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심이 멸하면 함께 나누게된다.

2012. 10. 26. 12:1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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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심이 멸하면 함께 나누게된다.

 

 

 

    

    불자님들

   계절은 어김없이 변화하여 갑니다.

   이렇게 변화하는 것을 무상(無常)이라합니다.

 

 

◇ 오늘아침 어느 여성불자님 전화를 받았습니다.

  " 스님, 저는 왜 이렇게 사는게 힘이 들까요? 왜 하는 일마다 막힘이 많을까요?"

  " 불자님 요즈음 무슨 어려운 일이 있나요?"

  " 스님, 제가 지금하고 있는 감자탕가게는 처음 들어올때 음식점이었고 권리금도 1천만원이나 주고 들어왔는데, 그동안 시설한 것만해도 2천만원이 됩니다. 그런데 주인이 자기 딸이 가게를 한다고 가게를 비워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투자한 금액이나 권리금을 단 한푼도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가게를 원상복귀해 달라고 하네요!"

 

   이렇게 하소연하는 그 불자님은 큰 시름에 잠겨있습니다.

  

  그런데 위 사건을 알고보니 자신의 딸에게 가게를 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세를 주어 보증금을 더 많이 올리려고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상담을 해보면 위와 같은 사례가 비일비재 합니다.

  그래서 돈이 없어 세를 얻어 가게를 하는 사람은 이래저래 힘들게 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건물주 입장에서는  자신의 재산권을 행사하는 정당한 권리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부도덕한 건물주도 많이 있습니다. 원상복구라는 것을 내세워 보증금의 일부를 차감하고 돌려주는 사례가 많습니다. 심지어 소송을 걸어놓고 보증금 전체를 돌려주지 않고 버티는 건물주가 있고, 작은 돈이라도 받아가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세입자의 약점을 노려 1년이상 돌려주지 않는 파렴치한 사람도 있습니다.

 

◇ 그런데 종교인 특히 인과를 믿는 종교인들은 자신의 입장보다 상대의 입장을 좀더 고려합니다. 그래서 약자인 세입자가 더 양보하며 자신의 마음의 평화를 빨리 찾고자 합니다. 위 건물주는 기독교인이라합니다. 입만 벌리면 남을 위해 기도하고 가난한 자를 위해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 행동은 전혀 아닙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교회를 왜 다니느냐고 물으면 '믿기가 아주 쉽다. 아무리 잘못한 일이 있어도 하느님께 회개하면 다 해결된다. 제사를 지내지 않아서 좋다. 모든 일이 잘 성취가 된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1주일내 성내고 폭언하고 나쁜 짓을 많이 하고 주일날 깨끗한 옷에 정장차림을 하고 가서 하느님께 회개하면 모든 것이 다 깨끗해진다는 인식이 뿌리내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떠들석 했던 대도(大盜)란 자도 수많은 도둑질을 하고도 회개하면 모든 것을 용서받을 수 있다는 신념에 기독교를 믿다가 또 도둑질하여 감옥에 가고 또 감옥에 가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게 됩니다.

 

  최근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에게 '자살하면 하느님이 받아 주실까?'라는 질문에 그들은 태연하게 '이 세상 모든일은 다 하느님의 뜻이예요.  그래서 지금 우리를 빨리 하느님께 오라고 부르심을 한 것이지요.' 그렇게 말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립니다.

 

  그런데 광신적인 기독교 신자가 자기가 믿는 종교를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적대시하고 그들을 괴롭히는 사례가 비일비재합니다. 위 사례도 그 하나입니다. 마음 속에 미움을 품게하는 종교는 사랑의 종교가 아닙니다.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사람을 널리 다 사랑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의 교회는 이렇게 자신들의 테두리에 들어오는 사람만 사랑하고 이교도에게 미움을 가르치는 종교로 바뀌었을까요? 그것은 역사적으로 로마시대에 4차의 공회에 의해서 구약성서의 독소적인 조항이 많이 신약성서에 첨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구약과

같이 조건부 사랑의 종교로 변질된 것입니다. 

 

 

◇ 살인마 '앙굴리라마'의 이야기

   부처님 당시 외도의 제자인 앙굴리라마가 '100명의 사람을 죽이면 도를 이룰 수 있다.'라는  스승의 간계에 빠져 사람을  99명이나 죽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해치려 하자, 이를 아신 부처님이 나타나 그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앙굴리라마의 얼굴만 보아도 겁을 먹고 오금을 움직이지 못하고  결국 목숨을 빼앗기도 말았지만, 부처님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천천히 그의 앞을 걸어가십니다. 앙굴리라마가 아무리 발버둥치고 따라갔지만 부처님을 따라가지 못하였습니다. "그기 섯거라!"라 소리를 치며 따라가자 부처님께서 "나는 이미 멈추었는데, 너는 왜 아직 멈추지 않았는가?"라고 하자 그는 "아니 그대와 나는 함께 달리고 있는데, 어찌 그대가 멈추었다고 하는가?"이렇게 소리치자 부처님은 천천히 돌아보며 그에게 " 나는 이미 탐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내는 것에서 멈추어서 벗어났거늘, 도를 구한다는 그대는 아직도 도를 구하려고 탐심을 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짓을 멈추지 않는구나!"라고 부드럽고 근엄한 목소리로 이야기 하였습니다. 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이후 그는 부처님의 참된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께서는 "그대가 저지른 살인의 과보는 세세생생 받을 것이다. 다만 지금 깨달은 과보로 그 많은 세월 인욕행을 해야할 것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앙굴리라마가 수행승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 매를 맞고 피를 흘리고 수없는 고통을 겪었지만 그는 이를 달게 받았습니다.

   바로 이 점이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입니다.   

   

◇  부처님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누구나 깨끗하고 청정한 마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즉 탐심과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을 다 벗어나면 평온하고 청정한 마음이 있으니

   그 마음이 바로 부처님의 성품이라 하셨습니다. 그 성품은 바로 지혜와 자비입니다.    

   앙굴리라마의 이야기가 이를 증명하합니다.

 

청정불성(淸淨佛性) 에너지를 써서 삶과 세상을 바꿔갑니다. 

 

 

 

1. 해탈열반은 소멸이 아닙니다.

 

 

1) 일부 초기불교파들이 다음과 같이 어리석은 주장을 합니다.

   ‘해탈열반은 모든 것의 소멸이다.

   육신도 마음도 모두 소멸한다.

   열반도 소멸한다.

   8정도를 지키며 살다가 조용히 소멸하는 것이 불교의 해탈이다.’

 

 

2)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무지한 망발(妄發)이거나 불교의 역동적 에너지를 파손하려는

   외도들의 사견(邪見)에 불과합니다.

 

 

3) 열반은 ‘탐욕의 소멸’이다, ‘탐진치’의 소멸이다.

   이 탐진치를 일으키는 어둔 자아의식(自我意識)

   곧 아상(我相, atta–sanya/앗따산냐)이 소멸하기 때문입니다.

 

 

 

#  부처님은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를 통찰함으로써

   ‘나의 것’ ‘나’ ‘나의 자아, 실체’라는 생각을 소멸함으로써

    해탈열반을 실현하라고 끊임없이 강조하셨습니다.

 

 

–  이것은 우리들의 어둔 생각(無明識)을 소멸하기 위한 것이지,

   우리들의 존재와 삶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 부처님께서 『대반열반경』에서

  “아난다여, 이 웨살리는 참 아름답구나, 이 세상은 참 아름답구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 [열반은 탐욕과 어두운 자아의식(自我意識)의 소멸일 뿐, 존재와 삶의 소멸 아니요,

   존재와 삶은 아름다운 자연질서(自然秩序)<무위법(無爲法)>의 발로]라고 하신 것입니다.

 

  

2. 해탈열반은 지혜와 자비, 곧 창조적 에너지의 발로입니다.

 

 

 

1) 생각해보라.

  탐욕이 소멸되면 어떻게 변화하겠는가? -> ( 함께 나눈다. )

  분노와 증오가 소멸되면 어떻게 변화하겠는가? -> ( 서로 사랑한다. )

  어리석은 고집이 소멸되면 어떻게 변화하겠는가? -> ( 지혜가 빛난다. )

 

 

2) 탐진치가 소멸되면 지혜(pannq/반야)와 자비(karuna)가 발로합니다.

  – 불교는 ‘지혜와 자비의 길’이다.

  – 부처님은 양족존(兩足尊)이시다. 지혜와 자비가 구족한 세존이시다.

  – 바르게 보는 불자들의 마음은 지혜와 자비가 발로한다.

  – 부처님같이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들의 마음은 지혜와 자비가 분출한다.

 

 

3) 이 지혜와 자비의 마음이 곧 불성(佛性)입니다. 청정불성(淸淨佛性)이다.

 앙굴리말라(Angulimala) 사건에서 보는 것처럼, 이 청정불성(淸淨佛性)은 결코 오염되지 아니

 합니다. 한때 가려질지라도 발로참회하고 연민과 헌신의 생각 일으키면 다시 발로한다.

 

 

4) 불성(佛性), 곧 지혜와 자비는 우리 자신과 이 세상을 법답게 바꿔가는 창조적 에너지입니다. 이 에너지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조건되면 언제든지 발로합니다.

 

 

 

 

3. 해탈열반은 소멸이 아니라 경이로운 전환입니다.

어둔 생각, 어둔 에너지를 밝은 불성(佛性)으로,

빛나는 창조적인 에너지로 바꾸는 대전환(大轉換)입니다.

 

 

4. 청정불성(淸淨佛性)을 써서

   우리 삶과 이 세상을 빛나게 바꿔가는 것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인 것입니다.

 

                                                                                                     - 동방불교대학 이재영 교수 강의 참조 -

 

 

     감사합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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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잎의 지혜



빗방울이 연잎에 고이면
연잎은 한동안 물방울의 유동으로
일렁이다가 어느 만큼 고이면
수정처럼 투명한 물을 미련 없이 쏟아 버린다

그 물이 아래 연잎에 떨어지면 거기에서
또 일렁거리다가 도르르 연못으로
비워 버린다

 

이런 광경을 무심히 지켜 보면서
‘연잎은 자신이 감당할 만한 무게만을 싣고 있다가
그 이상이 되면 비워 버리는구나’하고
그 지혜에 감탄했었다

그렇지 않고
욕심대로 받아 드리면 마침내 잎이 찢기거나
줄기가 꺽이고 말 것이다

세상 사는 이치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 법정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