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의 본질, 번뇌를 없애는 방법/달라이라마

2012. 12. 21. 13:2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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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의 본질, 번뇌를 없애는 방법/달라이라마

 

 

번뇌의 본질을 밝히고 번뇌를 없애는 방법을 설명하는 불교경전들이 많이 있습니다.

번뇌를 산스끄리뜨로는 끌레샤(klesa)라고 합니다.

번뇌가 일어나자 즉시 마음은 불안해지기 마련이기 때문에 마음에 고통이 생깁니다. 우

리가 행복해지고 고통에서 벗어나길 바란다고 말할 때는

대체로 우리 의식의 경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즉, 행복을 경험하고 고통을 경험하고 싶지 않은 소망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경험이란 것이 현상적으로 어떤 성질을 갖고 있나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의식이 겪는 경험을 크게 나누면 눈, 귀, 코, 혀, 신체와 관련된 감각적 경험과

마음 자체의 경험이라는 두 범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감각적 의식으로 신체적 통증을 느끼면

우리는 그것을 고통이라고 판단하며 고통을 경험하고,

신체적 만족감을 느끼면 그것을 행복이라고 판단하며 행복을 경험합니다.

이같이 우리의 감각적 의식은 우리에게 고통과 행복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적 의식의 차원에서는 행복과 불행을 훨씬 강렬하게 느낍니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우리의 불행과 고통은 대부분 우리 자신의 생각과

감정의 혼란 때문에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행과 고통은 번뇌의 결과입니다.

번뇌는 집착이나 탐욕, 혐오나 미움, 분노, 자만심, 질투 등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범위의 부정적인 마음 상태들을 말합니다.

이런 번뇌가 일어나면 우리 마음은 즉시 혼란스러워집니다.

불교 경전에서는 번뇌의 종류들을 여섯 가지 근본 번뇌라든지

스무 가지 파생적 번뇌 등 종류별로 나누고 있습니다.


우리의 경험들을 주의 깊게 관찰해보면 마음속의 번뇌들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겪은 일들은 생각하면서 ‘오늘 나는 아주 평화롭고 행복했다’라거나

‘오늘 나는 아주 불안하고 불행했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두 경우의 차이점은 앞의 경우에는 마음 상태가 번뇌가 마음을 지배하는 경우이겠지요.

실제로, 항상 우리 마음을 동요시키는 것은 마음의 번뇌들일 뿐인데

우리는 외부의 상황들이 우리 마음을 동요시킨다고 비난하기 쉽습니다.

 

불쾌한 사람을 만났다거나 역경에 처해서 우리가 불행해졌다고 상상하면서 말이지요.

8세기에 살던 인도의 불교학자 샨띠데와(Santideva)는 말하길, 진정으로 불교의 가르침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역경을 만나도 단호하고 나무처럼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역경을 만나는 것 자체가 우리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역경 속에서 우리 마음이 불행해지는 주요 원인은 길들여지지 않은 우리 마음이 번뇌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마음의 번뇌에게 지배당할지 모릅니다.

사실, 우리는 그 번뇌들을 품에 안고 강화시키기까지 합니다.

불처럼 화가 나는데 기름을 더 붓는 꼴이지요.

마음의 번뇌는 본래가 상대적이고 주관적입니다.

그것들은 절대적이거나 객관적인 근거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을 더 명확히 알기 위해서 우리가 특별히 싫어하고

불쾌하게 느끼는 음식의 예를 들어볼까요.

 

그 형상만 봐도 싫은 느낌이 들고,

마음에 혐오감이라는 번뇌가 일어날 정도의 음식이 있다고 칩시다.

객관적으로 자체로서 존재하는 실재에 근거를 두고 번뇌가 일어난 것이라면 우리가

그 음식에 대해서 느꼈던 혐오감이라는 특성을 그 음식 자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혐오감이라는 특성을 소유한 음식을 접하는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든

그 음식을 보면 혐오감을 느껴야 할겁니다.

즉 모든 사람이 그 음식을 보면 항상 우리랑 똑같이 혐오감과 구역질을 느껴야 할거란

말이지요.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은 생기지 않습니다.


어떤 문화권의 사람들이 맛있어 하는 음식을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은 불쾌하게 여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음식의 ‘맛에 길들여지는 것’은 전에는 싫어했던 어떤 것을

즐겁게 경험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불쾌함은 우리가 주관적으로 투사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불쾌함은 어느 대상이나 경험 속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다른 예를 봅시다.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고 언젠가는 죽을 겁니다.

늙음과 죽음이라는 현실은 우리가 존재하는 한 겪을 사실이고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특히 서양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늙음과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를 꺼려합니다.

어떤 사람이 늙었다는 사실은 알아보는 것조차 예의 없는 일이라고 여길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예를 들어 티베트 사회처럼 다른 문화권의 사회에서 늙음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관찰해보면, 동일한 현상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존경받아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이처럼 한 문화권의 관점에서는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것이

다른 문화권에서는 매우 긍정적으로 여겨집니다.

늙음이라는 현상 자체 속에 그런 관점의 생각들이 본래부터 갖춰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예들을 보면, 주어진 상황에 대해서 우리 자신의 태도와 지각에 따라

다르게 경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태도는 사고와 감정을 반영하고,

우리의 사고와 감정은 매혹과 혐오라는 두 가지 주요한 충동을 반영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이나 사람이나 사건에 대해서 불쾌하게 여긴다면

혐오감을 가지고 반응하고 그 대상을 피하려고 할겁니다.

 

이런 혐오감은 적개심이나 그와 연관된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토대가 됩니다.

그와 반대로, 우리가 어떤 사물이나 사람이나 사건에 대해서 유쾌하고 느낀다면,

그 대상에게 매혹되는 반응을 보이고 그것을 가지려고 애쓸 겁니다.

이런 매혹은 갈망과 집착이 일어나는 토대가 됩니다.

이렇게 매혹과 혐오감의 힘을 토대로 삼아 우리는 세상과 엮이게 됩니다.

 

지금 말한 것들을 생각해보면,

“오늘은 기분이 좋아”라든가 “오늘은 기분이 나빠”라고 말할 때

그런 느낌을 결정하는 것은 집착이나 혐오감 등의 감정이라는 요소가 명백해질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것에 대해서 유쾌하거나 불쾌하게 느끼는 것 자체가

번뇌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 매혹이나 혐오감의 특별한 성질을 분석해봐야 합니다.
모든 행동들은 몸이나 말이나 생각을 통해서 행해집니다.

즉,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우리가 말하거나 행동하거나 생각하는 것을 통해서

행해진다는 말이죠.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 행동을 불교도들은 업, 즉 까르마(karma)라고 부릅니다.

까르마는 산스끄리뜨로 ‘행동’을 뜻합니다. 모든 행동은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그것을 불교도들은 ‘원인과 결과의 법칙’ 즉, ‘인과법因果法’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부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결과[선업善業]를 가져올 행동을 하고

나쁜 결과[악업惡業]를 가져올 행동을 피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반사적용이나 생리작용 등과 같은 차원의 행동들은

의식적으로 전혀 조절할 수 없기 때문에 도덕적으로나 업에 있어서 중성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하는 의미 있는 행동들은 어떤 동기나 의도에서 나오기 때문에

유용한 것도 있고 파괴적인 것도 있습니다.

파괴적인 행동들은 혼란한 마음상태, 즉 번뇌가 지배하는 마음에 의해 유발됩니다.

인간 사회의 역사 전체를 통해, 파리를 죽이는 작은 살생의 행동으로부터

전쟁이라는 광대한 잔학행위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모든 파괴행위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이런 번뇌들, 즉 길들여지지 않은 마음 상태들입니다.

우리가 긴 안목으로 행동의 결과를 미리 보지 못하고, 짧은 안목으로

눈앞의 이익만을 위해서 행동할 때는 무지 자체도 번뇌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강한 욕망이나 강한 분노를 면밀히 조사해보면 그 감정들의 밑바닥에는

그 감정들의 대상에게 매달리고 있는 우리 자신이 있음을 알게 되지요.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 모든 감정의 밑바닥에는 ‘자아自我’라는 개념에 매달려 있는

우리 자신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아’나 다른 사람들에게 본래부터 내재하는 실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사람들이 객관적인 실재로서 자체적으로 존재한다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8세기의 인도 불교철학자인 짜드라끼르띠가 <중론주中論註>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자아’라는 것이 실재한다고 생각한 다음에 다른 사람들의 자아도 실재로서

존재한다고 확대해서 해석합니다.

우리는 우선 ‘나’라는 느낌을 가진 다음에, 어떤 것을 ‘나의 것’이라고 파악합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을 관찰해보면, 자아가 실재한다는 생각이 강할수록

그 생각은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감정을 더 강하게 만들어 낸다는 걸 알게 됩니다.

 

자아가 실재로 있다는 생각과 우리 마음속에 파괴적인 감정이 일어나는 것 사이에는

매우 긴밀한 인과관계가 있습니다.

이런 잘못된 믿음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는 한, 우리는 영원한 기쁨을 누릴 가능성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윤회 속에 갇혔다는 뜻입니다.

고통은 바로 무지의 노예가 된 존재를 가리킵니다.


많은 번뇌들이 있고, 그 번뇌들을 구분하는 방법들이 여럿 있지만, 집착과 분노와

어리석음 이것들을 마음의 세 가지 독[三毒]이라고 부를 때가 많습니다.

독이 몸에 해를 끼치고 신체적 고통을 가져오고 심지어 사람의 생명을 죽일 수도 있는

것처럼, 이 세 가지 번뇌도 역시 우리에게 심한 고통을 가져오고

죽음을 재촉할 수도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마음의 번뇌들은 우리 자신과 남들에게 고통을 가져올 뿐 아니라

우리가 행복을 얻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의 마음 상태들이야말로 우리의 진짜 적입니다.

이런 내부의 적들은 외부의 적으로부터는 우리를 숨길 기회라도 있지만,

마음의 번뇌는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우리 마음속에 생길 수 있습니다.

더구나, 내부의 적은 언제나 우리의 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내부의 적이 앞으로 언젠가 친구로 변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내부의 적으로부터 숨을 장소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내부의 적을 우리 편으로 만들 수도 없고, 내부의 적이 우리에게 공격을 멈출 리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