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문재인 6월항쟁 선봉에 함께 서다

2012. 9. 26. 10:37일반/금융·경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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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6월 항쟁, 미완의 혁명" 
(서프라이즈 / 耽讀 / 2012-06-10)


1987년 6월 10일 대한민국 민주헌정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항쟁입니다. 오늘로 25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6·10 민주항쟁을 '혁명'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구세력이 붉은덧칠을 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들 기득권 유지에 온힘을 쏟고 있습니다.


노무현 "수구세력, 민주정부를 친북좌파 정부라 매도"는 정확한 예측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1997년 6월 10일 '6·10 민주항쟁' 20주년 기념사에서 "지난날의 기득권 세력들은 수구언론과 결탁하여 끊임없이 개혁을 반대하고, 진보를 가로막고 있다"면서 "심지어는 국민으로부터 정통성을 부여받은 민주정부를 친북 좌파정권으로 매도하고, 무능보다는 부패가 낫다는 망언까지 서슴지 않음으로써 지난날의 안보독재와 부패세력의 본색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다"며 수구세력을 비판했습니다. 5년전 그 예언이 정확했음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습니다.



불행하게 이 경고는 실현되었고, 지금 색깔론에 혈안된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노 대통령은 이어 "지난날 독재권력의 앞잡이가 되어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민주시민을 폭도로 매도해 왔던 수구언론들은 그들 스스로 권력으로 등장하여 민주세력을 흔들고 수구의 가치를 수호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면서 "저는 그들 중에 누구도 국민 앞에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독재권력에 굴정했던 <조중동>이 이제 자신들이 가장 민주언론라고 자랑한다는 비판입니다. 맞습니다. 지금 그들은 대한민국 정체성 수호 언론으로 자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반민주, 독재권력에 아부했다는 반성은 하지 않았습니다. 속지 말아야 하는데 속아 넘어가고 있습니다.


수구언론 반성하지 않고, 민주세력은 분열과 기회주의


노 대통령은 "군사독재의 잔재들은 아직도 건재하여 역사를 되돌리려 하고 있고, 민주세력은 패배주의에 빠져 우왕좌왕하고 있다"며 "이런 사정으로 아직 우리 누구도 6월항쟁을 혁명이라고 이름 붙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 모양이 된 것은 6월항쟁 이후 지배세력의 교체도, 정치적 주도권의 교체도 확실하게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민주세력의 분열과 기회주의 때문"라고 경고했습니다.



민주개혁 세력 분열에 대한 경고를 새겨들어야 합니다. 수구세력은 한 몸이 되어 붉은 덧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민주개혁세력은 처절한 자기 반성과 함께 하나되기 위한 뼈를 깎는 각성은 없습니다. 이번 진보당 사태 역시 자기 반성없는데서 시작되었습니다. 민주절차를 범했는데 반성하지 않은 결과 수구세력 색깔론에 빌미를 주고 말았습니다.


6·10 민주항쟁, 97년 경제위기 극복 발판


노 대통령은 "6월항쟁은 그 역사적 의미로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국가 발전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고 했습니다. 민주주의가 실현되자 경제 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87년 이후 우리 경제는 개발 연대의 요소투입형 경제를 넘어서, 지식기반 경제, 혁신주도형 경제로 전환하고, 세계와 경쟁하여 당당하게 성공하고 있습니다. 국민총생산은 87년 세계 19위에서 2005년 12위로 상승하였습니다. 같은 기간 동안 1인당 국민소득은 63위에서 48위로 상승하였습니다. OECD 국가 중에는 24위입니다. 그 밖에도 많은 경제지표는 우리 경제가 87년 이후 장족의 발전을 하였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박정희 추종자들은 박정희 밥먹여주었다고 하지만 97년 경제위기 원인이 됩니다. 이는 노 대통령 연설에서도 확인됩니다.

97년 경제 위기는 관치경제, 관치금융, 법치가 아닌 권력의 자의적 통치라는 독재시대의 낡은 체제를 신속히 개혁하고 정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완전한 정권교체로 완전한 민주정부가 들어서서 신속하고 철저한 개혁으로 극복한 것입니다.

박정희 경제는 '관치경제'입니다. 그런데도 수구세력은 자신들이 경제 무능세력임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참여정부를 경제무능세력으로 모략했습니다.참으로 양심이 없는 사람들의 염치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또 다시 권력을 잡고 있고, 그 권력을 이어가려하고 있습니다. 군사독재의 잔재들은 아직도 건재하여 역사를 되돌리려 하고 있으니 통탄할 일입니다.


6월항쟁, 그 피와 열정 잊으면 안 돼


▲부산 87.6.26평화대행진에 참가하기 위해 부산 문현로타리에 집결한 시민, 학생들로 이루어진 시위대에게 경찰이 다탄두 최루탄을 발사하며 대회 참가를 저지하자 한 시민이 웃통을 벗어 젖힌채 “최루탄을 쏘지마라”며 경찰쪽으로 달려가고 있다. 1987.6.26


6월항쟁은 독재권력은 끝내고, 국민 스스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권리를 다시 찾은 계기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야권분열로 지배세력의 교체도, 정치적 주도권의 교체도 확실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 비극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노 대통령은 이를 탄식했습니다.

87년의 패배, 90년 3당 합당은 우리 민주세력에게 참으로 뼈아픈 상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역주의와 기회주의 때문에 우리는 정권교체의 기회를 놓쳐버렸고, 수구세력이 다시 일어날 기회를 준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뼈아픈 상실은 군사독재와 결탁했던 수구언론이 오늘 그들 세력을 대변하는 막강한 권력으로 다시 등장할 수 있는 기회를 허용한 것입니다. 분열과 기회주의가 6월항쟁의 승리를 절반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민주주의를 제대해야 합니다. 눈앞의 정치에 급급하거나, 우리 내부 분열은 결코 안 됩니다. 수구세력이 다시 부활시킨 색깔론은 단호하게 저항하고 반격해야 합니다. 사상을 빼앗는 그 어떤 강요도 자유민주주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6월 항쟁은 아직도 미완입니다. 미완을 완성으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것은 언론이 언론답도록 해야 합니다. 노 대통령은 "민주주의는 언론의 수준만큼 발전할 것"이라며 "이것은 마지막 남은 개혁의 과제"라고 한 이유도 바로 여기있습니다.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피 흘리는 고 이한열씨 <한국일보> 정태원씨 제공


수구언론은 왜곡은 민주주의를 후퇴시킵니다. 진실을 보도하지 않습니다. 자기들과 생각이 다른 세력을 붉게 물들입니다. 25년 전 6월의 거리에서 하나가 되었던 것처럼 이제 우리의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데 함께 힘을 모아나가야 합니다. 더 이상 수구세력에게 대한민국을 맡길 수 없습니다.

 

※ 이 영상은 2007년 6월 1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20주년 6.10민주항쟁 기념식의 노무현 대통령 기념사를 중심으로 노 대통령의 연설 및 관련 자료를 모아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문재인 6월항쟁 선봉에 함께 서다
[한장의 사진] 87년 6월항쟁 미공개사료


1987627일 낮 1130분 범일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마친 뒤, 노무현 변호사는 고 이태춘씨의 영정을 들고 행진했습니다. 문재인 변호사도 함께했습니다. 두 명의 인권변호사는 그렇게 6월 민주항쟁의 한 가운데에서 서 있었습니다.


[미공개사진] 6.27 11시 30분 범일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마친후 태극기, 플랭카드, 이태춘씨영장 순으로 장례행렬을 배치하여 행진을 하고 있다. 노무현 <6월항쟁 사진자료집, 부산지역 유월항쟁 자료발간위원회>



 

19876월 전국 곳곳에서 민주화의 시위가 들불처럼 일어났습니다. 민주항쟁 중이던 618일 좌천동 시위는 부산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였습니다. 서면 시위대가 범일 고가대로에서 경찰의 저지선에 막히자 시위대는 촛불을, 경찰 진압대는 최루탄과 곤봉으로 맞섰습니다.

이 과정에서 고 이태춘씨는 경찰이 쏜 최루탄을 온몸에 뒤집어 쓴채 범일 고가대로 아래로 추락했습니다. 고 이태춘씨는 봉생병원에서 뇌수술을 받았으나 엿새 만에 사망했습니다. 경찰의 무력진압에 그렇게 한 시민이 사망했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땀과 피를 흘리고,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고 이태춘씨의 사망을 세상에 알리는데 앞장 선 사람이 노무현입니다. 그해 6월 27일 치러진 장례미사에서 고 이태춘씨의 영정을 든 노무현 변호사와 문재인 변호사가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이 이번에 사료편찬특별위원회의 사료수집 과정에서 발굴됐습니다.

사람들은 19876월 내내 부산의 거리에서 보냈던 노무현을 부산 6월민주항쟁의 야전사령관이라는 별칭을 붙여주었습니다. 거리에서 대학생, 노동자 등 시민들과 함께 불렀던 민중가요 <어머니>는 노무현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아 사람사는 세상이란 평생 꿈이 됐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6·10민주항쟁은 거리의 역사였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한 열망은 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과 피로 만든 승리의 역사였습니다. 시민들이 일궈낸 값진 승리의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에게 6·10민주항쟁은 절반의 승리였습니다. 20076·10민주항쟁 20주년 기념식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날의 기득권 세력과 이에 결탁한 수구언론이, 군사독재의 잔재세력이, 분열과 기회주의가 6월 민주항쟁의 승리를 절반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말했습니다.

 

 


'3당 합당'으로 1987년 6월항쟁을 수포로 돌린 장본인이 김영삼과 김무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사람사는 세상을 꿈꾸며 바보같은 정치를 했던 노무현을 6월 항쟁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어머니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너와 내가 부둥켜안을 때
모순의 거리 억압과 착취
저 붉은 태양에 녹아버리고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너와 나의 어깨동무 자유로울 때
우리의 다리 저절로 덩실
해방의 거리로 달려나간다

아, 우리의 승리
죽어간 동지의 뜨거운 눈물
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두려움 없이 향해 나간다
어머니 해맑은 웃음의 그날 위해
(노무현 대통령의 '사람 사는 세상'은 민중가요' 어머니'의 가사에서부터 시작됐다)


“87년 6·10항쟁은 국민이 승리한 역사입니다. 그러나 분열과 기회주의가 6월항쟁의 승리를 절반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국민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지도자들이 잘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머지 절반의 승리를 완수해야 할 역사의 부채를 아직 벗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과제는 자명합니다. 나머지 절반의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 (2007년 6.10민주항쟁 20주년 기념식 -노무현 대통령)


역사의 진실을 아는 사람은 절대 노무현 대통령을 6월 항쟁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여 자신들만의 부귀영달을 꾀하는 자들은 엄연한 역사까지도 바꾸려고 합니다.

역사는 분명히 말해줍니다.
누가 진정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며 자신을 희생했는지...

 


가운데가 부산 민주화 운동의 대부 송기인 신부


플랜카드 들고 있는 노무현


6월항쟁 부산 시국토론회에서 마이크 잡고 있는 노무현


 

노무현-문재인 6월항쟁 선봉에 서다
[한장의 사진] 87년 6월항쟁 미공개사료 공개


 

“1987년 6월 27일 낮 11시 30분 범일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마친 뒤, 노무현 변호사와 문재인 변호사는 고 이태춘씨의 영정을 들고 함께 선봉에 서서 행진했다” “두 명의 인권변호사는 그렇게 6월 민주항쟁의 한 가운데에서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