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8. 25. 09:25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보디사트바의 마음(bodhisattva보살)!!
불자님들
그동안 기승을 부리던 불볕더위도 아열대의 밤도
그 기세가 한풀 꺾였습니다.
오늘은 대승불교에서 보살이라는 용어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합니다.
◇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시고 첫 설법을 교진여 등 다섯 비구에게 네가지의
고귀한 진리, 즉 사성제(四聖諦)를 설하셨습니다.
1. 삶의 고통은 도처에 존재한다. (고苦)
2. 고통의 원천은 이기적인 갈망과 모든 것들에 대한 집착에 있다.(집集=고의 원인)
3. 고통의 중지, 해탈과 자유는 가능하다.(멸滅) : 집착(갈애)을 멸하면 해탈과 자유다.
4.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해탈에 이르는 길
이 사성제의 가르침은, 모든 극단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중도(中道)라고
더 잘 표현하기도 합니다.
◇ 그리고 이 해탈로 이끄는 길을 팔정도라 합니다.
이는 행동, 사고(생각), 말과 행위에 관한 방법을 자세히 규정하고 있습니다.
1. 정견(正見, 바른 견해, 전체적인 입장)
2. 정사유(正思惟, 목적이나 열망에 대한 바른 사고, 구체적인 입장)
3. 정어(正語, 바른말) 4, 정업(正業, 바른 행동)
5. 정명(正命, 바른직업)
6. 정정진(正精進, 바른노력)
7. 정념(正念, 바른 정신, 인식 혹은 주의, 알아차림)
8. 정정(正定, 바른 집중 혹은 명상)
이 8가지가 불교수행의 바탕을 이룹니다.
이것들을 적절하게 적용하고 따라가면 균형 잡힌 조화로운 삶으로 인도되고,
개인과 사회에도 유익게됩니다.
이중 1, 2인 정견과 정사유는 지혜의 계발과 관계가 있고(慧)
3,4,5,인 정어, 정업, 정명은 윤리적인 행위와 관련이 있고(戒)
7,8인 정념과 정정은 선정(禪定=마음의 훈련)과 관계가 있습니다.(定)
이것은 계, 정, 혜(戒, 定, 慧) 삼학이라 하여 불교 공부의 핵심으로
이것은 서로 연관성이 있으므로 동시에 추구해야 합니다.
◇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사성제와 팔정도는 원리는 간단하지만 부처님이 최초로 설법에서 시작하여 부처님 입멸 후 수백 년 간 광대한 양의 주석과 해설서가 나옵니다. 서로 모순과 대립 속에 진화를 거듭하여, 서로가 자기주장이 부처님의 직설로부터 나온 것이라 주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주장들은 모두 부처님의 최초의 가르침인 사성제에 담긴 동일한 주제를 기초로 하여 그 해석을 다양하게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 즉 부처님의 가르침의 목적은 오직 인간에게 고통에서 해방되는 길, 해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삶에서 고통은 기본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목표>는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통을 제거하는 방법은 구체적으로 개인에 따라 무수히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주요특성은 이것들이 개인적인 욕구와 조건에 따라 적절하게 잘 설해져 있습니다. 우리 모두 서로 다른 관심사나 문제,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으므로 특정한 한 가지 가르침 방법이 모든 사람들에 다 적절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설법하시기를 “어떤 특별한 배경을 가진 제자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그에게 맞는 특별한 법을 설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동일한 질문에 대한 답변조차 어떤 때는 ‘그렇다.’고 말할 필요가 있고 또 다른 어떤 때에는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의 근기나 조건에 따라 설법을 달리하였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 입멸 후 수세기가 지나면서, 수행자들은 자신들의 주의 주장이 옳고 부처님의 직설에서 나온 것이라 주장하며, 평이한 실질적인 주제를 놓고도 크게 대립하며, 또 지나치게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문제를 다루고 다투는데 세월을 보내며, 대중들의 고통을 해결하려는 것에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반 재가불자들은 스님들의 말에 식상하게 되어 많은 불자들이 불교에서 이탈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불교역사 속에서 대승불교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불탑을 중심으로 재가 불자들이 모여 부처님을 그리워하며, 실생활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한편으로 많은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법을 전하고, 상담해주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이라 합니다.
다음 글은 “융심리학과 티베트불교의 진수”란 책에서 발췌하여 인용하였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리드밀라 모카닌 박사'로 유고슬라비아 출생으로 스위스 제네바, 미국 뉴욕, LA에서 언어학, 복지, 심리학을 전공하고 심리치료사, 샌디에이고대학 교수 일을 하였고, 전 세계를 여행하며 6개국에 능하고, 30년 이상 참선과 불교수행을 해 온 사람입니다.
◇ 보살(보디사트바, bodhisattva)란 단어는 본래 영웅적인 존재, 밝은 마음을 가진 용감한 의미입니다.
보살은 ‘점잖으며 거칠지 않고’, 개인과 모두를 향한 자비심에 자동적으로 반응하여,
세상일에 관여합니다.
보살은 세상의 중심에 있으며, 모든 투쟁이나 시련과 함께합니다.
그들의 방법은 세상을 거부하거나 포기하는 부정적인 길이 아니라
세상을 긍정하고 좋은 쪽으로 바꾸려는 적극적인 길인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가진 위대한 자비심과 지혜의 힘에서 나옵니다.
사람들을 무지와 애욕, 악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이 그들 삶의 과제입니다.
보살은 오로지 다른 이들의 이익을 위해 부처가 되려는 확고한 결심을 해 왔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단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혼돈과 내면적인 갈등에서 자유로운, 완전히
통합된 ‘깨달은 존재의 길’을 추구합니다.
보살은 다른 사람 내면의 보물인 깨달음의 씨앗을 가볍게 두드리는 방법을 발전시켜
왔는데, 대승불교에서는 이를 인류의 공통유산이라고 합니다.
“보살은 자신이 가진 화학적인 힘으로 은을 금으로 바꾸고, 금을 은으로 꿀 수 있는 숙련된
연금술사와 같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연히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지고 질문하게 됩니다.
“나머지 모든 것을 능가하도록 하는 강력한 힘을 보살에게 부여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사물의 참된 본성을 이해하는 능력, 공포와 불안이 전혀 없이 모든 환경을 견디는 능력,
그리고 방해받지 않는 통찰역과 무한한 자비심으로 모든 상황을 대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이다.”
나는(=라드밀라 모카닌 박사), 티베트 스님 중 몇몇은 보살의 경지를 얻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데, 그들이 내 앞에 있는 동안 나는 똑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자주하곤 합니다.
그리고 역사와 문화적인 바탕이나 생활양식이 티베트 사람들과 엄청나게 다른, 수많은 서구인들의 마음과 삶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그 탁월한 능력에 깊이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보살에 관한 다음과 같은 묘사에서 그 해답의 일부분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처음부터 보살은 불성을 이루는 지혜의 실현을 추구하는데, 그것이 바로 모든 형태의 지식, 모든 존재가 가는 모든 길에 관한 지식이다. 이러한 것이 부처님과 뛰어난 보살들에게 모든 상황과 일치하여 각 개인에게 꼭 맞는 방법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다.”
◇ 그렇습니다.
우리 불교의 목표는 중생들의 고통의 해결에 있습니다.
그 해결을 위하여 부처님이 하셨듯이 중생들의 근기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중생의 근기에 맞는 처방을 내여야 합니다.
그런데 중생들의 근기는 그 사람의 성격과 처해져 있는 조건에 따라 다릅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방편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지혜를 얻기 위해 상구보리를 하며
또 한편으로는 중생의 고통을 한시도 외면하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중생의 고통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따라서 전법사나 스님들은 이 사회에 귀가 열려 있어야 하며, 개인적인 성향을
분석할 줄 아는 힘인 “심리학, 개운심리학,사회심리학, 불교 유식학”에도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 부처님께서 대열반 법문에 “법등명(法燈明), 자등명(自燈明) 법귀의(法歸依) 자귀의(自歸依)”하라고 하셨습니다.
탐진치로 뒤 덥혀 있는 오온(五蘊)덩어리이며 고통의 원인인 가아(假我)를 살펴보고, 이를 제거하면 맑고 청정한 마음이 나오니, 이것이 자등명(自燈明)이요, 이 탐진치에서 벗어난 상태인 고요하고 청정한 마음에 의지하라는 것이 바로 자귀의(自歸依)”하라는 뜻입니다.
이때 고요하고 청정한 마음을 자성(自性) 또는 불성(佛性)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탐진치에 쌓여 있는 자신을 바라보는 기준이 법등명(法燈明)이며, 이것은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는 것이 법귀의(法歸依)입니다.
불교는 부처님의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합니다.
불(佛)은 부처님을 가리키니 곧 부처님의 마음이며, 교(敎)는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둘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마음은 불심(佛心)입니다. 불심(佛心)으로 바라보면 온 세상이 불국토요,
범부(중생)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온 세상이 사바(고해의 바다)일 뿐입니다.
그래서 항상 부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하여야 합니다. 이때 부처님의 마음이란 탐진치의 중생심을 벗어난 청정한 마음을 말합니다. 누구나 자기의 내면에 지니고 있는 그 청정심이 바로 자등명(自燈明)이니, 자신에게 귀의한다는 뜻은 자신의 부처님의 마음에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부처의 가르침은 교(敎)이니 법이며 법등명(法燈明), 법귀의(法歸依)를 뜻합니다.
● “중생이 아프면 보살도 아프다.”라는 유마거사의 말을 돼 새겨 봅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바로 보살의 마음이요, 그 마음 가운데에서 자비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부처님의 마음과 같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가슴아파하는 대중들이 너무 많습니다.
고통에 빠져 신음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고통의 내용이나 대중들의 처한 상황이 다양합니다.
그러나 보살은 그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그래서 대중에게 다가가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합니다.
이제는 무엇이 불설인가라는 어리석은 원조논란, 짝퉁논란에서 벗어나
대중들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는지
대중 속으로 대중 속으로 들어갈 때입니다.
◇ 불자님들~
우리 모두 대승보살이 됩시다.
보디사트바(bodhisattva)가 됩시다.
부처님의 마음을 가집시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자신을 구하고
또 한편으로는 가족과 이웃 그리고 사회를 구합시다.
고통 속에 헤매는 중생을 구합시다.
그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 자비행입니다.
자비행의 실천은 베푸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가진 능력과 지식과 재물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줍시다.
부처님의 가르침(법)을 나누어주고
편안한 마음을 나누어 줍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열심히 배우고
지심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끝으로 “중생이 아프면 보살도 아프다.”라는
유마거사의 말을 다함께 돼 새겨 봅시다.
이 때 보살의 마음은 자비의 마음입니다.
이 보살의 마음은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부처와 보살이 둘이 아닙니다.
내가 사무쳐 깨달아 중생을 구제하면
보디사트바(bodhisattva보살)입니다.
나무 보문시현 원력홍심 대자대비구고구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 빠짐없이 나투시어 넓고 깊은 원력으로
크신 사랑 크신 연민 베푸시는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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