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불품 9~11장 自淨其意함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2012. 11. 2. 09:2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법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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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淨其意함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법구경 술불품(述佛品)

 

제9장

관행인제일 불설니항최 사죄작사문 무요해어피

觀行忍第一 佛說泥洹最 捨罪作沙門 無嬈害於彼

관행(觀行)에는 참음이 제일이 되고 '열반이 으뜸이라'

부처님 말씀이네. 죄를 버리고 슈라아마나가 되어

일체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다.

사문(沙門)-범어 Śramana (슈라아마나)의 음사(音寫)

 

제10장

불요역불뇌 여계일체지 소식사신탐 유행유은처

不嬈亦不惱 如戒一切持 少食捨身貪 有行幽隱處

의제이유힐 시능봉불교

意諦以有黠 是能奉佛敎

침노하지도 괴롭히지도 않아 계율을 그대로 모든 것을

보호하며 음식을 적게 먹어 탐욕을 버리고 그윽한 곳에서

선한 행이 있나니 마음이 깨끗하여 지혜 있으면 그는

능히 부처님의 가르침 받들리라.

 

제11장

제악막작 제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

諸惡莫作 諸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어떠한 악도 짓지 말고 선이란 선은 받들어 행하라.

스스로 그 뜻을 깨끗이 하면 그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무심지덕=해===================

마음을 다스리고 섭수함이 계행이고 계행으로부터 마음이 깨끗한

정이 생기고 정에서 지혜가 생기며 지혜는 궁극이요 최고 최상의

열반을 얻게 함이라,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르므로 계를 지키고 행하여 모든 죄를 버리고 슈라아마나가 되어

일체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다면 능히 부처님의 제자라 할 것이다.

[사문(沙門)-범어 Śramana (슈라아마나)의 음사(音寫)]

 

또한 계율 그대로 침노하지도 남을 괴롭히지도 않아 모든 것을

보호하며 음식을 적게 먹어 탐욕을 버리고 그윽한 곳에서 선한

행을 행하고 마음이 깨끗하여 지혜가 있으면 그는 능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용감한 정진으로 열반을 성취할 것이라 하신다.

 

용감한 정진이란 계행을 가져 어떠한 악도 짓지 말고 선이란 선은

받들어 행하여 스스로 그 뜻을 깨끗이 하면 바로 그곳에 성불이

있고 열반이 있는 곳이니 다만 계행을 등지고 사는 곳을 범부중생

들의 세계라하는 것이다, 그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하신다.

 

 

 

"이해와 오해 理解와 誤解" 
                                 

 

세상에서 대인관계처럼 복잡하고 미묘한 일이 또 있을까.
까딱 잘못하면 남의 입살에 오르내려야 하고,
때로는 이쪽 생각과는 엉뚱하게 다른 오해(誤解)도 받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이웃에게 자신을
이해시키고자 일상의 우리는 한가롭지 못하다.

이해(理解)란 정말 가능한 걸까.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상대방을 이해하노라고 입술에 침을 바른다.
그리고 그러한 순간에서 영원을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 이해가 진실한 것이라면
항상 불변(不變)해야 할 텐데
번번히 오해의 구렁으로 떨어져버린다.

나는 당신을 이해합니다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언론자유(言論自由)에 속한다.
남이 나를, 또한 내가 남을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이해하고 싶을 뿐이지.
그래서 우리 모두가 타인(他人).

사람은 저마다 자기 중심적인
고정관념을 지니고 살게 마련이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물(事物)에 대한 이해도 따지고 보면
그 관념의 신축작용伸縮作用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의 현상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 걸 보아도
저마다 자기 나름의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나름의 이해'란 곧 오해의 발판이다.
하니까 우리는 하나의 색맹(色盲)에 불과한 존재.
그런데 세상에는 예例의 색맹이 또 다른 색맹을 향해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안달이다.


연인들은 자기만이 상대방을 속속들이 이해하려는
맹목적인 열기로 하여 오해의 안개 속을 헤매게 된다.
그러고 보면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상상의 날개에 편승한 찬란한 오해다.

"나는 당신을 죽도록 사랑합니다"라는 말의 정체는
"나는 당신을 죽도록 오해합니다" 일것이다.  
오해란 이해 이전의 상태 아닌가.
문제는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다.

실상實相은 언외言外에 있는 것이고
진리眞理는 누가 뭐라 하건 흔들리지 않는 법.

온전한 이해는 그 어떤 관념에서가 아니라
지혜의 눈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 이전에는 모두가 오해일 뿐.

 

 -법정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