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레스님 중광의 자화상

2013. 1. 11. 11:0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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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레스님 중광의 자화상

 

                                                                                          김정휴 스님/글

                                                                    (전 불교신문사 편집국장/주필)

 

 

중광은 이제 고전적 달마(達磨)에서 벗어나 스스로 달마의 자체에 발길을 들여놓고 자신이 달마임을 실현하고 있다. 남이 볼 수 없는 예리한 칼을 들고 인간 원형(原形)을 찾아내고 나아가 불필요한 살점을 깎으며, 또 하나의 인간 최선을 만들고 있다.

1981년 겨울 어느 날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돌아와 첫 전시회를 위해 작품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마치 코미디언의 연기를 보듯이 익살스런 표정과 근엄한 모습이 이상하게도 웃음을 자아내게 하였고, 옷차림 자체는 그의 표현대로 걸레였다.

철저한 무소유 정신과 걸사의식(乞士意識)이 그의 몸에 머물렀고, 모든 사물과 서슴없이 몸을 섞는 무애(無碍)는 남이 흉내를 낼 수 없을 만큼 완벽했다.

나는 그가 감로암에 있다는 말을 듣고 오랜만에 중광의 얼굴을 대하고 싶어 그의 방에 들어섰다. 화가의 방치고는 너무 초라하고 무질서가 눈앞에 전개되었다. 아무것도 변화가 없었다. 다만 그의 몸에서 서구적 체취와 행동이 나타나고 있는 것만이 변화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입은 아궁이마냥 연기가 그치지 않고 흘러나왔다. 줄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이 자기를 태워 연기를 만들고 있는 것과 같았다. 스스로 자기를 태우는 연소작업 ―그것은 중광에게서 특별히 볼 수 있는 소멸(燒滅)의 미학(美學)이었고 자신이 만든 허무(虛無)였다.

그는 자기에게 알맞은 공간을 만들어 출입을 자재하고 있는 것이 돋보였다. 그는 내면에 뿌리 깊이 내려 있는 고독을 숨기지 않고 스스로 끄집어 내놓고 자기와 대좌를 하고 있는 절망이 보였다.

소주병은 벌써 다섯 개가 비어 있었다. 뼛속의 비좁은 골목을 따라 순백의 소주가 몸 전체에 퍼지면 그는 걸치고 있던 옷을 벗어 던지고 나인(裸人)이 되었다. 중광만이 가지고 있는 광기(狂氣)가 작동을 한 것이다. 그러나 소주는 그에게 있어 주식이었다. 취하지 않고는 그의 예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지도 않고 마셔요?

나는 힐난하듯 그의 면전에 뜨거운 입김을 퍼부었다.

잤는지 안 잤는지 잘 모르겠어. 그것은 나에게 상관없어.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의 생활 테두리를 벗어나 있음을 암시했다. 그래서 자는 것 자체가 그렇게 문제가 되질 않았다. 무애(無碍)스런 삶이 생활화 되어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림은 그리지 않고?

많이 그렸어. 수십 마리의 닭을 시집보냈어. 그리고 내가 주례를 섰지.

그는 자기가 그린 닭을 시집보냈다는 말로 대변했다. 특히 중광은 그림에 있어 닭의 형태는 동물적 에로의 차원을 넘어 신비감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두 마리의 닭이 자웅을 이루고, 또 두 다리는 손발이 되어 서로의 유방을 아주 소중하게 애무한다. 그러니까 닭의 동물적 애정이 중광의 자성(自性)의 영토에 들어와 자비(慈悲)로 승화되어 동체대비의 언어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또 어떤 때는 닭이 여러 개의 성기(性器)를 달고 만물과 애정의 교섭을 벌인다. 이것이 중광의 예술정신이고 선기(禪機)라고 할 수 있다.

벌써 한 병의 소주가 없어지고 있었다. 여섯 병을 마시고도 그의 고통은 술로 인해 중절되지 않고 있어 오히려 보는 이로 하여금 딱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중광은 지치지 않고 오히려 이상한 광택을 발휘했다. 눈빛은 서서히 구름이 걷히고 있는 하늘빛 같이 맑아졌다. 소주는 그의 체내에 들어가 불순한 피를 맑게 하고 광기(狂氣)를 점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림의 소재가 많이 변했네요?

변한 것 없어. 다만 우리가 집에서 키우는 동물들에게 인간과 같은 진실한 애정이 있음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야.

그의 그림은 중광 자신의 말대로 동물들의 애정을 진실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 가기 전에 볼 수 있었던 거친 그림들이 미의식(美意識)을 동반하고 있어 놀라운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연꽃은 색채의 조화는 물론이고 인간의 심장에서 타고 있는 더운 피를 뽑아 물감을 만들어 사용한 것 같이 정열과 환희가 넘쳐흘렀다.

미국 이야기 좀 해요.

이야기가 계속되지 않고 자꾸 단절되었다. 그것이 나에게 커다란 불만으로 작용되었다. 특히 그의 입심은 소문나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익살스런 풍물이 중광의 입을 통해 재창조되어 나올 것이라는 나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자, 이것을 보면 미국의 행적을 볼 수 있을 거야.

중광은 신문 뭉치를 내놓았다. 자신의 미국 활동이 적나라하게 소개된 영문 신문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돌아오면서 아무것도 가져 오지를 않았다. 그러니까 그 흔한 볼펜 한 자루도 가져 오지 않고, 자신이 소개된 신문만을 가지고 돌아온 것이다.

이렇게 그의 생활은 검소하고 청빈했다. 그러나 한쪽으로는 남이 이룰 수 없는 풍요로운 삶이 있었다. 비록 신문만을 가져 온 자체를 두고 볼 때 그것은 휴지조각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면에는 중광의 정신적 삶이 축적되어 있고, 그것이 언어로서 입증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조영희는 어떻게 하고?조영희는 중광에게 있어 애인이고 동시대 예술인이고 화가이다. 그녀가 미대에서 그림을 전공하고 자기 나름대로 새로운 화풍을 개척하고 있을 때 조영희는 언니 소개로 중광을 만났다. 그리고 중광의 자성의 영토에 흡입되어 혼연일체가 되어버렸다.

그림 공부를 처음부터 다시 해야 되겠어요. 스님 그림은 그대로가 생명이에요. 특히 우리네 동양화는 죽어 있어요. 그것은 사진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어요.

조영희는 중광이 낙서를 해 꾸겨서 버린 그림들을 하나하나 모아서 집으로 가져가 오랫동안 관찰하면서 중광의 정신적 일부가 되었다. 그래서 중광은 조영희에게 보다 많은 애정을 주었고, 그녀가 훌륭한 화가가 되도록 모든 것을 알선하고 도와주었다. 그런데 중광은 조영희를 미국에 홀로 두고 자신만 귀국해 첫 전시회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중광과 필자가 「걸레 重光」을 쓰기 위해 청암사에 가 있을 때였다. 그는 소주를 마시고 취해 문득 조영희를 떠올렸다. 참으로 볼 수 없었던 중광의 센티멘탈이 얼굴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지그시 눈을 감고 깊은 명상 속으로 빠져드는 사람처럼 있다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재입산’이라는 시를 외우기 시작했다.

추방되었던 방안의 침묵이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와 몸을 맞추고 엄숙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지금쯤 황소타고 고향에 가면

마을 장아찌 까맣게 익어

먹음직할 게다

보리밥에 파리 날리며

밥 먹던 어린시절

삼삼히 눈 속에서

눈물이 열리고 있다

이제는 고향가면 꼭 돌담 초가집

묻어 놓고

눈꼽 낀 못난 아낙네에게

장가를 들어서

머리를 맞대어 눈물을 서로 닦아주며

고구마 구워서 재털며 먹듯이

이 세상을 살다가

나는 얄라리야

나는 얄라리야

나는 얄라리야

 

영희가 보고 싶어 죽겠다. 영희가 보고 싶어 울먹였다. 그의 눈가에 수정 같은 맑은 눈물이 고여 있었다. 처음으로 보는 중광의 눈물이었고 순진이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볼 수 없는 단절에서 오는 그리움이었고 통곡이었다.

보고 싶으면 오라고 편지해요. 전화를 하든지.

아니야, 서로 만나지 않기로 했어. 이렇게 떨어져 있으니까 그리운 게야. 같이 있으면 이런 애절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아.

그는 체념 같은 소리를 하면서도 모든 것에 달관해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 그리움도 만들 줄 알았고, 애정의 소중함을 다른 형태로 표현할 줄도 알았다. 그러나 중광은 빨리 조영희를 잊어버리고 작품에 몰두했다. 그리움을 표현하는 새로운 언어를 찾아 헤맸다.

나는 술 취한 상태의 중광을 두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와 같이 있다는 것이 커다란 고통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지닌 인내력으로 중광이 만들어 낸 고통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떠돌아다니는 의미 없는 유배인마냥 청암사 극락전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것은 나도 중광처럼 소중한 애정과 그리움을 지니고 있는가? 자신에게 반문했다. 해답이 아니다 라는 반대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방안으로 들어섰다. 무덤 같은 적막이 깊이 고여 있었다. 한 사람도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 방안은 썰렁했다. 참으로 이름 지을 수 없는 상념들이 마음속에 톱밥처럼 쌓였다. 살아있다는 것이 갑자기 죄스러웠다. 무엇인가 쓰려고 해도 마음이 잡히질 않았다. 무료한 권태와 고뇌가 깊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쳇바퀴를 돌듯 아무 이유없이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중광을 범종사에서 만났다. 그는 취하지 않았었다. 맑은 목소리가 목전에 떨어졌다.

정휴스님, 어문각 편집장 좀 만나요.

왜요?

저에 대한 원고를 문기자한테 부탁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입니다.

나는 며칠 후 조계사 근처 다방에서 심모라는 편집장을 만났다. 그의 이야기는 결론적으로 원고를 다시 나에게 부탁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해 보겠노라고 대답을 해버렸다. 그런데 뒤에 밝혀진 이야기지만 중광에 대한 원고는 정휴스님이 써야만 된다는 구상 선생님의 의견 때문임이 드러났다.

거기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중광이 지닌 작품의 세계를 미화시켜 보자는 데에도 이유가 있었지만 그보다는 중광의 예술세계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평가하는 데는 속인보다는 승려가 더 낫다는 편견 때문이었다.

나는 편집장이 건네준 자료를 안고 극락전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자료를 하나하나 읽으며 정리했다. 중광의 기행과 그리고 자작시 200여 편이 넘는 원고와 일화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자료를 읽고 나서 고민했다. 이것은 솔직한 고민이다. 첫째, 이것을 작품으로 구성하는 데 많은 문제점이 있었고 둘째, 내 자신이 미술 이론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원고를 쓸 자신이 없었다. 자료를 다시 넘겨주고 싶었다. 왜 이렇게 나 자신이 무모한 짓만 골라서 하게 되는가 원망 같은 울분이 일고 있었다. 그러나 권태를 이기고 무료함을 극복하는 일은 원고지 행간이라도 메꾸는 일이라고 자신을 달랬다. 그리고 이것을 나 자신이 못해내면 누가 하겠는가? 스스로 자만과 오기를 자신 속에 불어넣었다.

나는 내 자신이 만든 오기에 끌려 「걸레 重光」을 쓰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미술에 관한 서적을 30권쯤 사가지고 탐독을 시작했다. 특히 피카소에 대한 생애와 사상, 작품 해설을 읽어가며 중광과 대비를 시켜 보았다.

참으로 아직 대하지 못했던 새로운 지평이 가슴 속에 열리는 것 같았고, 빈센트 반고호와 폴 고갱의 생애를 읽으며 나는 중광을 다른 차원에서 볼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고호의 일화 중 자화상을 그리다가 자기 귀를 잘라 그것을 신문에 싸가고 고갱을 찾아가 소리치던 예술적 광기를 발견하고 나서 내 나름대로 어떤 충격과 환희가 교차했다. 왜냐하면 중국의 선종 정신이 묘하게도 서구적으로 전이되어 이런 광기를 만들고, 또 그것이 예술의 모체가 되고 있음을 내 스스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특히 운문(雲門)과 같은 선사(禪師)는 자기가 믿는 교조를 마구잡이로 매도하는가 하면 처형하는 만용까지 내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내 앞에 세존이 다시 나타나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을 외친다면 몽둥이로 후려 갈겨 주린 개에게 주어서 천하를 태평케 하겠다.

또, 그는 어느 날 나무로 만든 사자 입에 손을 넣고 물려 죽겠어요. 살려줘요 하고 소리를 쳤다는 일화 역시 하나의 광태라 할 수 있다. 본질 회귀의 절규이고 자기 실상을 확인하는 인간 탐구의 정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세존을 몽둥이로 쳐 주린 개에게 주겠다는 그의 선언 속에는 세존 자신 역시 인간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 탐구와 아울러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정신을 적나라하게 내보이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나 살불살조(殺佛殺祖)가 관념적 부처나 조사를 죽이는 행위가 아닌 참으로 진실한 자기 부처를 파악하는 행위로 알지 못한 사람에게는 광태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이런 선종 광기가 고갱이나 고호 등에서 발견되고 있어 나는 새로운 각오로 「걸레 重光」을 쓰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또 하나 중광이 지닌 걸레의식, 즉 가난과 고독이 먼저 살다간 예술인들에게 있음을 파악하고 그들과 중광은 이상한 동질성(同質性)을 지니고 있음을 파악했다. 그리고 중광은 그들의 고통을 훔쳐와 혼자서 소유하는 여유가 있었다.

 

 

중광과 피카소의 만남

 

중광의 그림에 자신이 체험한 자전적 요소가 하나의 발상이 되고 있다는 것은 피카소와 우연히 일치하고 있다. 장미빛 시대와 청색시대, 그리고 세 여인의 등장으로 변화된 피카소의 그림에 자전적 요소가 짙게 깔려 있듯이 중광의 그림에도 이런 동질성이 있다. 왜냐하면 그림 속에 나타난 에로티시즘 분위기가 그렇고, 화면 속에 지나친 해학성을 요구하고 있는 것도 그가 체험한 행위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중광이 처음부터 괴이한 발상과 선종의 격외도리(格外道理)를 도입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초기의 작품들은 전통적 달마의 형태에 머무르고 있다. 다만 이때는 인물화가 지니는 특성을 추구하는 작업만 열중하였을 뿐이다.

이런 전통적 실험을 거치고 난후 그에게 변동의 시기가 온 것이다. 그러니까 달마를 역사적 존재로만 파악한 것이 아니라 달마가 지니고 있는 원래의 뜻을 재현시키려고 개안(開眼)한 것이다.

달마란 법을 의미한다. 하나의 대상, 사물, 실재, 그리고 우주의 총체적 진리를 뜻한다. 모든 사물이 간직하고 있는 참다운 진리, 즉 진여를 말하는 것이고 우주의 생명체가 바로 달마이다.

중광은 초기의 역사적 달마의 형태에 머물러 있다가 서서히 거기서 탈피하여 우주의 생명체를 자기 나름대로 형상화한 것이다. 참으로 어려운 실험을 그가 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큐비니즘의 피카소와 브락크가 도달한 대상 분석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래서 두 사람은 그림을 통해 만나고 있었다. 다만 소재가 다르고 화풍이 다를 뿐, 정신적 공간 속에서 두 사람은 숙명적으로 해후하고 있다.

선(線)과 형(形)과 색(色)의 통일, 이것은 자신의 유기적 조직, 통일된 양식을 처음으로 자기 그림에서 실험한 것이다. 그리고 닭, 개, 오리, 말, 소 등의 일체 동물과 사물을 자신의 영토에 흡수하여 진여와 결합시킴으로서 새로운 형상을 만들고 자기화 하고 있음은 중광 예술에 있어 새로운 조형언어가 아닐 수 없다.

또 이것은 선종의 살불살조(殺佛殺祖)의 정신을 도입하여 자기 나름대로 실험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고, 천부적으로 갖고 있는 광기와 조절, 그리고 절규를 형상화 하여 때로는 외설적인 도취의 세계로 줄달음치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가장 신비함을 우리 앞에 드러내 놓기도 한다. 그래서 그의 예술 속에는 야성과 미개(未開)가 분노처럼 끓기도 하고, 때로는 달마를 추상(抽象)하고 또 때로는 먹물로만 그리던 달마를 색조분할(色調分割)로서 형태를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중광의 예술세계를 추적하고 표현하기 위해 나는 몹시 고민하고 새로운 절망을 배우기도 했다. 특히 그가 술안주처럼 내뱉은 여자, 그리고 말과 돼지, 개, 닭 등의 여러 동물과 애정행각을 했다는 진술때문에 이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하고 고민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 참으로 무서운 화해정신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그에게 있어 동물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해체된 사물로 등장되어 자유스런 자상의 영토에 흡수되어 하나의 세계가 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중광은 삶의 형태적 차별 속에서 만물이 평등함을 추구하는 걸인인 동시에 만법귀일(萬法歸一)의 공간 속에 모든 동물들의 애정을 수렴하는 대승적 화해의 선지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애정이란 인간에게만 소중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동물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일체 만물과 하나가 되는 제일의적 과제는 자비의 교섭이 있을 때 가능하다. 차별적 관념을 가지고는 일체를 이룰 수 없다. 남녀가 한 몸이 되는 것도 애정 때문이다.

신라의 혜통(惠通)은 출가 전 친구들과 어울려 수달피 한 마리를 잡아 술안주를 한 사실이 있었다. 한 생명을 잡아먹은 것이다. 수달피의 털을 벗기고 살을 털어내어 뼈대만 남게 했다. 그리고 술이 깬 다음날 아침에 혜통은 주위를 살폈다. 뼈대만 남아 있어야 할 수달피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눈앞에 핏자국이 보였다. 그는 핏자국을 따라 한참동안 걸었다. 동굴 하나가 눈앞에 다가섰다. 그 안에 털이 뽑히고 살점이 달아난 뼈대만 남은 수달피가 어린 새끼를 안고 있었다. 무서운 소름이 끼쳤다. 그리고 생명이란 사람에게 있어 고귀한 것이 아니라 짐승도 마찬가지란 것을 깊이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어린 새끼를 보호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짐승이 인간보다 절실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중광은 이러한 만물이 지닌 생명의 의지와 애정을 같이 체득하고 있었다. 변태적 성희를 즐기려는 데에서 이루어진 애정행각이 아니라 짐승과 하나가 되려는 자비의 실험을 하고 있음을 천천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도의적 책임이 없는 것도 아니다. 구도자로서 품위를 엄격한 계율정신을 잃어버린 데에서는 질타와 시비는 면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중광이 지닌 실상과 면목을 파악하지 못하고 심한 욕설과 질타를 퍼붓는다.

그가 인간만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짐승에게까지도 자비를 희사하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알지 못하고 남을 매도하는 것은 커다란 허물과 죄악을 낳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허물은 우리들 사문 스스로 파계(破戒)를 자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범이 된 파계는 묵인되는 아량이 있다.

십계(十戒) 중 금은보화를 몸에 지니지 말라는 계율이 있는 데에도 그 수칙을 무시해버리고 속인들이 놀랄 호화판 고급시계를 구도자가 많이 차고 있는데 누구 한 사람 이것을 파계행위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두가 공범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광에게는 이런 위선(僞善)이 없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있는 위선을 스스로 칼질을 하여 처참할 정도로 도려낸다. 그만큼 진실해지려는 인간탐구의 정신이 그에게는 뜨겁다.

나는 그가 말한 애정행각, 즉 다시 말해 동물의 교접을 쓰기 위해 고민을 하다가 대구 달성공원으로 달려가 동물 사육사를 만나 보았다. 그러나 필자의 얼굴은 뜨거웠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사문이었기 때문에 동물들의 애정 모습을 묻는다는 것이 낯간지러운 일이 분명했다.

비록 글을 쓴다는 것을 전제는 했지만 하필이면 모든 신도들이 보고 감동할 글을 쓰지 못하고 외설적 분위기를 스스로 찾고 묻는 것이 죄스러웠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외설적인 것을 쓰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비가 모든 만물에 있어 어떻게 본질적으로 평등하게 존재하는가를 알기 위해서였다.

이 부분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 구차한 변명을 하지 않겠다. 사실 이제 지난 이야기지만 「걸레 重光」이란 책이 출판되고 나서 나는 참으로 곤욕스런 일을 많이 당해야 했다. 첫째 책 광고에 실려 나간 광고 문안과 신문에 실린 광고 문안이 독자를 자극할만 했고, 불교를 아끼는 사람들이 보아도 분노를 일으킬만 했다.

돼지 음부가 예뻐요.

첫째 이 대목이 많은 사람들에게 자극을 준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사육사를 만나보고 중광의 진술이 거짓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동물들의 성희가 인간과 비교해서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오리의 경우는 닭보다 긴 시간을 유지하면서 암놈과 수놈이 서로 만나 머리를 올렸다 내렸다 하며 수작을 거는데 이 판토마임을 보고 있노라면 오히려 인간 쪽이 부끄럽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애정을 교환하고 수놈은 암놈의 목덜미를 물고 그 등에 올라가 노끈을 꼰 듯한 페니스를 돌출시키고 성급한 도킹을 감행한다는 사육사 말에 나는 신분을 잊어버리고 웃고 말았다.

동물과 인간에게 자비와 애정을 실험하는 중광의 광태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또 한번 알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래서 지금 그는 고양이를 키우면서 그 고양이를 보험에 넣어주고 이제는 아예 방에다 개장을 만들어 놓고 키우고 있다.

개는 중광에게 있어 유일한 가족이다. 다만 중광의 지나친 자비의 만행이 물의를 일으켜서 문제일 뿐이다. 그는 미국에서 돌아오고 난 후 그림이 참으로 많이 좋아졌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그러니까 이 시대의 예술가 위상에 발길을 들여놓고 동서양의 주목을 받았다.

예술적 찬사로 인해 그는 치탈도첩의 중죄에서 다시 공권정지 5년이란 감형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평소 친하던 봉주, 명환 두 스님의 배려도 있었지만, 실제 중광은 그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을 했고, 별로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감형된 사실을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타의에 의해 이루어진 행운도 그의 만행에서 무산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어느 날 주간경향 기자에게 나는 고양이가 좋아요 란 말을 한 후 고양이 음부를 만지작거리면서 거기서 나온 배설물을 서슴없이 손가락에 묻혀 빨았다는 이야기가 전달되면서 공권정지 5년은 다시 치탈도첩의 중죄로 바뀌고 말았다. 이 모두 중광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의 삶은 무유정법의 삶이다.

그는 정해진 질서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행하고 생활하는 것이 중광에게는 법이고 질서였다. 오히려 그를 제도적 틀 속에 몰아넣으면 부작용이 생긴다. 그것은 날아다니는 새를 새장 속에 가두어 놓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의 무애는 남이 흉내낼 수 없고, 그 맥은 원효와 대안에 가 닿아 있다. 그리고 무애 속에 중광 자신이 만든 진실과 자비, 또 애정이 박혀 있었다.

 

 

광기가 만든 무애

 

중광은 스스로 삶을 만들며 사는 예술인이다. 오늘날 화가들처럼 한 사물을 오랫동안 스케치(에스키스)하지 않는다. 또 서로가 야합하여 대가(大家)로 승격시켜 놓고 그림 한 호당 몇십만원 한다고 자만을 부리지도 않고, 사진 같은 그림들을 남발하여 몇 백만원씩 받지도 않는다.

서울 인사동에 즐비하게 서 있는 화랑가에 가보면 참으로 실망과 절망을 한꺼번에 배울 이야기들이 많다. 사진보다 못한 동양화, 그것은 한판에서 찍어내는 것과 똑같은 그림을 대가의 것이라고 몇 백만원씩 거래하고 있는가 하면 가짜까지 등장하여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있는 실정이다.

모 화가의 그림 전지는 일천만원을 넘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그림 속에는 생명이 없고, 테크닉만 초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랭카스터 교수는 중광의 그림을 보고 한국의 피카소요, 그리고 당신의 그림은 피카소보다 낫소하고 탄성을 질렀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림 속에 달마의 선종 정신과 아울러 생명이 넘치고 있기 때문이다.

화가에게 그림은 훗날 역사적 삶이 된다. 그리고 화가가 만든 조형언어(造形言語)는 화가 자신의 역사가 될 것이다. 또한 중광이 창조해낸 조형언어는 법어(法語)가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주위에 있는 수행인들은 창조 정신이 없는 것 같다. 표절과 모방만이 난무하고 있는 것 같다. 수행인이 역사 속에 남는 일은 형식적 계(戒)를 잘 지키는데 있는 것도 아니며 불공을 잘하고 미꾸라지, 자라 등을 살려 주는 방생불사를 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다. 첫째 치열한 견성실험 속에서 자기를 확인하고 성취한 오도적 삶을 언어로 형상화 시켜 남겨 놓는 일이다.

만해 한용운은 「경허법어집」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일이 있다.

조사(祖師)가 입적하고 나면 허물은 없어지고 법어만 남는다 ― 비록 경허선사를 두고 한 말이지만 수행인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경허선사는 근대 선종(禪宗)의 중흥조의 위업을 달성시킨 장본인이지만 계율적 측면에서 많은 문제를 남긴 선사(禪師)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허물은 오히려 이 시대에 와서 일화로 미화되어 많은 사람의 입을 통해 회자되고 있고, 그의 무애정신을 흉내내는 사람까지 등장할 정도이다.

특히 근대 불교사에 있어 만해 한용운(韓龍雲)은 다른 사람에 비해 참으로 많은 각광을 받고 있다. 그 당시 불교계에 있어 그는 소외자였고 말썽꾸러기였다. 거기에다 불교 계획을 빙자하여 비구승들까지도 결혼을 해야 한다고 건백서까지 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항일운동이나 민족사상은 오늘에 있어 커다란 사상이 되었고, 귀감이 되고 있으며, 그의 문학적 업적은 오늘에 이르러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화려한 조명을 받고 있다.

만해에 대한 뜨거운 상환(償還)이 오늘 문학인들에 의해 다투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 역시 만해가 남긴 독창적인 역사의 삶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삶이 없었다면 만해는 역사의 행간에 묻혀 없어지고 소멸되었을 것이다. 원효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훌륭한 사상이나 저서가 없었다면 원효의 위대함은 야사(野史)쪽이 되었을는지 모른다.

나는 이러한 역사적 삶을 만날 때마다 현존 고승들의 정신적 작업이 왜 활자화 되지 않고 있는지 의문이 갈 때가 더 많다. 물론 법어집이라 나오고 있지만 그 속에는 조사어록을 읽다가 귀중한 내용을 훔쳐 놓은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몇해 전 종정이신 성철 큰스님께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고 법어를 했을 때 개인적으로 실망을 했던 일이 있다.

왜냐하면 山山水水는 1200년 전 중국 야생선사 뿐만 아니라 그 밖의 선사들이 했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의 법어를 인용할 때는 분명히 누구의 법어라고 밝힐 필요가 있다. 대학 논문을 쓸 때도 다른 사람의 논문 구절을 인용할 때는 어느 책, 어느 구절에서 인용했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후 산은 산, 물은 물이란 법어를 말하는 모든 사람들이 종정 큰스님의 독창적 법어라고 착각들을 하고 있어 아연실색을 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나치게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사상에 얽매어 창작 정신을 외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역사 속에서 지워버리는 행위에 불과함을 알았으면 한다.

이제 무엇이 수행인에게, 그리고 구도자에게 위대한 삶이 되는가를 말했다. 이런 차원에서 중광은 위대하다. 그는 수많은 조형을 통해 견성의 지평을 넓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역사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중광을 애도하고 욕설을 퍼붓는 그들은 망각에 묻히고 말지라도 중광의 예술은 진여법신이 되어 불생불멸(不生不滅)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남긴 숱한 일화들은 날이 갈수록 미화되어 그리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나는 「걸레 重光」을 탈고하고 나서 그 원고를 불태우고 싶었다. 남의 평전이나 쓰고 있는 자신이 초라해 보였고, 원고지 행간을 메꾸기 위해 몇 달 밤을 뜬 눈으로 새우며 쓴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이 나와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지만 책도 읽어 보지 않은 무식한 독자들이 광고 문안만 보고 외설이라고 단정하는 오만을 부리는 바람에 그들의 면전에 중광이 그린 성기 하나를 선물하고 싶기도 했다.

또 거기다가 어떤 독자는 50장이 넘는 원고 속에 찬사와 비난, 그리고 욕지거리를 써가지고 종단 각계에 투서를 했을 때 무지와 횡포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배우기도 했다.

또 영화 계약을 할 무렵 까다로운 절차도 중요하지만 왜 그리 요구사항이 많은지 실망을 금치 못했다. 수많은 요구사항 때문에 영화사는 지금까지 촬영을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러나 중광은 그 사이에 변모하고 발전하고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은 아무 이유없이 즐겨 마시던 술과 담배를 끊어버리고 무애자유(無碍自由)한 정신만 가지고 행동했다.

암컷을 찾아다니는 욕망도 방하착해 버렸고, 뿐만 아니라 술을 권하고 담배를 권하는 사람들에게 할 줄 알면 끊을 줄도 알아야 한다고 피식 웃으며 위기를 모면했다.

일상인으로 할 수 없는 불가능을 그는 혼자서 해내고 있었다. 이제 중광은 제기의 예술세계(藝術世界)를 간파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유명한 화가 이중섭 옆에 구 상(具常) 시인이 있듯이 중광 옆에 오현과 향봉, 그리고 필자가 있다. 우리는 중광의 예술세계에 스스로 동참자가 되어 그를 옹호하고 작품 세계를 추적했다. 그래서 네 사람은 항상 부담없이 만나면서 고통을 조금씩 조금씩 나누어 가졌다. 특히 중광과 향봉은 야성적 분노와 격외도리를 정답게 나눈다.

두 사람은 어느 날 바람같이 만나 바람 같은 언어(言語)의 강물을 만든 일이 있다.

스님은 군대에 있을 때 그리고 지금까지 여자 관계가 많다는데 죄스럽게 생각진 않습니까?

죄는 무슨 죄가 있어. 여자에게 잘해준 죄뿐이 없어. 군대는 진해 해병대 경리과에 있었는데 그때 돈 구경을 좀 했지. 또 여자를 어떻게 하면 즐겁게 해줄 수 있을까 하고 많은 연구를 했어. 향봉이도 여자 공부를 좀 해. 여자에게 절망을 배우고 고통을 배워야만 진실한 도인이 될 수 있어. 그래서 나는 여자를 하나의 학교라고 생각을 하지.

스님, 언제 열반하렵니까?

X같은 것 나는 열반 싫어해.

중광스님! 열반 전에 열반송 남기렵니까?

제기랄 X같은 소리 다 듣겠네. 살다가 숨 떨어지면 가는 것이지 웬 잔소리가 그리 많아. 죽을 때 오줌 똥이나 편안히 잘 싸면 그만이지 열반송은 웬 열반송이야.

스님 죽으면 사리가 나올까요? 별거 다 묻네. 향봉 등쌀에는 못견디겠어. 나는 여자 공주님들께 정열을 골고루 배급해 주었기 때문에 사리가 나올 턱이 있나. 나온다면 음사리나 나올 것이야. 전복 속에는 진주알을 캘 수 있어 돈이나 벌수 있지만 중에게서 나온 사리를 무엇에 쓸려고...

돼지도 죽으면 사리가 나온다는데 스님은 사리가 안 나올 모양이네요. 그러면 도인은 아니고 큰 땡초는 되겠네요?

도인 좋아하네. 나는 일찌감치 돼지 족발하고 바꾸어치기 해먹었으니까 도인이나 사리에 대해 묻질 마. 네가 똑똑한 것처럼 말끝마다 열반 아니면 사리, 사리 아니면 도인, 열반송 하는데 사실 불교에서 이 술어 때문에 불교가 좀 썩고 인간의 순수한 모습을 볼 수 없게 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해. 사리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사리가 나오면 도인이 되는가. 도(道)가 사리 속에서 잠자고 있다더냐. 아니면 도가 사리 속에서 나온다더냐. 사리 나온 돼지 보고 도인돼지라고 하면 되겠네. 사리가 별게 아니야, 사리에 집착하지 말아야 돼. 중들이 죽은 송장까지 팔아먹으려고 사리 사리하지.

계율을 파계한 사실에 대해 참회할 생각은 있어요?

하하하, 이제는 계율 이야기를 하는군. 향봉은 계를 파해 보았나? 계를 파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파계의 도리를 알 수가 있겠어. 그리고 참다운 계는 계를 깨닫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해. 또 계는 입으로 노래를 한다고 지켜지는 것도 아니야. 계는 생활의 체험 속에서 그 정신이 실현되어야 해. 그래서 나는 계를 파하고 또 계를 지키고 나아가서 계를 떠나 생활을 하고 있지. 자세

히 깨달아 봐. 내 생활이 그대로 계이고, 계가 그대로 생활이 되고 있음을 볼 것이야. 이런 것도 별게 아니야. 참으로 깨친 사람이 우리 주위에 없어. 그것이 아쉽고 아쉬워. 깨친 사람이 있다면 살아있는 목소리가 나올 것이고, 또 살아있는 목소리는 모든 중생의 가슴에 가 닿아 빛이 될 것인데... 그리고 세존이 여어자(如語者)라면 이 시대를 위해 하고 싶은 진어(眞語)를 못하고 있어. 이것은 자기 세계가 없어 그래. 고양이란 놈은 철저히 자기 세계를 갖고 야성을 마음껏 부리고 있질 않아.

 

어느 날 중광은 향봉이가 있는 사무실에서 나와 오현을 불렀다. 그리고 자신이 새롭게 발견한 소재로 그림을 그려 주면서 곧 미국에 갈 것이야 하고 그동안 만날 수 없음을 아쉬워했다. 그는 생존 화가로서 처음으로 미국에 있는 록펠러 재단 아시아소사이어티 갤러리 디랙트 초청으로 그림 전시회를 갖는다.

이것은 우리 화단(畵壇)의 경사이며 불교계 자랑이다. 이 전시회를 끝내고 몇 군데 들려 크고 작은 전시회를 해주고 아프리카를 여행한다고 했다. 원시의 밀림, 그리고 평소 사랑했던 이름 모를 동물들에게 동양의 자비를 심어 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떠난다는 기쁨보다 속으로 울고 있는 것이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을 밖으로 나타내질 않았지만 그것은 중광에게 있어 순수한 고통이었다.

스님이에요? 효자입니다.

밥 먹었어?

하고 그 쪽에서 물으면,

스님하고 같이 해야지요

하면서 감로암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중광을 아는 사람들은 목격을 했을 것이다. 바로 중광이 어머님처럼 모시고 있는 혜련스님이시다.

두 사람은 비록 혈육은 아니지만 이제 떨어질 수 없는 모자관계를 이루면서 아승지겁을 살고 있다. 그리고 불교의 자비와 기독교의 사랑을 섞어서 만든 구상 선생의 뜨거운 애정을 가지고 아프리카로 8월이면 떠나갈 것이다. 이제 그의 그림을 보고 비웃던 사람들도 오히려 그의 그림 앞에 감동을 하면서 교화를 받고 있다.

어느 날 필자가 중광스님 앞에서 구상 선생님이야말로 선지식이라고 말했을 때 그럼, 잘 봤어. 선지식도 그런 선지식이 없지하고 동조한 것을 보고 두 사람의 인연도 참으로 숙명적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 역시 애정이 만든 결과이다.

얼마 전 천주교의 김수환 추기경이 경주 석굴암 불상 앞에서 두 시간 동안 앉아서 불상의 자비와 인자함에 일어서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감동적이었듯이 구상 선생과 중광의 애정도 감동적이다.

두 사람은 한 시대의 삶과 고뇌를 가지고 서로가 지닌 가난한 지평을 양보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미국을 가면서 사랑했던 조영희 이야기를 끄집어내질 않았다. 그렇다고 물어 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마도 바람처럼 가 만나고 바람기가 만든 별리(別離)만을 심어주고 올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에게 소중한 것은 애정이다. 이 애정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나는 경봉선사의 장례식과 탄허스님의 영결식에서 보았다.

두 선사의 영전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혈육들이었다.

그곳에 참석한 승려들은 모두 요식행위의 조상(弔喪)과 슬픔을 갖고 있었으나 그들만큼은 가슴에서 일어난 슬픔으로 통곡했다. 그래서 중광의 효성은 혈육과 관계가 아닌 혜련스님을 어머니로 모시고 있는 데에서 더 돋보인다. 그리고 감로암에 갈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그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있으면서 너무나 많은 것을 정신적으로 소유하고 있어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

중광이 거처하는 방은 참으로 초라하다. 장식이 없고 수식이 없다. 그림을 그리다가 버린 파지와 낙서들이 쌓여 있을 뿐, 그밖에 소중한 물건이 하나도 없다. 또 자신이 입고 다니는 옷도 걸레를 했으면 적당할 지경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고집스러울만한 불구부정이 있고, 광활한 진여 공간이 있다. 이러한 무소유 생각 때문에 오현과 나는 당황할 때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 마음속에는 소유의 공간이 더러울 정도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벽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고, 그 중에 무언(無言)의 항의가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감찰원에서 조사한 내용을 토대로 선고한 치탈도첩을 내린 판결문 내용을 그대로 붙여 놓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행위는 중광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치부를 다른 사람에게 노출시키는 것을 싫어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중광은 그 판결 내용에 가부의 자기 뜻을 표현하지 않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보고 나름대로 판결해 달라는 주문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중광의 무애와 그의 진실한 계율사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의 진술대로 계를 지키는 데 고집하다 보면 계율에 속박당하고 만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계를 깨달아 질서 속에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는 진의를 알 필요가 있다.

이런 그의 근본적 사상은 남에게 혐오감을 일으킬 정도로 마셔대던 술도 끊어버리고 담배까지 하지 않은 자제가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간에 있어 습관은 하루아침에 고쳐지지 않는다. 그리고 습관은 고질병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속박당할 때가 있다. 그런데 중광은 자신 속에서 스스로 개혁을 선언하고 습관화 된 자기 행위에 칼질을 하여 고쳐버린다.

이런 점은 그가 달마를 잔인할 만큼 난도질하는 데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스스로 육고간 주인이 되어 달마가 지니고 있는 사지를 잘라 버리고 머리와 눈과 코만을 우리 앞에 제시하여 이 시대 달마를 창초해낸 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요즈음에 들어와서는 달마보다는 예수상을 그리고 있다. 그러니까 달마의 선종 정신을 예수에게 접목시켜 또 하나의 일체화 작업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면 속에는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을 깨우쳐 주려는 목적이 있는 것 같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한다면 이것은 거짓말쟁이에 불과하다고 진술한 요한의 가르침을 중광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서 주류를 이루다시피한 성기가 예수상에서 말끔히 지워져 있는 사실이다. 이러한 성기의 모습은 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달마의 그림에 있어서는 성기는 독버섯처럼 돋아나 하늘을 향해 방뇨라도 할 기세이다.

 

출가와 견성의 행각

 

중광은 불교의 윤회적 의미에서 볼 때 그는 환생(還生)의 섭리를 이용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해학과 예술, 그리고 야성적 선행(禪行)의 광태를 난폭하게 제공하러 온 달마가 다시 환생하여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갖게 하는 인물이다.

첫째, 중광의 얼굴과 현실적 행동과 모습은 전통적 형식이 말끔히 제거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눈빛에서 이루어진 번득이는 항체(抗體)는 일체를 부정하면서도 제멋대로 움직이는 행동에서는 해학과 선기(禪氣)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러한 행동은 묘하게 달마와 접목이 되어 우리 시야에 새로운 달마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가 지닌 내적인 통로를 따라 심층에 이르면 달마의 선지(禪旨)와 실상(實相)이 가득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역사적인 달마는 잔인하게도 처형해 버리고 창조적 근원에서 이루어진 달마를 조금씩 밖으로 보내서 그 달마가 다시 생노병사를 체험케 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가슴은 시공을 초월해 있는 모든 달마를 저장하고 있는 산실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때로는 달마 위에 성기가 노출해 있는 모습을 그림으로 재현하고 여러 개의 성기가 등허리에서 발정하는 모습도 재현하는 것이다.

비록 달마가 인도에서 태어나 출가를 통해 불타의 법을 마지막 전수 받은 전법 제자이지만 이제 역사 속에 상징적 인물이 되어 버린 깨어나지 못한 입적한 존재이다. 그런데 중광은 견성실험(見性實驗) 속에서 달마를 만나고 이 시대의 달마를 재구성하고 있다.

사실 역사상 달마는 불타의 전법제자인 동시에 중국 선종의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주창한 개산조이다. 그리고 그는 동양의 소크라테스로 불식(不識)의 식(識)을 양무제에게 교전적 언어의 기능을 처음으로 부정하면서 지호문자를 제창한 비조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세일노스라고 칭할 만큼 추하고 다양한 개성을 이루고 있는 반면에 눈빛은 용광로의 불빛같이 푸른 바람이 넘쳐흐르고 있는 달마의 특징을 지녔다.

이러한 역사적 달마를 중광이 그림으로써 실험하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가 그림으로써 역사적 달마를 재구성하고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달마가 지녔던 깨침이 중광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달마는 일체의 유정물의 참된 본질은 곧 진성(眞性)을 공유(共有)한다는 자비를 갖고 있다. 그런데 달마는 이 진성이 항상 명확히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를 오로지 외적인 대상이나 망상에 흐려져 있기 때문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자아(自我)도 타인도 존재하지 않음과 동시에 성(聖)과 심(心)이 하나의 본질임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점을 중광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중광은 달마를 여러 형태로 변화시킨다.

때로는 달마를 역사적 존재로 파악하여 달마를 재현시키는가 하면 달마(法)를 우주의 본질로 파악하여 자연의 일부와 아울러 새로운 형태로 창조하기도 한다. 이 모두가 중광이 출가를 통해 얻은 오도(悟道)의 무애(無碍)이고 자유이다. 그러나 그가 출가한 60년대의 불교는 한 사람의 본성도 깨우치게 하는 데 인색했다. 그리고 치열한 삶과 동떨어지게 지어져 있는 사원들은 역사와 상황을 잃어버린채 풍화(風化)된 자연만을 갖고 있었다. 다만 삶과 접촉을 잃어버린 본능적 절망만을 가지고 관념적 불교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60년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때에 제주도에서 부산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생의 본적지 제주도를 버리고 새로운 정신적 신앙과 이상이 있는 현주소를 찾아가는 떠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훗날 깨달은 것이지만 출가와 수행의 목적은 해탈의 의미를 자기 내부에서 완성하는 작업이고, 그것은 현실을 통해서 실현해야만 목적이 달성되는 것이야. 만약 고통에 속박당하여 고통의 근원을 깨닫지 못하면 출가의 의미는 이룩될 수 없어. 그래서 출가란 의미를 불교에서 말할 때 한 사회에서 다른 사회로 떠남이 아니라 자기 고통을 확인하는 첫 걸음으로 파악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야.

출가를 위대한 떠남이요, 하나의 버림이라고 한 이유를 그는 철저히 알고 있었다. 사실 출가란 자기가 만든 삶을 부정하고 부정해 버린 삶을 통해 새로운 삶의 형태를 파악하는 일에 불과하다. 그래서 출가의 원초적 의미를 불타(佛陀)의 출가에서 찾으려 하고, 나아가 오늘날 우리 주위에 있는 사문(沙門)들은 불타가 출가를 통해 체득한 오도적 삶을 재현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불타가 왕족의 신분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을 부정하고 사문유관(四門遊觀)을 통해 소멸해 가는 인간의 생사를 발견했을 때 출가의 일차적 의미가 성립되었듯이 중광이 제주도에서 떠날 때 그의 가슴에는 출가의 의미가 이루어져 있었다.

1960년 늦여름, 나는 내 자신 속에 쳐 박혀 있는 온갖 위선과 위악, 그리고 지난날 삶으로 인해 얼룩진 상흔(傷痕)의 그림자를 끄집어내어 불태워 버리고 다시 태어나기로 결심했지. 살아있는 자연 속에 내 자신을 입적시킨 것이야. 발가락에 굳어져 있는 굳은 살점처럼 비대해진 비본질적(非本質的) 자아를 내 손으로 육고간에 매달려 있는 고기덩어리를 자르듯이 잘라낸 것이지. 그것도 고통이었어. 제주도를 떠날 때 애월면 관음사 주지가 소개장을 써주어 해인사로 찾아갔어. 해인사를 찾아가게 된 동기는 응선스님에게 찾아가라는 관음사 주지의 배려 때문이었지. 그리고 제주도를 출발할 때 내 자신이 새로운 고통에 익숙되기를 원하는 결심을 하였지. 그래서 부산까지 가는 여비를 제하고는 한 푼의 돈도 갖지를 않았어. 그날 밤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 지난날 체험했던 상념들이 모세혈관을 찌르는 바늘이 되어 되살아났어. 소주 한 병을 사서 내부에 간직한 삶을 축내듯이 조금씩 조금씩 마시고 있노라니까 50대가 갓 넘은 두 사람이 대작을 하면서 지껄여대는 소리가 귓전에 와 박혔어. 나는 천천히 뇌리에 머물러 있던 상념들을 지우고 그들이 떠들어 대는 소리를 도둑고양이처럼 엿들었어. 얼굴에 주름살이 부챗살처럼 낭자하게 깔려 있는 50대 중년 신사는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슬픔을 알콜로 만들어 마시는 것같이 고통과 절망을 상대방에게 내보이고 있었어.

그런데 처음에는 그 모습이 참으로 고통스런 모습으로 보였는데 서서히 취기가 오르고 부터는 중년 신사는 자기 고통을 털어 보임으로써 어떤 쾌감에 도취되는 것 같았어. 그러나 이야기는 충격적이었어. 자기 어머니의 시체를 팔았다는 것이야. 그것도 팔 하나만 판 것이 아니라 썩고 없어질 몸 전체를 팔았다는 거야. 그런데 그의 이야기가 세상의 더럽고 추한 것을 모두 동원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음성은 더러운 것과 몸을 섞지 않고 있는 것같이 들리더군.

나는 한참동안 중년 신사의 일생에 빠져들어 천천히 전개되는 이야기를 빠짐없이 듣고 있었지. 이야기 결말은 호주머니에 어머니 시체 판돈을 제하고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는 거야. 그때야 나는 속으로 중년신사의 음성이 세상의 더러운 것과 몸을 섞지 않

고 있는 정체를 내 나름으로 파악했지. 그것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데에서 이루어진 자유스러운 목소리였어. 그는 세상의 욕망과 집착, 애정을 버리고 구름처럼 떠돌아다니는 자유가 있었어. 아침에 연락선이 부두에 도착하여 중년신사가 떠나가는 것을 오랫동안 쳐다보았어. 측은한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고, 오히려 어떤 여유를 갖고 있었어.

부산에 내린 나는 중년신사에게 한 푼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상태가 많이 갖고 있다는 사실보다 부담스럽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즐겁게 발길을 고통 쪽으로 옮겼지. 처음으로 아무것도 갖지 않은 거지가 된 것이야. 그리고 욕망이 없는 고통과 몸을 섞으며. 밥을 얻어먹으면서 해인사에 18일 만에 도착했어. 때로는 논밭에 일을 거들어 주고 밥을 얻어먹었고, 또 어떤 날은 지나가는 상여를 따라가서 시장끼를 채우기도 했었지. 잠은 여름이라 아무 곳에서나 잘 수 있었지.

해인사에 도착했을 때는 발가락에 물집이 생겨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상태였지만 출가를 할 수 있다는 신념 때문에 모든 고통은 잠적해 버리더군. 하루 저녁을 자고 아침 일찍 응선스님을 찾아 소개장을 내밀었더니, 스님은 반가운 얼굴로 행자실(行者室)로 안내를 하고 사라지더군. 행자실에는 다섯 명이나 모여서 후배 동료가 찾아온 것을 반갑게 맞이해 주고는 심문을 하듯이, 어디서 왔

느냐, 무엇 때문에 중노릇을 하려고 하느냐? 등 속된 질문을 하는 바람에 갑자기 피곤해져 버렸어.

그날 저녁 늦게 주지실로 불려간 나는 해인사에 행자가 만원이라는 바람에 전날 체험했던 좌절이 가슴 속에서 일어나더군. 물론 행자가 만원이라는 구실도 있었지만 그때 내 모양이 그들에게 심한 혐오감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골치 아픈 인물로 보였던 모양이야.

제주도 관음사에서 얻어 입은 중 옷을 입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웃옷은 중 옷이고 아랫도리는 다 떨어진 군복을 입고 있었으니 주지 눈에는 법의로 보일 수가 없었지. 여기서 만난 사람이 법일스님이야.

세상 사람들은 평생 동안 미혹의 상태에 빠져 있다. 따라서 우리는 어디서나 인간들이 탐욕과 아첨에 사로잡혀 있음을 본다. 이것이 바로 집착이다. 그러나 깨달은 자는 권리를 이해하며 집착과 세속의 길로부터 회귀(回歸)하려고 한다.

또 항상 공과(功過)는 마치 빛과 그림자처럼 상관관계에, 번다한 세계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다는 것은 불붙은 집에 사는 것과 다름없다.

 

중광은 비록 해인사에서 출가의 득도를 못했지만 마음이 욕망과 갈구로부터 해방되어 현상계의 만물로부터 초연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온갖 고뇌는 집착에서 생기며 진정한 즐거움은 그 집착을 놓아 버리는데 있다.

중광의 마음속에는 구하는 바가 없는 우주의식 같은 욕망의 불덩어리가 타고 있었다. 행자실에서 수인사를 한 중광은 법일과 같이 일주문을 나서면서,

통도사로 갑시다.

하고 제의를 했다.

통도사에 아는 사람이 있어요?

법일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해인사에서 득도치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부처도 있고 중도 있겠지요.

막연히 찾아가서 또 거절당하면 어떻게 합니까?

어린애마냥 법일의 눈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부처님이 고통 받는 중생을 외면하고 거절하면 부처가 아니지.

해인사에서는 왜 거절당했어요? 인연이 없었던 거야.

중광의 입에서 인연이란 말이 튀어나왔다. 사실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것이 인연이다. 법일과의 만남도 인연이다. 생면부지의 신분으로 다만 출가하겠다는 신념 때문에 두 사람은 해인사에서 만난 것이다. 때로는 인연은 바람과 같은 생리를 갖는다. 빈 벌판에 형체 없이 떠돌다가 서로 몸을 섞은 것이 바람이다. 그래서 인간도 떠도는 바람마냥 이곳 저곳을 헤매다가 상대를 만나고 남녀의 애정을 주고받고 마음과 마음을 섞는다.

걸어서 통도사까지 가요?

걷는 것 자체가 고행이지요. 고통에 익숙해 있지 않고 성불할 수 있겠소. 지금부터라도 몸속에 있는 비열하고 야비한 피를 뽑아 버립시다. 통도사에 까지 걷다보면 욕망을 키우던 더러운 피는 다 소모되고 말 것입니다.

두 사람이 열흘 동안 걸었을 때 밀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녁 노을이 남천강을 물들이고 있었다. 수천 수만의 붉은 보석들이 강에서 눈을 뜨는 것 같았다.

더 이상 걷지 못하겠어요. 행자님 혼자 가요.

법일은 지쳐 쓰러져 버렸다. 영원히 일어나지 못할 사람처럼 무기력했다.

수행자는 고통 받는 삶과 익숙해 있어야 합니다. 생사를 초월하겠다는 사람이 생사에 절망하지 않고 되겠습니까?

법일은 누워서 아픈 다리를 만지며 중광의 이야기를 들었다.

인간의 육체 속에는 두 개의 세계가 있어요. 심층으로 내려가는 내적 통로를 따라가 보면 한없이 즐거운 세계가 있는가 하면, 한없이 괴로움이 깔려 있는 세계도 있습니다. 특히 여자를 소유해 보면 알 수 있어요. 육체와 육체의 밀착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쾌감은 본능이 만들어 낸 즐거움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오랫동안 지속될 수 없는 즐거움이지요. 물질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피가 더해 갈수록 즐거움이 따르지만 반면 그만큼 고통도 동반되지요. 우리가 찾아가는 길은 두 가지의 길에서 벗어나자는 일이 아닙니까?

피곤해요.

법일은 중광의 설교가 귀찮다는 듯이 중지시키려고 했다.

양복(兩服) 맞추어 본 일이 있어요?

지금 입고 있는 것이 양복(洋服)이잖아요.

그 양복 말고. 여자의 우유빛 같은 하얀 속살과 행자님 배와 한몸이 되어 맞추어 본 일이 있느냐 말입니다.

제주도에 있을 때이지요. 저녁 늦게까지 주막에서 술을 마시다가 그날 밤 주모와 같이 잠자리에 들었지요. 양복을 맞추고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있을 때 방문을 발로 걷어차며, 당신 또 서방질 하고 있구나, 소리를 지르는 바에.....

이야기가 중간에 뚝 그치자 법일은,

그래 어떻게 되었지요?

하고 반응을 보였다.

그때는 삼십육계가 제일이지요.

뒷날 법일은 표충사에서 처지고 중광 혼자 제약산을 넘어 통도사에 도착했다. 통도사에서 시작된 중광의 고행은 풍부한 인내로 인하여 내면적 자유스런 공간이 확대되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순탄한 출가의 삶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행자실에서 잡된 일을 돕던 어느 날 학인들의 꼬임에 빠져 창고 자물쇠를 열어주는 바람에 그는 또 한번 퇴사(退寺)명령을 받지만 그것을 단식으로 극복한 불덩어리 같은 신념을 갖고 있었다.

창고에 제사 지낼 음식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학인들의 애교에 그만 넘어가 자물쇠를 열어 주었더니 그들은 음식을 훔쳐먹는 것이예요. 뒷날 모든 책임은 나에게 돌아왔지. 그러나 물러설 수가 없어 단식으로 정당함을 주장했더니 대중공사가 벌어졌고 끝내는 월하스님 승낙으로 출가가 이루어졌지. 월하스님은 내 발목을 붙든 은인이야. 그 후로부터 나는 밭에 나가 일하는 원두라는 소임을 맡았어. 오줌 똥을 져다가 채소를 가꾸던 어느 날이야. 옆방에서 노승의 신음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잠을 청할 수가 없었어. 마치 그 소리는 빈 들, 논에서 개구리 울음소리가 만들어 내는 가래 끓는 소리와 흡사했어. 방문을 열고 노승의 방에 들어섰을 때 참기 어려운 악취가 코끝을 자극했어.

노승은 중풍에 걸려 행동이 중지되어 있었고, 겨우 똥 오줌을 방에서 보고 있었는데 누구 한 사람 그것을 치우질 않았어. 그날 밤 노승을 목욕시키고 방안을 청결히 치우고 나서 잠을 청했지만 간헐적으로 가래 끓는 소리가 베개 머리맡에 와 닿으면서 개구리 울음소리로 변했고, 그 소리를 듣다가 결국 잠을 설치고 말았는데, 노승은 그 이튿날 이승의 삶을 포기하고 입적해 버렸어.

노승의 시체는 쓸모없는 물건을 태우듯이 화장막에서 태워졌고, 누구 한 사람 슬픈 조상(弔喪)에 못이겨 우는 사람도 없더군. 화장을 마치고 절로 돌아와 잠자리에 누었을 때 허무한 노승의 삶이 확대되어 머릿속을 지배하는 통에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잠깐 눈을 부쳤을 때 노승이 생시처럼 꿈속에 나타나 아직 내 다리 하나를 가지고 가지 못했으니 그 다리 한쪽을 수습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사라져 버렸어. 나는 마치 큰 물체에 관자놀이를 얻어맞은 기분으로 화장막으로 달려갔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비장에 도착했을 때 머리와 팔, 그리고 몸뚱이는 벌써 재가 되어 있었고, 다만 한쪽이 타다가 남은 채로 있음을 발견하고 다시 장작을 쌓아 기름을 붓고 그 다리 한쪽이 타서 재로 소멸될 때까지 그날 밤을 불면으로 보냈지. 노승의 환영이 사라지지 않아 밤이면 불면 속에서 그를 만났고, 낮이면 다시 밭에 나가 채소를 열심히 가꾸었지. 하나의 정성은 진실을 이룩했어.

지난날 몸속에 쳐박혀 있던 허영들이 서서히 소진되었고, 마음은 허공처럼 맑아지기 시작했어. 얼굴은 세속의 모든 땟자국을 말끔히 씻어버렸지. 그때야 득도식(得道式)을 가져야 한다고 사중(寺中)에서 요청을 하더군. 출가한 지 2년 만에 삭발을 한 것이지.

 

지금 시간은 6월 13일 19시

오늘이 머리 깎기 위해

五欲七情의 번뇌 속에

無常을 모르고 살아왔던가

아 슬프다. 내가 그린 인생이여

비극의 슬픔에서 간단없이

비극의 출현으로만 끌려든

전생의 모든 것을

다시 없는 오늘의 이별에

삭발로 迷惑을 告하자

 

저 흘러가는 구름은 정한 길

없어도

天地간에 오락가락 하는데

이내심사 알아 줄이 없건만

저 흘러가는 구름은

인생은 나와 같이

산다고 말하며 가네

바다 천리 육로 오백리 길

바람같이 통도사를 찾아드니

절벽이 가로 놓여도 굽히지 않으려는

큰 뜻을 누가 알리요.

 

1962년 6월 13일, 그는 출가와 견성의 공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그때 중광의 나이는 27세였다. 27년간 이끌고 다니던 허망한 자아를 자신 속에 입적시켜 버리고 구도자로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이때 얻은 법명이 중광(重光)이다.

그는 구하노사(九河老師)를 은사로 하여 이때부터 자기 내면 속에서 달마를 실험하는 정진을 계속했다.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 허망한 자아(自我)에서 벗어나는 것, 텅빈 마음에서 안식을 찾는 것, 그리고 자아 일체가 초극되고 소멸되었을 때 내심자증(內心自證)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을 그는 발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자아 그대로를 인즉심즉불(人卽心卽佛)로 파악하지 않고 심성(心性)에서 일어나는 마음이 번뇌와 몸을 섞지 않은 작업부터 시작했다. 그것이 밥 짓는 일, 공양주하는 노릇이었다.

공양하는 것을 법으로 삼고 무념(無念)의 심증에 도달하려고 했다. 때 묻지 않은 일심(一心)으로 부처님께 공양을 드리듯 자기 마음을 길들여야 했다. 자기 마음을 대중의 고통을 위해 버릴 때 참으로 진실한 마음이 일어난 것도 이때 깨달은 것이다.

중광은 2년 동안 쌀을 깨끗하게 씻은 다음 쌀 뉘를 그 많은 쌀에서 일일이 가려냈다. 그것은 세속에서 형성한 번뇌와 잡념, 그리고 욕망의 뉘를 가려내는 일이었다.

쌀 한 알도 버리지 않았다. 쌀 한 톨이 그에게는 소중한 진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수행자를 만나면 밥할 줄 아느냐고 묻는다. 밥 짓는 일이 중광에게는 자성(自性)을 개오(開悟)하는 일이었고, 진실한 마음을 부리는 일이었다.

여자를 다루는 것도 그는 밥하듯 정성을 들이고, 조절을 잘하면 얼마든지 성취를 이룬다고 믿었다. 이런 정신은 참선과 직결되었다. 주어진 화두(話頭)를 밥 짓는 일에 결부시켰다.

시심마(是甚磨) ―마음이 무엇인가? 마음은 색깔도 없고 모양도 없고 냄새도 없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는, 한없이 넓고 소소영영(昭昭靈靈)하면서 찾으면 찾아지지 않는 마음을, 음률을 조정하듯 마음의 주체를 파악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지난날 체험했던 상념의 그림자들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마음이 맑아지면서 육체도 아니요, 의식도 아닌 자기 자신의 영원한 자아(自我)에 관한 내밀한 깨달음이 내부에 물이 고이듯 머물러 있음을 발견했다.

 

*위의 글은 서음미디어 발행 <허튼소리>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한해를 돌아보는 길 위에서

 

우리가 가장 믿어야 할 이들의 무책임과 불성실과

끝없는 욕심으로 집이 무너지고 마음마저 무너져 슬펐던

한 해 희망을 키우지 못 해 더욱 괴로웠던 한 해였습니다.

 

마지막 잎새 한 장 달려 있는 창 밖의 겨울나무를

바라보듯 한 해의 마지막 12월의 달력을 바라보는

제 마음엔 초조하고 불안한 그림자가 덮쳐옵니다.

 

-연초에 세웠던 계획은 실천했나요?

-사랑과 기도의 삶은 뿌리를 내렸나요?

-감사를 잊고 살진 않았나요?

 

달력 위의 숫자들이 눈을 크게 뜨고 담담히 던져 오는

물음에 대답못해 망설이는 저를 누구보다 잘알고 계시는 주님

하루의 끝과 한 해의 끝이 되면 더욱 크게 드러나는 저의 허물과

약점을 받아들이고 반복되는 실수를 후회하는 일도 이젠

부끄럽다 못해 슬퍼만지는 저의 마음도 헤아려 주십니까?

 

정성과 사랑을 다해 제가 돌보아야 할 가족, 친지,

이웃을 저의 무관심으로 밀어낸 적이 많았습니다.

다른 이를 이해하고 참아 주며 마음을 넓혀 가려는

노력조차 너무 추상적이고 미지근 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웃과의 잘못된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도전과 아픔이 두려워 바쁜 일이나 거짓된 평화 속으로

자주 숨어 버린 겁쟁이였음을 용서하십시오.

남에겐 좋은 말도 많이 하고 더러는 좋은 일도 했지만

좀더 깊고 맑게 자신을 갈고 닦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한 위선자였음을 용서하십시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늘상 되뇌이면서도

새롭게 주어지는 시간의 구슬들을 제대로 꿰지 못해 녹슬게 했습니다.

바쁜 것을 핑계로 일상의 기쁨들을 놓치고 살며 우울한

늪으로 빠져들어 주위의 사람들까지 우울하게 했습니다.

 

아직 비워내지 못한 마음과 낮아지지 못한 마음으로

혼자서도 얼굴을 붉히는 제게 조금만 더 용기를 주십시오

다시 시작할 지혜를 주십시오.

한 해를 돌아보는 길 위에서 저녁놀을 바라보는

겸허함으로 오늘은 더 깊이 눈감게 해주십시오

더 밝게 눈 뜨기위해......

 

 

- 이해인 수녀님 글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