속에서 계속 윤회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라한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세계는 ‘개념의 세계’이고, 자기가 투사해 놓은 ‘꿈의 세계’와 같다는 것이다. 이를 마술사와 호랑이 비유로 설명 할 수 있다.

 

어느 마술사가 죽은 호랑이의 뼈를 추스려 마술로서 호랑이를 소생시켰다. 그런데 그 소생된 호랑이는 마술사를 잡아먹어 버렸다. 이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이 내가 만들어 놓은 호랑이한테 계속 잡아먹히면서 사는 삶과 같다는 것이다.

 

내가 인지하면서 만들어 놓은 허상의 세계, 개념의 세계에 살면서 “아.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해” 하며 만들어 놓은 세상은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면서 사는 세계와 같다는 것이다. 호랑이 이야기처럼 개념이나 언어가 그것을 만들어 나가고 그 사람을 완전히 정복해 버리는 것이다.

 

(아눌라스님, (음성녹음 [이해법문03_빠빤차] http://cafe.daum.net/kalyanamitta )

 

 

깔야나마미따 위빠사나 선원

http://cafe.daum.net/kalyanamitta

 

01. 길잃은 사슴 02. 편지 03. 나는 당신께 사랑을 원하지 않았어요 04. 당신도 울고 있네요 05. 동행 06. 들꽃 07. 사랑의 눈동자 08. 영영 09. 옛시인의 노래(영어 버전) 10.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생각이 나겠지요 11. 나 그대에게 모두드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