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4. 6. 20:32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봉암사 최고 수행도량 만든 주역
홀로 밥 지어 먹으며 토굴 정진 계속
10월 29일, 경주역에 내려 경주시 안내 지도를 살펴봤다. 눈에 들어보는 대부분의 관광지가 불교와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불국사, 석굴암, 분황사, 골굴사, 남산 칠불암 마애불, 황룡사지 등등. ‘불교성지’라는 수식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물론 최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양동마을을 비롯해 신라 왕조의 많은 유적들도 시내 곳곳에 함께 자리하고 있어 눈을 즐겁게 한다.
택시를 타고 기림사로 향했다. 산과 호수를 지나 30여분을 달리니 어느새 함월산 자락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울긋불긋 물든 단풍들이 소박하게 사람들을 맞이한다. 부처님이 생전에 제자들과 함께 수행하며 <금강경>을 설했던 기원정사의 숲(祇林)과 같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어서인지 키 큰 나무들이 많고 숲이 울창하면서도 단정하다.
송암동춘 대종사.
기림사 종무소에 들러 송암동춘(松菴東椿) 대종사가 머무는 암자를 물으니 절 뒤편 너머로 좀 더 걸어 올라가면 나오는 토굴이 스님의 주석처란다. 가을걷이를 끝내고 휴식에 들어간 논과 밭을 지나 5분여를 걷자 조그만 황토집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동춘스님의 토굴 서장암이다. 대종사(大宗師)가 머무는 곳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조촐하다.
스님은 마침 점심공양 후 포행을 하고 토굴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팔순의 나이지만 가벼운 걸음걸이가 활기차다.
경주 기림사 전경.
스님이 토굴 안으로 일행을 안내해 발걸음을 옮겼다. 문 너머에는 작은 주방과 방 2개, 화장실이 오밀조밀 붙어있다. 작은 방에는 각종 책이 쌓여 있고 큰 방은 숙소 겸 정진장이다. 큰 방 벽에 있는 <반야심경>이 인상적이다. 스님은 1970년대 선암사 주지 시절 신도들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잠깐’ 붓글씨를 썼다고 한다. 간결한 글씨가 오랫동안 쓴 사람들의 것과 비교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절을 올리니 스님은 다정한 미소로 “매사에 좋은 인연 만들어 가세요!”라고 덕담을 해 주신다. 갑작스럽게 법을 청하러 온 객을 부끄럽게 하는 따뜻한 말씀이다.
스님의 방에는 다른 스님들의 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찻상 하나도 없다. 스님은 “대접할 차도 없다”며 “냉수 한잔 떠 드릴까?”라며 웃는다. 평소에도 스님은 목이 마르면 냉수 한 잔 들이킬 뿐이다. 짠 음식을 먹지 않으니 물을 마실 일도 많지 않다. 공양도 물론 직접 해 먹는다. 기림사까지 멀지 않지만 절에 폐를 끼치는 것 같아 모든 것을 스님이 직접 해결하고 있다. 동춘스님을 잘 아는 한 스님은 “스님의 생활 자체가 후학들에게 큰 가르침을 준다”고 전했다.
동춘스님은 “궁금한 것은 다 물어보라”며 자리에 앉았다.
동춘스님의 출가 초기 모습.
-큰스님의 출가인연이 궁금합니다.
“내가 처음부터 출가를 생각했던 것은 아닙니다. 사찰을 좋아하다보니 출가 전부터 사찰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절에 찾아 갔습니다. 며칠 머물러보니 스님 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출가 직전에는 스님 되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사회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면서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좋을 지에 대해서도 갈등을 많이 했지요. 그래도 전생에 인연이 있었는지 스님이 되었습니다. 1955년 석암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처음에는 부산 마하사에서 생활하다 1956년 선암사에서 계를 받았습니다.”
출가하기 전 공주 마곡사, 대전 신광사 등을 다니기도 했던 스님은 본격적인 출가생활을 선암사에서 시작했다. 선암사는 경허스님의 제자인 혜월스님이 선 채로 열반에 든 곳이다. 혜월스님은 이곳에서 수많은 수행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소를 훔쳐간 도둑을 제도해 되돌려 보낸 일화나 평생 일군 땅을 농민들에게 나눠준 얘기는 아직도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행자시절 공부일화가 많을 것 같습니다.
“출가하면서 오직 공부만 하겠다는 마음이 강해 선방에 가고 싶은 생각이 컸습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행자는 선방 출입이 불가능합니다. 절집 허드렛일은 다 행자 몫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관세음보살님’만 생각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 인연이 있었는지 나중에 선배스님들이 선방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해줘 공양주 소임도 보면서 틈틈이 정진했습니다. 그렇게 행자시절을 보냈습니다.”
행자시절부터 선방을 드나들어서인지 스님은 아직도 불교의식들을 잘 모른다고 했다. 따로 배우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주지를 볼 때도 그렇고 의식을 집전할 일이 있으면 꼭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스님은 수행만 열심히 하면 모든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고 했다. “정진만 잘하면 됐지 무슨 염불이냐?”는 것이다.
-행자 이후 공부 과정은 어떠셨나요?
“계를 받고 나니 은사이신 석암스님께서 선암사 불사(佛事) 관리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업무를 보면서 시간이 되면 정진을 하곤 했습니다. 불사가 마무리 될 때쯤부터는 곧장 토굴과 선방을 오가며 본격적인 정진을 시작했습니다.”
동춘스님의 은사인 석암스님 진영.
-은사이신 석암스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은사스님에 대해 제가 얘기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은사스님은 스님 나름대로 열심히 정진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은사스님을 스승으로서 존경할 뿐입니다.”
은사스님을 한껏 추켜세우는 다른 스님들과 달리 스님은 석암스님에 대한 말을 극도로 아꼈다. 평소 다른 사람에 대한 평을 잘 하지 않기로 유명한 스님의 모습 그대로였다. 석암스님은 앞서 말한 혜월스님의 법맥을 이었다. 혜월스님이 경허스님의 법을 이었으니 경허-혜월-석호-석암스님으로 이어진 법맥을 동춘스님이 잇고 있다. 동춘스님의 사제(師弟)들로는 지리산 서암정사 원응스님과 부산 내원정사 정련스님 등이 있다.
-스님께서는 토굴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나는 선방보다 토굴에서 오래 생활했습니다. 대한민국 좋은 땅이라고 하는 곳에는 아마 다 가서 움막을 짓고 살았을 것입니다. 내가 사는 방식이 선방보다는 토굴이 더 잘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토굴에 더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단순히 선방보다 토굴을 더 좋아해서만은 아니었다. 스님은 말을 이었다. “이유를 좀 더 얘기하자면 조금이라도 검소하게 지냄으로써 다음 생에는 좀 더 나은 인연으로, 좀 더 나은 수행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에서 그렇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나이 들어 이렇게라도 사는 것은 더 없는 복이지요.”
부산 선암서서 석암스님과 함께 한 모습. 앞줄왼쪽에서 두번째가 석암스님이고 맨 오른쪽이 동춘스님이다.
-승가에서는 토굴생활보다 ‘대중생활’을 중요시 합니다.
“후학들에게는 토굴에 가라는 얘기를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초심자는 절에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토굴에서 지내는 것이 결코 좋은 일은 아닙니다. 도움이 될 수 도 있지만 손해 볼 일이 더 많을 것입니다.” 예전부터 어른스님들은 대중생활을 강조해왔다. 성철스님은 “대중생활 잘 하는 중이 최고”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래서 토굴생활을 말하는 동춘스님의 표정은 조심스러웠다. 스님은 “장소가 결코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인연 따라 정진하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정진하는 마음입니다. 이것만 명심하면 됩니다.”
동춘스님이 서장암에 온 것은 5년여 전이다. 직전에 있던 토굴은 산 중턱에 있어 아무런 교통수단이 없는 스님이 출입하기에 다소 불편했다. 그래서 불국사 주지스님과 기림사 주지스님에게 부탁해 서장암에 들어왔다고 한다.
-깨달음은 무엇입니까?
“우주의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자신을 모르니 사람들이 어리석게 사는 것입니다. 불교는 자신을 알아가는 자각(自覺)의 종교입니다. 어떤 대상을 경배하고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위해 수행하는 것이 바로 불교의 수행이고 깨달음입니다. 자기를 바로 알 때 진리는 드러나게 돼 있습니다. 자신을 알면 미래도 알 수 있습니다.”
화두를 들고 참선중인 동춘스님의 모습.
-어떤 화두로 공부를 하셨나요?
“선암사에 있을 때 설봉스님이 같이 계셨습니다. 수행을 열심히 한 설봉스님에게 처음 화두를 받으러 갔더니 안 주셨어요. 그래서 삼성각에 가서 혼자 정진 했습니다. 어느 날 설봉스님이 저를 칠성각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때서야 화두를 주셨습니다. 화두를 제대로 들어야 공부가 됩니다. 오래 앉아있다고 해서 공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발심(發心)이 되었을 때의 그 마음으로 한다면 공부는 쉽게 될 것입니다.”
동춘스님은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의 정신이 중요하다고 했다. 어떤 화두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쾌스천 마크)’일뿐이라며 끝내 알려 주지는 않았다.
-수행은 왜 해야 합니까?
“병원에 입원한 사람들은 의사를 믿고 치료를 받습니다. 즉 환자가 의사를 믿고 따르면 병은 고쳐집니다.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굳건한 믿음 즉, 신심(信心)이 있어야 합니다. 수행은 자기를 위해서 합니다.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자신을 알고 진리를 체득하기 위해 수행을 합니다. 그리고 수행 끝에 깨닫게 되면 여러 사람들에게 또 베풀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과 같이 복잡하고 어지러운 시대에는 더 수행이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포행중인 동춘스님이 토굴 앞을 거닐고 있다.
-스님께서는 경계를 느끼셨습니까?
“경계에 대해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대오(大悟)를 해야 말할 수 있습니다. 지견(智見)이 열렸다고 해서 생사(生死)까지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지견만 열렸음에도 깨달았다고 떠드는 사람들은 나중에 눈감을 때 고생합니다. 자신의 거짓을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오할 때 까지는 묵묵히 수행해야 합니다. 경계를 모르는 사람들이 이상한 소리를 하고 다닙니다. 참으로 도를 이룬 사람들은 떠들고 다니지 않습니다. 초야에 묻혀 살 뿐입니다. 대중을 속이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수행할 때의 장애는 어떻게 극복해야 합니까?
“화두를 제대로 들지 않으니 문제가 생깁니다. 오래 앉아 있다고 해도 졸면 소용없습니다. 제대로 공부하면 수마가 오지 않습니다. 열심히 정진하면 수마는 저절로 달아납니다. 자나 깨나 공부만 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것은 정성이 부족해서 그런 것입니다. 서산스님께서는 대근기의 사람들은 3일 만에 깨우친다고 했습니다. 중근기의 보통 사람도 7일이면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진심으로 하면 다 됩니다. 죽을 각오로 하면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진심’과 ‘정성’을 계속 강조한 스님은 “찰나에 한 생각 돌이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Amazing Grace / 나나무스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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