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0. 19. 11:02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용수의 공과 부처님의 공, 용수의 중도와 부처님의 중도는 어떻게 같고 다른가? 라는 글은 맨 아래 있습니다. 맨 아래 글을 먼저 읽은 다음 위에서부터 읽는 것이 이해하기 편할 것입니다. 이 글을 읽은 다음부터는 대승불교의 실체에 대한 명백한 이해를 얻고, 진정한 불교를 공부하는 것이 훨씬 쉬워질 것입니다.
아래 미디어붓다의 기사에 몇일 전에 쓰놓았던 글을 답글로 올렸더니 가객이라는 분이 댓글을 주셔서 다시 답글을 쓴 글을 이어서 올렸습니다.
“불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에서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권하지만, 사실 ‘번뇌와 악행’은 ‘동물적 행복의 원천’이다. 이러한 자유방임적 가치관과 완전히 상반된 가치체계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가 바로 불교의 승가사회다. 짐승의 삶과 반대로, 지계를 지키며 청정하게 사는 삶은 ‘거꾸로 살기’라 말할 수 있으며 이는 부처님과 성철 스님의 삶, 중도의 삶이다.”
김성철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교수는 지난 9월 21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펼쳐진 성철스님 탄신 100주년 기념 제7차 학술포럼 ‘퇴옹성철의 중도론’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김 교수는 기조 강연에서 ‘중도의 실천은 거꾸로 살기’라고 역설했다. 그는 인간이면 누구나 지향하게 되는 권력과 금력을 버리고 수행자의 길을 택한 부처님의 삶을 ‘거꾸로 살기’라고 정의했다. 또한 한평생 생각의 한계, 언어와 문자의 극한을 접하면서 살아간 퇴옹 성철 스님 역시 ‘역설적인 삶’을 살았으며, 이는 부처님 깨달음의 핵심이었던 중도를 계승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중도란 ‘탈이분법을 향한 무한 변증법’이다. 유(有)와 무(無)의 이분법에 대해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중도를 제시하고, 이런 이분법과 중도를 다시 이분법적으로 이해하면 비이 비불이(非二 非不二)의 중도를 새롭게 제시한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유와 무의 자리에는 각각 삶과 죽음, 나와 남, 긺과 짦음이 대입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삶과 죽음이 실재한다는 이분법적 생각에 대해서는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는 중도의 조망을 제시하고,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는 조망을 어떤 상태로 집착하여 ‘삶도 있고 죽음도 있는 현실’과 ‘삶도 없고 죽음도 없는 이상(理想)’을 분리하는 이분법적 착각에 빠진 자에게는 다시 ‘삶도 있고 죽음도 있는 현실’도 없지만 ‘삶도 없고 죽음도 없는 이상’ 역시 없다는 제2의 중도적 조망을 제시하는 것이다. 김 교수는 이런 측면에서 “무소득(無所得)을 향한 영원한 추구가 삼론학(三論學)에서 발견한 중도의 진정한 의미”이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이분법에서 벗어난 이러한 인지적 중도의 지혜가 우리의 ‘감성’에서 자타불이의 자비심을 싹트게 한다며, 이러한 중도불성의 감성은 우리 사회의 경제적 현실에 대해서도 작동한다고 주장했다. 불교의 계와 율에 스며있는 반(反) 동물적인 가치체계가 약육강식의 법칙에 의해 작동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운용에 대한 해독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승가, 즉 거꾸로 사는 집단의 중도가 사회적으로 실천할 때 금력과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는 NGO의 역할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부처님께서 발견하시고, 동아시아에 전해진 후 선(禪)으로 빚어져, 퇴옹성철 스님에게 계승된 불교의 본질 ‘불이중도(不二中道)’는 이제 사회적으로 실천 돼야 한다”며 “그 실천이야말로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삼독심과 반대로 사는 것, 즉 ‘거꾸로 사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21일 퇴옹성철 학술포럼 참가자들이 종합토론을 하고 있다. 왼쪽으로부터 문무왕 연구원, 김성철 교수, 김호귀 교수, 서재영 연구원.
조준호 한국외국어대학교 남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도 ‘초기불교의 중도와 퇴옹성철의 중도’ 제하의 발제를 통해 김 교수와 뜻을 같이 했다.
조 교수는 “성철이 중도로써 선악·시비·유무·고락 등의 상대적인 변견을 버릴 때 참된 선이 나온다고 역설한 것은 선자(禪者)인 성철의 중도가 초기불교의 선정론과 어떻게 만나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더 나아가 중도의 ‘행은 진실한 공(空)’이라는 게송은 초기경전에서 이미 중도를 공사상으로 연결하여 전개시키고 있음을 보여주며, 이는 성철이 <백일법문> 등에서 ‘중도공’ 또는 중도와 공이 동의어임을 반복적으로 언급하여 설명하는 것과 일치한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또 “인류는 세계관적인 문제에 있어 배대(背對)에 대한 투쟁의 역사이며, 이러한 대립적인 세계관은 인간의 삶을 대립과 충돌로 이끈 인류의 모든 불행의 원천”이라 진단하고 “2,500년 전에 이변에 대한 불이의 중도를 설하신 붓다나 우리 시대의 성철에서 볼 수 있듯 중도의 가르침을 통해 시대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밖에도 이날 학술 포럼에는 김호귀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연구교수가 ‘선종의 선문답과 중도의 구현’을, 문무왕 동국대학교 불교사회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이 ‘퇴옹성철의 법어에 나타난 중도의 표현’을 주제로 발표했다.
한편 성철 스님 탄신 100주년 기념 학술포럼은 지난 2011년부터 연 4회에 걸쳐 진행돼왔으며, 올해는 ‘퇴옹성철과 한국 불교의 수행’이라는 주제로 학술포럼을 진행하고 있다.
부처님의 중도와 용수의 중도는 어떻게 다른가?
원불사 단현 2012.09.19
가객이라는 분의 답글
불쌍한 영혼이여,
용수의 공과 부처님의 공, 용수의 중도와 부처님의 중도는 어떻게 같고 다른가?
원불사 단현 2012.09.27
용수는 본래 힌두논사였습니다. 물론 불교로 귀의하였는데 용수가 살던 시대는 이미 상좌부는 없었기에, 부파불교나 대승불교 중 하나의 교단으로 귀의하게 됩니다. (스리랑카로 건너간 상좌부 외에 인도의 상좌부는 분별설부로 남았다가 후 150년 용수시대에 이미 소멸되었음)
용수가 귀의한 곳은 상좌부는 물론 힌두논사들이 점령한 부파불교도 아니고, 이미 보살불교로 회귀한 힌두불교도 아닌, 아직은 제법 건전한 초기대승불교의 한 분파였고, 이름 하자면 공사상을 핵심으로 여기던 초기중관학파였습니다.
중관학파의 논사가 된 용수는 어떤 불변의 식이 있어 윤회한다는 설일체유부나 독자부 경량부 등을 공격함과 동시에, 중관학파의 공을 더욱 철학화하는 작업을 서둘렀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근본중송이고, 그 핵심적인 주장이 팔불중도이고, 이 팔불중도라는 것은 공의 철학적인 해석이지요.
그렇다면 이 중도와 공의 개념부터 먼저 이해하지 않으면 오류에 빠질 것입니다.
흔히 모든 대승불교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중도와 공이 과연 근본불교의 무상 무아를 대체하기 위해서 공을 주장한 것인가? 아니면 공의 또 다른 모습이 있는가?
공이라는 단어는 니까야 7000여 권 아함경 2105권 중에 그저 빈 것 없는 것이라는 의미로 한두 번 쓰여져 있습니다. 니까야 중에서는 맛지마니까야 121경 공에 대한 가르침의 작은 경 122경 공에 대한 가르침의 큰 경 두 곳에서 겨우 한 번 나오고, 아함경은 잡아함경 13권 335경.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에서 윤회하는 주체가 없다(공)를 설하시기 위해 무를 대신 해 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역시 한 번 나올 뿐입니다.
즉 근본불교에 대승의 공사상은 눈을 씼고 찾아봐도 단 한 곳도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용수 같은 대승 空은 비불설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근본불교의 무상 무아와 초기중관학파의 공사상은 어떻게 다른가?
먼저 베다와 우파니샤드의 공사상을 설명합니다.
브라만교와 힌두교는 브라흐만이 세상을 창조할 때 브라흐만이 입김을 불어 이 세상을 창조했습니다. 그 세상은 환상계로 실제 하는 것이 아닌 꿈 같고 환상 같고 거품 같고 그림자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일러 空이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부처님은 이 세상은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이 평화를 이루고 행복하게 살만한 곳이고 최선을 다해 아름답게 살아가야 할 대상이지만, 인간의 탐욕과 악의로 불행과 고통을 겪게 되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고 변하는 것이라는 무상 무아를 깨달아라고 가르치신 것이지요. 결코 허망한 세상이기 때문에 인간의 일생은 허무하다거나 세상을 염오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지요.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는 그 어떤 가치를 부여할 수 없지만, 무상하기 때문에 집착하지 않아서 더욱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판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브라만교와 힌두교는 세상을 허망한 대상으로 보았고, 그래서 브라흐만이 자신의 몸 일부를 가루내어 자신의 창조물 모두에게 깃들게 한 실체적 본질인 아뜨만을 찾아 브르흐만과 합일하는 것이 해탈 열반이라고 가르칠 때, 부처님께서는 유일신 창조신이라는 것은 사람의 관념이 만들어 낸 소산이고, 영혼조차 없는 무아라고 가르치시며 신이나 영혼이라는 허상에서 벗어나 무상 무아를 체득하는 것이 탐욕과 악의를 버릴 수 있는 지름길이며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얻는 해탈이라 하신 것입니다.
이렇듯 공사상과 무상 무아사상은 전혀 다른 사상임에도, 힌두교 논사들이 부처님의 무상 무아를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본래의 힌두교 사상인 공사상으로 회귀하기 위해 만든 경전인 반야심경과 금강경을 한국 대승불교인들은 아직도 불교경전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반야심경 금강경에서 무상과 무아가 아닌 공으로 부처님의 교학을 부정하고 힌두화 시킨 내용을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대승경전을 보는 바른 시각 / 반야심경과 금강경에 속을 것인가? http://cafe.daum.net/wonbulsatemple/c18q/80] [반야심경 금강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 / 교학이나 논장, 위빠사나 명상에 심취한 재가불자들에게 http://cafe.daum.net/wonbulsatemple/c18q/85]를 읽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중도란 무엇인가입니다. 부처님의 중도와 용수의 중도는 어떻게 같고 다른가?
부처님의 중도사상은 한 마디로 고락중도와 단상중도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수의 팔불중도는 오직 공을 철학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힌두교의 공철학을 불교의 이름으로 제시한 것일 뿐 부처님의 근본교리와는 조금도 상관없는 것이지요.
불생불멸(不生不滅) : 개별존재의 생겨남과 사라짐에 대한 부정. 불상부단(不常不斷) : 존재의 영원함과 단절됨에 대한 부정. 불일불이(不一不異) : 존재의 같음과 다름에 대한 부정. 불래불거(不來不去) : 존재의 개별 원인과 개별 결과에 대한 부정.
이것은 여몽환포영하는 현상계의 존재 모두가 공하다는 것을 8가지로 설명한 것일 뿐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본래 허망한 존재에게 무엇을 따질 것인가? 좋고 나쁜 것도 옳고 그름도 없는 것이다라는 얘기입니다. 모든 대상을 분석하고 해체해서 끝까지 파고들어 그 진리를 꿰뚫어라는 근본불교의 가르침과는 전혀 딴판이지요.
그러나 부처님의 수행에서의 중도로서 쾌락이나 고행의 극단이 아닌 바른 사고와 행위의 중도를 설하셨고, 상견과 단견이 아닌 무아지만 업이 윤회한다는 중도를 설하신 것입니다. 이런 부처님의 중도와 용수의 중도가 같은 것이라고 논문을 발표하거나 설법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것이지요.
부처님과 용수의 중도가 어떻게 다른지는 [다양하고 풍요로운 부처님의 중도사상 http://cafe.daum.net/wonbulsatemple/ao1M/851]에서 확인 바랍니다.
용수는 무상 무아가 아닌 여몽환포영 즉 이 세상 모든 존재는 환상계의 허상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기에, 초기불교로 돌아가기 위해 근본중송을 지은 것이 아니라 힌두교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용수는 근본주의자의 손에 칼을 맞아 죽었고, 후대 그의 수제자 제바 역시 칼을 맞아 죽었습니다. 그 시대 근본주의자들은 용수나 중관학파가 부처님의 근본교학을 허무는 힌두마구니로 보였던 것이지요.
용수는 저 팔불중도로 부처님의 12연기까지 허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대승에서는 연기법마저 팔불중도로 해석해버립니다. 결국 연기하는 모든 것은 여몽환포영(공이고 허망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허망하기에 참나를 찾아야 해탈한다는 힌두교가 대승불교가 된 것입니다.
가을 노트 / 문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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