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 17. 23:25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3차 천일기도 54일 2013.01.16 수
불기2532년(1988년) 5월 1일 태안사 가사불사회향 및 정기법회 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했습니다.
지금은 어느 분들은 꼭 자기하는 식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저 티벳트 사람들은 ‘옴마니 반메훔’만 합니다. 그러나 옴마니 반메훔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것은 사도(邪道)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아 그러면 티베트의 고승(高僧)들이나 티베트 불교(佛敎)는 다 사도 입니까. 또 염불(念佛)을 많이하는 사람은 염불이 가장 수승한 것이고 딴것을 하면 안된다. 이런 논법(論法)은 지금은 통용 될 때가 아닙니다.
원효대사(元曉大師)나 또는 대각국사(大覺國師)나 또는 보조국사(普祖國師)나 이런 정통적(正統的)인 그런 위대한 분들은 모두가 다 그러기에 회통불교(回通佛敎)를 하셨습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가 오직 불성(佛性) 뿐인데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하겠습니까. 부처님 말씀 도인(道人)들 말씀은 모두가 다 불성(佛性)으로 가는 길입니다. 다만 어떻게 하는 것이 자기한테 보다 빨리 그런 번뇌(煩惱)를 띨 것인가. 자기 원수인 그런 탐욕심(貪慾心)을 버리고 또는 진심(瞋心) 성내는 분노심(憤怒心)을 버리고 어리석은 무명심(無明心)을 버릴 것인가. 어떤 방법 즉 방편(方便)이 보다 더 빨리 효과적으로 3독심(三毒心)을 버리는 그런 행법(行法)일 것인가. 이것이 문제인 것이지 어느 것만 옳다고 고집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나 도인들이 말씀하신 행법은 모두가 다 성불(成佛)의 길입니다.
산(山)에 올라가는데 남(南)으로만 갈수가 있습니까. 동쪽이나 서쪽이나 북쪽이나 모두가 다 산에 올라가는 길이 있습니다. 다만 좀 더 나은 길이 있겠지요. 사람의 근기 따라서 나은 길 또는 더 험한 길 그런 차이는 있습니다. 우리 재가(在家) 불자님들이 가장 하기 쉬운 것은 역시 부처님의 이름을 외우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우리가 말로 해도 안 보이는 것이니까 못 본단 말입니다. 내 본성(本性) 천지우주의 본성 모두가 사실은 부처님이건만 우리 중생은 못 본단 말입니다. 중생(衆生)은 안보이겠기에 그저 이름이라도 외우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서 그때는 부처님의 그런 영상(映像)이 차근차근 우리 마음에 흔적을 둡니다. 우리 사람끼리도 그 사람 이름을 외워 보십시요. 그 사람의 영상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하물며 부처님 이름은 명호부사의(名號不思議)라! 부처님 이름은 이것은 이름으로 부처님 공덕(功德)을 표하는 그런 부사의한 명호입니다.
가사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부처님의 자비로운 자비의 교훈을 그린 하나의 표상이고 상징이고 그런 의미이고 또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은 부처님 가운데서 우리 중생의 영혼(靈魂)을 극락세계(極樂世界)로 인도하는 그런 의미를 담아서 지은 명호 입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은 부처님의 모든 공덕의 이름을 통틀어서 총칭해서 부른 명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옴마니반메훔’ 이것은 관세음보살본심미묘진언(觀世音菩薩本心微妙眞言)이라는 의미가 있듯이 부처님의 순수한 에너지 부처님의 생명(生命)을 하나의 음률(音律) 리듬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게 자꾸만 외우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업장(業障)이 녹아지고 따라서 부처님에게로 가까워집니다.
우리는 지금 현대와 같이 이렇게 복잡한 때는 비록 불교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바른 견해(正見)를 가져서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모두가 다 불성(佛性)이거니 이와 같이 딱 믿는 다면 그러면은 불교(佛敎)에서 말하는 말이 아니더라도 기독교(基督敎)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나 ‘오 주여!’나 무엇을 하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은 그런 때입니다. 우리가 지금 15억 이상 기독교인을 다 외도로 몰아세워서 우리가 배척 할 수 있습니까. 알라신을 믿는 이슬람인도 10억 인구가 되는데 우리가 배격 하겠습니까. 단 문제는 알맹이 본바탕만 옳으면 어떻게 부르거나 무방한 것입니다. 지금은 그런 때입니다.
화두(話頭)를 의심 하더라도 이른바 자기 본분사 일의제(一義諦)를 분명히 우리가 구해야 합니다. 무(無)자화두를 한다 하더라도 자기 본분사 일의제를 분명히 못 들면 그때는 참선이 못 되는 것입니다. 오 주여, 하나님, 한다 하더라도 역시 그사람 마음이 불심(佛心)에서 하나님이라 하는 그 의미가 그 개념 내용이 불심에 가까울 때는 바로 참선입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주문(呪文)을 하실 분들은 주문(呪文)을 하시고 또 염불(念佛)을 하실 분들은 염불(念佛)을 하시고 화두(話頭)를 하실 분은 화두(話頭)를 하십시요. 다만 그것이 자기 근기에 맞으면 좋습니다. 요는 문제는 어떤 것이 문젠고 하면은 그렇게 우리 마음이 본체성(本體性)을 안 떠날 정도로 계속해서 염염상속(念念相續)하면 됩니다.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달빛차 시편-도명
1
휘영청 달빛이 토굴에 머물던 날
열 이레 달님같은 숙성한 시를 지어
가슴에
머문 님이랑
찻잔속에 담그네
2
달빛이 운판치고
새울음 목어치니
침묵하는 수목에
범종소리 울리고
새벽송
'음무소주 이생기심'
법향차에 감도네.
-달빛차향 속에 금강경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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