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에서 본 금강경/설우스님

2012. 6. 29. 09:5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금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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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에서 본 금강경/설우스님

 

경을 보되 경의 말씀 그대로 글줄을 따라가면 부처님이 대단히

원통하게 생각하신다 참 답답하고 한심하다.

그렇다고 경의 뜻을 어긋나서 자기 소견대로 얘기하면

그건 또 부처님 말씀이 아니고 마구니 말씀이 된다'

그래서 이 경을 바로 볼수 있는 안목, 이 정견이 잘 열려야 한다.

 

선은 무엇을 선이라 하는가? 불심을 선이라 한다.

불심은 진리 ,법 그 자체이다. 진리, 법 자체는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의 방편이 아니고 달 자체를 선이라 한다.

부처님의 마음 성품 그대로 내가 부처로서 부처의 삶의 사는

부처입장에서 법문을 하고, 듣고, 이해하는 것을 선이라 한다.

선을 잘 하는 사람은 사실을 사실대로 알고 사실대로 보고

사실대로 생활해가는 사람이 선을 잘 하는 사람이다.

 

그 사실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

여러분들이 정리해야 할 것은 우리가 중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걸 믿든 안 믿든 이해하든 못하든 알든 모르든 여러분은 부처라는 거다.

부처가 지금 이 법문을 듣고 있고 소리를 들으면서 생각하고 있는거다.

여러분은 그대로 부처이다. '부처이다' 라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사실을 사실대로 알아라는 거다.

내가 부처라는 사실을 사실대로 알고 그리고서는 부처가 부처로서

부처의 삶을 인생을 산다. 이것이 선이다.

 

거울이란 사물이 오면 그대로 비춘다.

그 비추는 작용성이 아주 자유롭고 정확하게 사실을 잘 드러낸다.

이것이 혜[慧]다. 비추는 것은 혜를 말하고, 사물이 와서 비추고나서

가고 나면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그것은 아주 무심하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 본성이 그렇다.  육조스님은 비추는 것을 '혜'라고 하며,

사물이 떠나고 나면 무심하게 고요하게 지키는 것을 정[定] 이라 했다

비추는 것은 항상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과 사물을 만나고 얘기도 하고 듣고 사업도 하고 직장생활도 하고 . .

이것을 평상심이라 하고, 반야심경에서는 묘유라 하고,

모든 관계가 끝나고 본래 본성으로 돌아가는 것을 무심이라 한다.

본성은 허공과 같이 항상 고요하다. 허공은 무너뜨릴 수가 없다.

허공을 더럽힐 수도 없다. 허공은 수명도 변함도 없다

우리의 무심하다고 표현하는 본성자리는 허공과 같은 측면이 있다는 거다.

또 허공은 고요하고 밝고 무심하지만은 무심한 가운데 천삼라 만삼라

속에 있는 모든 생명들을 이 허공이 다 살려내고 키워내고 꽃도 피우고

생명으로서 활동하게끔 허공이 만들어준다

또한 허공은 한번도 내가 그들의 주인이라고 생색이 없다[묘유].

그래서 무심하다.

 

본성에 비유한다. 무심하고 고요한 가운데에 다시 그 많은 생명을 살려내고

서로 주고받는 모든 관계가 서로 상생시키고 서로 행복하게 하고 서로

편안하게 하는 작용을 무심에서 나오는 평상심이다.

반야심경에서는 진공묘유라고 한다. 마음이 그와 같다

여러분은 사유하는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

 

 

불교의 근본가르침은 무아이다. 무아인데 무엇이 듣고 무엇이 윤회하느냐고

생각하겠지만 우리는 없다고 그러면 아주 없는 걸로, 아무것도 없는 그

허무하고 단멸된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무병(無病)에 들어있다 .

있다고 하면 그 있는 것이 절대적으로 변하지도 않고 영원히 존재하고

그 하나의 개체가 영원성을 가지고 항상 있다고 집착하는 것이 유병이다. 없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아란 하늘에 구름이 없다는 말이다. 구름이 없으면

하늘이 없는 것은 아니다.

 

빈병이라 했을때 병속의 물이 없다는 것이지 병까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여기서 없다는 말은 우리가 잘못 본 그 탐심 욕망 어리석음 성냄 차별심

여러가지 찌꺼기들이 없다는 것이지, 항상 그 거울과 같이 광명의 빛이 나오는

우리의 지혜의 밝은 본성자리는 없는게 아니다.

그 지저분한 중생의 욕심 식심 그런 찌꺼기가 없는 '나'이다 [大我, 眞我].

없다고 하면 아주 없는 것이 아니고 '참' 나의 본성이 듣는다는 말이다.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는 그 욕심 어리석은 중생의 업식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눈병난 사람이 허공을 보고 허공의 아지랑이를

보는것과 같다.

허공에 아지랑이가 있나 그 아지랑이를 보고 이쁘다 어떻다고 하면서

한 생을 보내는 거다. 그런 것이 없는 줄 알면 거기에 나의 밝은 본성이

항상 한번도 어두워진적도 없고 고대로 밝다.

 

그러면 이세상 천지가 다 밝다고 할때 한 구석이라도 어두운 구석이있으면

어두운 구석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비해서 밝다는 말이 필요한데,

전체가 다 밝아버리니 밝다는 말도 필요없다.

어둠이 있을때 밝다는 말이 필요하지, 어둠이 없는데 밝다는 말이 필요없다

그래서 무아라고 한다. 밝음 그 자체이다. 그것이 '나'이다.

'듣는다' 그럴 때 내가 없다는데 무엇이 듣는가.  또 막힌다. 다 원만하게

통할수 있는 지혜의 문이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은 그냥 닫혀버린다.

듣는 것이 전부 나에게 고통을 주는 일로 들리고 업을 만드는 일로 들리고

업이 만들어지니까 윤회하는 일로 만들어진다.

그건 내가 잘못된 허상 욕심 시기질투 비교 차별하고 그러면서 자기가

자기를 괴롭히고 학대하는 그것이 자기라고 생각한다.

 

 

이런것을 잘 알면 듣는 것이 바로 들리게 된다.

무심하게 들리고 또 평상심으로 편안하게 모든 생활을 지혜롭게 활용할때는

활용하면서 경계가 오면 자신에 맞게끔 생활을 풀어나가고 그것이 끝나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이것이 색과 공에 걸리지않고 자유자재하게 잘 하는

사람을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잘 아는 사람이다

일시는 한 때를 말한다. 여기서 한 때란 '선'적인 면에서 한때란 '지금 이때다'

하면 벌써 지나가버렸다.

그래서 금강경에 과거심도 얻을수 없고, 현재 현재라 하면 또 지나가버렸다

현재심도 얻을수 없다. 무엇이 한때인가? 정견이 서고 안목이 서면 자기소견

지혜가 나온다  공부를 많이 하면 자기소리를 낼줄 안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많은 경계들에 부닥친다

사람도 물질도 많은 경계를 맞을때 또 마음속에서 경계따라 번뇌 분별심

연민심 자비 보시 사랑 이런 감정이 마음에서 올라오죠. 이러한 생각이

올라올때 그걸 누가 대신해줄 수 없다.

그래서 선사들이'이것은 '배고픈 사람이 밥을 먹을때 밥맛을 알때다.'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실때 물맛을 알때다.' 밥맛과 물맛을 스스로 아는

자가 안다'고 했다

 

저 법문을 듣고 사유할 줄 알아야 한다. 처음 들을땐 이러저러한 맛이 있다.

한 삼십분 지나면 맛이 없어져버린다. 맛이 없어질 단계까지 가야 된다.

그래서 일시는 스스로 아는 자가 아는 때다.

'여시아문 일시불' 불은 부처이다. 부처가 어디있는가 부처를 찾기 위해

마음밖에서 찾으려하지만 그러는순간 내 부처가 그 순간에 지옥을 만들어버린다

부처는 내 본성,여러분이 법문을 듣고 알고 지금 생각하고 있는 ,이 마음의

작용이 부처이다  여러분은 내 소리를 들으면서 부처를 바로 알아버려야 한다.

지금 내가 부처인데 이걸 믿지 않고 밖으로 찾아 헤매면 그것은 도솔천에

앉아서 미륵궁이 어디냐 하는 것과 같다.

 

진짜 은거도인은 세속에서 중생과 똑같이 생활하기 때문에 저사람이 수행자

인지 부처인지 도저히 알수 없는 사람을 은거도인이라 한다.

부처가 제대로 부처가 되려면 중생으로 돌아가야 된다란 말이 있다.

부처는 권위의식이 없다. 여러분도 나도 모두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는 평등하다.

부처에서 나오는 힘은 어떤힘이냐 부처가 되면은 '나'라는 아집이 없기 때문에

'나'라는 틀을 만들지 않는다. 항상 중생을 생각하는 마음이 부처의 모습이다

 

봄에는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가을에는 달빛이 좋다.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고 겨울에는 눈이 좋다.

만약 쓸데없는 일이 마음에 남아 있지 않으면 그것이 곧 인간의 좋은 시절이다

 

- btn 설우스님의 선에서 본 금강경에서..

 

 

 

 

일본만화 기생수로 유명한 작가의 나(我)라는 만화에서

어느 조연이 항상 되새기는 말이다.

 

"꽃은 사는 법을 헤매지 않는다"

 

특정한 능력과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길을 헤매지 않고

항상 자신이 원하는 목표로만 간다..

 

마치 꽃이 본능적으로 태양을 향해 줄기를 뻗어 꽃을 피우는 것 처럼 . . .

난 꽃이 아니다. 난 사람이다.

 

아마 내가 식물이라면 가녀린 바람에도 흔들리는 갈대일것이다.

난 내주위 작은 소리에도 쉽게 흔들리며 아파하며 괴로워한다.

 

그래서 주위의 소리에 귀를 귀울인다.

귀를 귀울이다보면 어느새 조용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리고 내 귓가에 속삭인다.

나를 힘들게 하는 세상의 바람이 아니라

 

나의 마음에서 부는 바람이 불어와 내게 속삭인다.

그리고 내게 나 자신에게 지지 않는 강함과 지혜를 속삭인다.

 

 

 

 

 

 

 

 

 

 

 

 

 

 

 

 

 

 

 

 

 

 

 

  

 

  悟 (4: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