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은 오나가나 고통 투성이다. 고국이 그리워 고국에 가면 고국 나름대로 고통이 있고, 그게 안쓰러워 미국에 오면 미국 나름대로 고통이 있다.
그런데 이 고통이 어디서 생기는가? 어떤 사람은 사랑이 하고 싶어 괴롭고, 먹고 싶어 괴롭고, 자고 싶어 괴롭고, 자식이 없어 괴롭고, 자신이 있어 괴롭고, 명예가 없어 괴롭다고 각기 그 고통의 원인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그 모든 고통이 어디서 오는 것이냐 하면 내가 있는 데 원인이 있다. 내가 없다면 이 세상 천만 근의 고통이 있다 할지라도 나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반야심경》에 5온이 몸이 공한 도리를 비추어 보면 일체의 고통과 액난에서 벗어난다는 말이 있다. 5온은 색·수· 상·행·식(色受相行識)이다. 색은 물질 즉 육체이고, 수·상·행·식은 정신이다.
물질인 색은 지·수·화·풍(地水火風) 4대가 인연 따라 모인 것이니 공이요, 수· 상·행·식은 감수작용, 상상작용, 의지작용, 분별작용이 한데 어울려 하나의 정신작용을 일으키므로 공이다. 독립된 실체가 있다면 상호 연관된 관계가 끊어져 없으므로 고통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지(地)는 지대로, 수(水)는 수대로, 화(火)·풍(風)도 각기 제 좋은대로만 하려 한다.
정신도 역시 마찬가지다. 감수작용은 감수작용대로, 상상작용은 상상작용대로, 의지작용은 의지작용대로, 분별작용은 분별작용대로, 각기 제 모습을 드러내 자랑코자 한다. 허나 그것이 잘 되지 않으니 고통이다. 허나 이것이 각기 떨어진 주인이 없는 것이라 따로따로 떼어놓을 것 같으면 있다고 할 것이 없다. 따로따로 떼어놓지 않는다 할지라도 시간적·공간적으로 잠시도 고정 불변하는 것이 없으니 있다고 할 것이 없다.
있다고 할 것, 없는 것을 붙들어 잡고 나라고 생각하고, 그 나를 중심으로 내 것을 형성하다보니 나 아닌 것과 내 것이 아닌 것과의 대립적 관계에서 온갖 탐욕과 진애가 생기고 사랑과 갈등이 생겨서 세상에 온갖 고통이 실꾸러미 처럼 딸려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몸, 즉 5온이 공한 도리를 확실하게 비추어 보아 내가 없는 것을 알았다면 어찌 거기에 내가 없는데 무슨 고통이 달라붙겠는가? 그러나 이 몸이 헛것이라 하여 업신여기거나 염세적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지·수·화·풍 4대나 색· 수·상·행·식 5온은 아무런 죄가 없는 것이다. 그 놈은 끌고 다니는 마음에서 일어난 생각 때문에 너 나를 구분하는 것이지, 4대 5온 때문에 분별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 때에는 받아들이는 감수작용만 있고 한두 살 먹어 조금 더 크면 돌아다니면서 집고 가지기를 마다하지 않으며, 조금 더 크면 갖가지들을 기억하여 시비분별한다.
그러므로 수·상·행·식은 발달심리학적인 면에서 순서를 정해 놓은 것이고, 또 지·수·화·풍 4대, 즉 지는 굳은 뼈요, 수는 살결이요, 화는 맥박이요, 풍은 호흡이라 인간의 생체구성 과정을 따라서 그렇게 순서를 정해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모든 것은 인간 구성의 요소에 불과하다.
그것을 나라고 생각하는 놈이 있어 너 나를 구분하므로 죽고 싶은 생각이 나고 감정과 감정이 대립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색도 인연이니 공과 다르지 않고 공도 인연이니 색과 다르지 않다. 색불이공(色不異空)이요, 공불이색(空不異色)이라면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색은 수·상·행·식이 아니고는 인식될 수 없고, 수·상·행·식은 색이 아니고서는 그 모습을 나타낼 수 없다. 그러므로 이들은 서로 다르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서로 형태만 달리하여 나타나고 숨은 것에 불과하므로 그의 본체는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구부정(不垢不淨)한 것이며, 부증불감(不增不減)한 것이다.
불생불멸이란 법체(法體)의 영원성을 말하고, 불구부정은 법체의 청정성을 말하며, 부증불감은 법체의 원만성을 말하는 것이다. 물질과 정신, 그것을 운용하는 마음이 어떻게 불생불멸하고 불구부정, 부증불감하는가는 물 하나의 예로서도 능히 증명할 수 있다.
가령 여기 병이 있는데 15℃ 때 그 병 속에 3㏄의 물이 있다고 가정한다. 그 병에 100℃의 열을 가하면 그것은 얼마 있다가 모두 수증기로 변하고, 또 그것을 식혀 차게 만들면 다시 3㏄의 물이 된다. 그것을 또 냉동고 속에 넣어둔다면 금방 얼음이 되고 만다. 이렇게 모양은 온도에 따라 변하지만 그 습기(H2O)는 변치 않으므로 부증불감인 것이다.
또 더럽고 깨끗한 것에 대하여서도 물이 입을 통하여 들어갈 때는 깨끗해 보이는 것 같지만 조금 있다가 방광을 통하여 나오면 더럽게 보인다.
그러나 그 물 자체는 더럽고 깨끗한 것이 없다. 또 그 물은 개울에 있다고 해서 적고, 바다에 들어간다고 해서 더 많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부증불감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지혜롭고 어리석은 것이 따로 있지 않다. 그래서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이라고 한 것이다.
우지(愚智) 득실(得失)이 없는 세상, 이 얼마나 편한 세상인가? 불교에서는 이같은 무고안은(無苦安隱)이란 세상을 열반(涅槃)이라 한다.
이 열반의 마음은 부처와 중생이 똑같아 언제나 깨어있는 것이므로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다. 일체중생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마음, 이 마음이 정등정각이요, 도일체고액하여 무지역무득한 열반적정심 그 마음이 무상정등정각이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반야심(般若心)이라 하는 것이며 정각심(正覺心)이라 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반야심을 이룬 자며 정각심을 행한 자이다. 나와 네가 혼연일체의 세계, 세계와 내가 둘이 아닌 대동법계(大同法界)야 말로 태평성대를 이루는 문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