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대신 “할렐루야” 한달 6시간 부흥회 …

2012. 8. 10. 13:37일반/금융·경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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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대신 “할렐루야” 한달 6시간 부흥회 …

명지고는 ‘종교감옥’

 

 

한겨레
2012.08.08

 

 

서울 명지고, 주1회 '예배수업'
지난달 사흘간 2시간씩 부흥회
대체수업은 명목상 있을 뿐


학생이 교육청 인권센터에 제보
학교 "전학 가고 싶으면 가라"


"하나님을 믿으면 역경을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기독교계 사립 일반고인 서울 명지고는 지난 7월17~19일 3일 동안 학교 체육관에서 '신앙 부흥회'를 열었다. 1·2학년 학생 모두가 1~2교시 2시간 동안 수업 대신 학교가 창의적 체험활동으로 진행한 부흥회에 참석해야 했다. 다른 학교에서 온 목사 등이 설교를 하고 관련 영상을 보여줬다. 찬송가도 불렀다. 3교시에는 부흥회에 참여하면서 느낀 점을 썼다. 이 학교 ㄱ양은 "차라리 수업하는 게 낫다"며 "기독교 신자도 아닌데 부흥회에 참여하려니 너무 괴로웠다"고 말했다. ㄴ양도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실패한다'는 설교 내용이 불편했다"고 했다.

 


 

 

이뿐이 아니다. 이 학교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매일 아침 8시께 교실에서 '큐티'를 한다. 큐티는 '조용한 시간'(Quiet Time)의 약자로,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시간을 일컫는다. 시간은 5~10분 정도로 짧지만 이 시간에는 교실 밖으로 나갈 수 없고 떠들어서도 안 된다. ㄱ양은 "학급비로 걷은 돈을 학생들의 동의 없이 헌금으로 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매주 월요일 1교시에는 '예배 수업'을 한다. 학기 초 선생님이 "예배 수업 듣기 싫은 사람 손 들라"고 했지만, 손을 들 수 없는 분위기라고 ㄱ양은 전했다. 대체 수업도 명목상으로만 존재한다. 초·중등학교 교육과정 지침에 따르면 특정 종교 과목을 개설할 때 반드시 철학, 교육학 등 대체 과목을 마련해야 한다. 서울학생인권조례도 학생들에게 예배 등 종교행사 참여를 강요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김영만 명지고 교감은 "우리 학교는 '기독교 이념에 따라 학생을 교육한다'고 홍보하고 입학할 때 서약서도 받는다"며 "전학 가고 싶은 학생들은 언제든 전학 보낼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학교에서 사실상 '우별반'을 운영한다는 증언도 나왔다. 학생들의 말을 종합하면, 명지고는 입학 전인 지난 2월, 전체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영어·수학 두 과목 시험을 치렀다. 이어 영어를 좋아하는 학생들의 신청을 받은 뒤, 신청한 학생 가운데 영어 성적을 기준으로 두 반을 선발해 1학년 1반과 18반을 '영어과제반'으로 운영하고 있다. 영어과제반의 한 학생은 "성적이 좋은 학생들은 대부분 신청했고, 학습 분위기가 좋을 것 같아서 나도 신청했다"며 "'영어를 잘하는 반'이다 보니 '공부를 잘하는 반'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 학생은 "복도 지나갈 때 다른 반 학생들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진다"며 "2학년 때는 '영과반'이 없어지는데 일반반과 섞이면 아이들이 잘 대해줄까 걱정된다"고도 했다.

2009 개정 교육과정은 학생들이 교과목을 선택해서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했지만, 성적을 고려해 반 편성을 따로 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성적에 따라 반 편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며 "교육과정 위반 소지가 있어 지도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황남택 명지고 교장은 "영과반은 글로벌 인재 육성을 위해 외국에서 살다 왔거나 영어를 잘하는 학생들을 따로 모은 것으로 우열반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ㄱ양은 지난 7월18일, 종교 행사 강제 참여, 우열반, 강제 야자(야간자율학습) 등 학교의 인권침해 사항을 시교육청 인권교육센터에 제보했다. 그러나 시교육청은 '우열반'과 종교 행사 강요 문제에 대해선 차일피일 조사를 미뤄오다 <한겨레>가 취재에 나서자 8일 뒤늦게 사실관계 확인에 착수했다. 강제 야자 및 강제 방과후수업 문제만 담당 부서에서 학교 쪽에 서면 질의를 보내 최근 답변을 받은 상태다.

박수진 기자jin21@hani.co.kr

    내 인생의 가시 가시는 꽃과 나무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 또는 스스로에게 수없이 찔리면서 사람은 누구나 제 속에 자라나는 가시를 발견하게 됩니다. 한번 심어지고 나면 쉽게 뽑아낼 수 없는 탱자나무 같은 것이 마음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뽑아내려고 몸부림 칠수록 가시는 더 아프게 자신을 찔러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후로 내내 크고 작은 가시들이 나를 키웠습니다. 아무리 행복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그를 괴롭히는 가시는 있기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용모나 육체적인 장애가 가시가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가난한 환경이 가시가 되기도 합니다. 나약하고 내성적인 성격이 가시가 되기도 하고, 원하는 재능이 없다는 것이 가시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가시 때문에 오래도록 괴로워하고 삶을 혐오하게 되기도 합니다. 로트렉이라는 화가는 부유한 귀족의 아들이었지만 사고로 인해 두 다리를 차례로 다쳤습니다. 그로 인해 다른 사람보다 다리가 자유롭지 못했고 다리 한쪽이 좀 짧았다고 합니다. 다리 때문에 비관한 그는 방탕한 생활 끝에 결국 창녀촌에서 불우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절망 속에서 그렸던 그림들은 아직까지 남아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내 다리 한쪽이 짧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그는 말한적이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가시는 바로 남들보다 약간 짧은 다리 한쪽이었던 것입니다. 로트렉의 그림만이 아니라, 우리가 오래 고통받아온 것이 오히려 존재를 들어올리는 힘이 되곤 하는 것을 겪곤 합니다. 그러니 가시 자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뺄 수 없는 삶의 가시라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다스려 나가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우리는 인생이라는 잔을 얼마나 쉽게 마셔 버렸을 것인가, 인생의 소중함과 고통의 깊이를 채 알기도 전에 얼마나 웃자라 버렸을 것인가. 실제로 너무 아름답거나 너무 부유하거나 너무 강하거나 너무 재능이 많은 것이 오히려 삶을 망가뜨리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사람에게 주어진 고통, 그 날카로운 가시야말로 그를 참으로 겸허하게 만들어줄 선물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뽑혀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가시야말로 우리가 더 깊이 끌어안고 살아야 할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 나희덕의 산문집 "빈통의 물" 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