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천(嵇瀳)스님의 일요강론: 2556년 12월 23일
마음은 생명입니다
아이고! 동짓날 노보살님들하고 중중모리로다가 기도문 읽다가 일요일날 자진모리로 읽을라니 참 바쁘네. 오늘 아! 주제는 마음은 생명입니다. 그게 오늘 주젭니다. 이 땅 위에서 생명보다 앞서는 것이 있을까요? 아마 이 우주에서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없을 겁니다. 붓다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구요.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라고 하셨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생명을 해쳐서도 안되고, 생명을 위협해서도 안되고, 생명에게 적개심을 품어서도 안된다고 하셨죠.
요즘 나는 두렵고 무섭습니다. 두렵고 무서워서 잠이 안 올 지경이예요. 무엇이 그렇게 두렵고 무서울까요? 나는 대한민국이 무섭고 두려워요. 적개심의 광기가 독기가 되어서 독무(毒霧)을 뿜어내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 독 안개가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고, 그 중간계조차 허용하지 않죠. 중간계조차 없어요. 하늘과 땅을 가득 채웠으니까요. 거대한 두 마리의 지네가 독무를 뿜어내면서 싸우고 있죠. 과거에도 싸웠고, 현재에도 싸우고, 미래에도 싸우겠죠.
우리 전설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죠. 어느 고을의 착한 소녀가 부엌에서 밥을 하다가 두꺼비 한 마리를 발견하죠. 두꺼비는 병이 들었는지, 배가 고팠는지 힘이 없죠. 소녀는 그 두꺼비가 안쓰럽고 마음이 아파서, 밥을 푸다가 자기 밥그릇에 담을 밥 중에서 조금 떼어서 두꺼비에게 주죠. 그러자 두꺼비는 그 밥을 낼름낼름 먹죠. 그 순간부터 두꺼비는 그 부엌에서 소녀와 함께 살죠. 그리고 소녀에게서 밥을 제공받은 두꺼비는 무럭무럭 크죠. 그 몸집은 커져가고, 그와 함께 소녀도 성장하죠.
그러던 어느 해, 어느 날 그 고을에서는 원로회의가 열리죠. 그 고을에는 해마다 정월 보름이 되면, 성숙한 소녀를 제물로 바치는 희생제가 거행됐죠. 그 소녀는 그 해 제물로 바쳐질 희생의 공물로써 선발되죠. 그 고을에 사는 한 어느 누구도 그걸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것은 정월 보름달이 뜨고 음기가 가장 강할 때, 그 고을에는 알 수 없는 침묵이 흐르고, 모두가 마비가 된 듯이 꼼짝할 수 없는 그 순간에, 어떤 존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을 해쳤기 때문에, 사람들은 늘 공포에 떨었죠. 그런데 사람들은 그 무서운 존재가 그 동네의 높은 뒷산에 동굴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그들은 자진해서 소녀를 공물로써 바치기 시작했죠. 그러자 그 마을은 한시적이지만 평화가 찾아왔죠. 적어도 모든 사람이 공포에 떨어야할 일은 없었어요.
소녀는 아무런 저항도 할 수가 없었죠. 보름 날 땅거미가 질 무렵에 소녀는 동네의 원로들에게 이끌려서 그 동굴에 갔죠. 그리고 동굴에서는 알 수 없는 존재를 위한 희생제가 무녀에 의해서 집전되고 있었죠. 이윽고 동쪽 하늘에서는 보름달이 떠올랐고 모든 사람들은 희생제를 마치고 내려갔습니다. 소녀만이 그 동굴 속에 홀로 남겨졌죠. 촛불은 대낮처럼 밝았지만 소녀는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그 때 그 소녀의 눈 속에 한 물체가 보이죠. 언제 왔는지 모르지만 그 소녀와 함께 했던 두꺼비가 소녀곁에 다가와 있었던 거죠. 소녀는 너무 기뻤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두꺼비에게 말했죠.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돌아가! 여기는 아주 무서운 곳이거든. 이 동굴에서 아침 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소녀는 그 날 아침에 두꺼비와 부엌에서 작별을 했죠. 그 날은 두꺼비에게 밥을 많이 주었어요. 소녀는 눈물을 흘리면서 두꺼비에게 말했죠. "내가 너에게 주는 마지막 밥이다." 두꺼비는 그것을 알아 들었는지 그의 곁에 와 있었던 거죠. 갑자기 어디선가 음산한 바람이 불더니 촛불은 꺼졌고, 저 동굴 깊은 곳에서 푸른 불 두 개가 보였죠. 그 두 개의 불덩이는 소녀에게 다가왔습니다. 다가왔을 때 소녀는 비로소 보았죠, 거대한 지네를. 아주 거대한 지네였어요. 거대한 지네는 입에서 검은 독기를 뿜으면서 소녀에게 다가왔어요. 그 때, 그 소녀의 두꺼비가 소녀 앞을 가로막죠. 그리고 두꺼비도 파란 독기를 뿜기 시작했죠. 그 중간에서 파란 독기와 검은 독기는 일진일퇴를 했죠. 소녀는 놀래서 혼절을 해버렸죠. 동네 사람들은, 그 고을 사람들은 해마다 해왔듯이 해가 동쪽에 떠오르기 시작하자 동굴로 올라왔습니다. 마지막 희생제를 마무리해야 되니까요. 그들은 동굴에 들어서자 무서운 광경을 보았죠. 거대한 지네와 엄청나게 큰 두꺼비는 죽어 있었고 소녀는 혼절해 있었죠.
내가 왜 이 전설을 꺼내서 이야기 할까요? 우리 대한민국은 거대한 두 마리의 지네죠. 그래서 끊임없이 독기를 품고 독무를 피워내죠. 아니 어쩌면 그 거대한 두 마리의 지네는 두꺼비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죠. 소녀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 지네를 해치우는 정의로운 두꺼비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죠. 그래서 자기는 두꺼비로서 파란 독을 품어낸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적어도 대한민국 사회는 두꺼비가 없습니다. 두꺼비를 키운 소녀가 없기 때문이죠. 소녀가 없는데 어떻게 두꺼비가 존재할 수 있을까요? 두꺼비를 키우려며는 마음 속에 사랑이 있어야 되는데, 사랑이 없죠. 마음 속에 사랑이 없으니까 커거는 것은 지네 밖에 없습니다.
대한민국 사람 모두는 지네의 발이 되고, 지네의 눈이 되고, 지네의 몸통이 되죠. 지네의 마음이 되고. 전설에 의하면, 지네가 천년을 묵으면 연단(?)을 만든다고 그러죠. 독의 연단 말이예요. 어쩌면 우리는 그 독의 연단인지도 모르죠. 부처님께서 왜 앙굴리마라를 구원하셨을까요? 앙굴리마라는 도둑의 수괴였고, 슈라바시티를 공포에 떨게했던 살인마였습니다. 부처님께서 앙굴리마라를 구원하셨을 때, 슈라바시티 사람들은 그가 아나타빈티카 사원에 거주한다는 말을 듣고 모두가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런 그를 왜 부처님께서는 굳이 제자로 받아들여서 아나타빈티카 사원에 두었을까요?
이 땅 위에 어떤 존재가, 어떤 생명체가 어머니 자궁에서 나올 때부터 살인마로 나온 자가 있었던가요? 앙굴리마라를 숲에 몰고, 앙굴리마라를 살인자로 만든 것은 그 시대의 광기이고, 그 시대의 독기이죠. 우리는 말합니다 그는 독재자의 딸이라고. 그는 노무현의 비서실장이었다고. 냉정하게 이야기해서, 살아남은 자는 죄인이다라는 말이 있죠. 그 시대를 관통하고 그 중심에 있었던 자였든지, 아니면 변방에 있었던 자였든지, 아니면 침묵했던 자였든지, 아니면 참여했던 자였든지, 아니면 회피했던 자였든지. 그 시대에 살아남은 자는 모두 다 죄인입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을 보면, 장발장이 그의 양녀 코제트를 위해서 혁명에 참가했던 청년을 지하 하수구를 통해서 구하는 장면이 나오죠. 코제트가 사랑했던 청년은 혁명에 참가해서 정부군과 맞붙죠. 그리고 부상을 입습니다. 그 와중에 장발장은 자기가 사랑하는 양녀를 위해서 마지막 선물을 하려고 하죠. 그것은 그 청년을 살려서 코제트에게 돌려 보낼려고 하는 것이죠. 그는 그 곳을 탈출하기 위해서 그 파리 지하의 더러운 하수구를 그 청년을 업고 관통하죠. 하수구를 관통한 자는 그가 살아있는 자이든, 그가 부상 당한 자이든, 그를 구할려고 하는 자이든, 그 하수 물에 젖지 않는 자가 어디에 있는가요?
우리가 붓다께서 앙굴리마라를 구원하신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아파하지 않으면 공감할 수 없고, 공감하지 않으면 기뻐할 수 없습니다. 기뻐하지 않으면 차별하지 않는 마음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차별하는 마음이 있으면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가 않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자애로울 수가 없죠. 과거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과거를 되돌아보고 손짓을 하는한, 개인이 되었든 사회가 되었든, 집단이 되었든 국가가 되었든, 모두가 불행해지죠. 과거는 현재가 아니며, 미래도 아니기 때문이죠.
나는 용서하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과거를 용서하지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용서는, 정말 미안한 얘기이지만, 인간이 입에 올릴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은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용서할 수 있는가요? 인간이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우리는 붓다의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붓다가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잊어버리라고 하는 애기도 아닙니다. 그 시대를 받아들이라고 하는 얘기도 아니예요. 그러나 우리는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는 사랑할 수 없게 되니까요. 사랑은 자애로부터 나오는 거죠.
두꺼비를 키운 것은 소녀의 자애로운 사랑입니다. 두꺼비를 키운 소녀의 자애로움은 소녀를 살렸고, 그 고을을 구원했습니다. 부처님은 말하죠. 원한으로 원한을 씻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 원한으로써 원한을 갚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피로써 피를 씻을 수는 없습니다. 한 마리의 거대한 지네처럼 삶을 영위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두렵고, 무서운 일이죠.
사람은 누구나가 완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누구나 허물이 있고, 누구나가 잘못이 있죠.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인가 무슨 대학에서 인간 게놈을 연구했더니, 인간 게놈의 400개가 불완전했다는 겁니다.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인가요? 본래 인간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우리의 DNA 기능 자체가 400여 개나 불완전하니까요. 그 400여 개가 불완전한 것도 가장 좋은 상태의 인간일 때죠. 어쩌면 그것이 더 많은 사람이 있을 수 있을 겝니다. 그 불완전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불완전한 존재라 할지라도, 그 생명은 귀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이 소중한 것은, 귀중한 것은 여분이 없기 때문이죠. 생명은 여분이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여분을 가지고 있지 않죠. 우리의 생명은 우주에서 왔고, 우리의 생명은 우주와 함께 하죠. 우리의 생명은 우주의 기원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미래와 함께 우주를 향해 가죠. 그러한 생명이 독무를 뿜고 있는 지네로 변태한다고 하는 것은 생명에 대한 모독입니다. 생명에 대한 경멸이죠. 이보다 더 큰 불행은 없습니다.
우리가 근본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근본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 무얼까요? 인간은 본래 자애로운 존재죠. 인간은 본래 자애로운 존재입니다. 아기들을 바라보십시요. 얼마나 평화롭습니까? 거기에 무슨 악의가 있던가요? 아기가 어떤 탐욕을 보인 적이 있던가요? 그러한 존재가 왜 무서운 지네가 될까요? 그것은 우리가 그를 끌어다가 지네의 발에 붙였기 때문이죠. 우리의 근본은 자애로움입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자애로운 마음을 가지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자애로운 마음을 말씀하시는 것은 그래서 그런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독기를, 내 마음 속에 있는 지네를 소멸시켜야 됩니다. 내 마음 속 지네를 소멸시키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자애로움입니다.
내 마음 속에 자애로움을 느끼십시요. 자애로움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애로움은 내가 느끼는 것입니다. 내 전신으로써, 내 온 몸으로써, 내 온 마음으로 그 자애로움을 느끼십시요. 우리는 소중한 생명입니다. 지네의 발이 되고, 지네의 눈이 되고, 지네의 몸통이 되고, 지네의 내장이 되는 그런 도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 도구를 만드는 것은 우리 인간입니다. 인간을 지네의 도구로 만드는 것은 인간입니다. 그 적개심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죠. 적개심의 광기는 독기가 됩니다. 그 독기는 독무가 되죠. 지네가 독무를 피우는 것이 아니라 지네가 독무를 만드는 것입니다.
<반지의 제왕>에 보면 중간계라는 것이 나오죠. 중간계 없이 거대한 지네와 지네가 싸우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요? 그것은 공멸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 동굴에서 살아나올 수가 없습니다. 동굴에서 살아나올려면, 한 마리의 두꺼비가 있어야죠. 두 마리의 지네가 있어서는 동굴에서 살아나오지 못하죠. 이제 더 이상 네 탓이라고 손가락질 해서는 안 됩니다. 앙굴리마라를 만든 것은, 앙굴리마라가 스스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 사회가 앙굴리마라를 만든 것입니다. 그 시대에서 살아남은 자, 죄없는 자는 없습니다. 살아남았다고 하는 자체가 죄니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이 특별할 것이 없다고. 자애로우면 된다. 네가 자애로움을 느끼고, 네가 그 자애로움을 이 땅에 함께 할 수 있도록, 그 여분을 거름으로써 토양을 살찌우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난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해요. 깨달음을 얻느니 하는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할 필요도 없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누군가를 증오하고, 누군가를 경멸하고, 누군가에게 적개심을 품지 마십시요.
도대체 이 우주보다 귀한 한 생명체로 이 땅에 와서, 무엇 때문에 한 마리의 지네로서 그 흉칙한 몸을 이끌고, 사람의 시선이 무서워 밝은 해 아래 나서지 못하고, 음습한 동굴 속에 그 어둠 속에 숨어서 독기를 품으며, 소녀를 잡아먹으면서 생명을 연장하는 그 비참한 생명체가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설사 그 지네가 해마다 정월 보름 달 밝은 날에 소녀를 먹으면서 천 년 만 년 살았다하더라도, 그 지네는 영원히 어둠 속에서 나오지 못합니다. 그 어둠 속에 밀어넣은 것은 다른 생명체가 아니라 지네 스스로가 그 어둠 속에, 그 동굴 속에 숨어 들어가서 생명을 연장시키고 있는 겁니다.
용서는 우리의 영역이 아니지만,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요? 우리는 붓다와 함께하는 거룩한 생명이니까요. 마음은 생명입니다. 내가 말하는 마음은 아파하는 마음이고, 공감하는 마음이고, 기뻐하는 마음이고, 차별 없는 마음이고,사랑하는 마음이고, 자애로운 마음입니다. 그것이 생명입니다. 내가 지네가 되어서 생명을 유지하는 거, 그것은 생명이 아닙니다. 이미 그것은 죽어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 속의 지네가 스스로가 자기 길을 가도록 놓아 두십시요.
나는 지네를 죽이라고 이야기하진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내 마음 속의 지네를 죽이려 하면 할 수록, 지네는 더 강력한 존재로 변신할 것입니다. 다만 지네가 스스로가 내 마음 속에서, 지네 스스로가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곳으로 가도록 놓아 두십시요. 설사 지네가 흉측(凶測)한 존재라 할지라도 그도 또한 하나의 생명입니다. 우리는 지네를 죽여서는 안 됩니다. 지네를 죽이면 이 땅에 평화가 올 거 같지만, 지네를 죽여도 이 땅에 평화는 오지 않습니다. 이 땅에 평화가 오려면 지네가 스스로의 삶터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우리가 간섭하지 않고, 우리가 죽이려고 하지 않고, 우리가 위협하지 않고, 우리가 손가락질하지 않는다면, 지네를 흉측한 존재라고 경멸하지 않는다면, 지네는 지네로써 평화롭게 살 것입니다.
오늘의 주제가 '마음은 생명입니다'입니다. 마음은 생명입니다. 생명은 마음입니다. 그것을 앞서는 것은 그 어떠한 것도 우주에는 없습니다. 우주 밖에는 있을지 모르죠. 우주를 떠나서 무엇이 있는가요? 오늘은 여기까지 합니다.
오늘은 어느 분이 좀 기도를 이끌어 주실라는가요. 다음 주는 송년법회입니다. 다함께 합장하시죠.
우러러 온 법계에 충만하사 아니 계신 곳 없으시고, 만유에 평등하신 부처님!
저희들은 한 마리의 지네의 다리가 되고, 눈이 되고, 몸이 되고, 내장이 되고, 독이 되어서
서로가 지네인지도 모르고, 스스로가 두꺼비라고 여기며,
이 땅의 정의를 위해서 싸운다고 생각하며 살아 왔습니다.
부처님! 저희들이 독무에 취해서,
이 미망의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저희에게 지혜의 광명을 주소서.
저희들이 이 어둡고 음습한 동굴을 벗어나서,
밝은 태양 아래에서
갓 태어난 아기가 엄마의 품 속에서 평화와 행복을 얻듯이
저희 또한 그러한 평화와 행복을 붓다의 품 안에서 얻기를 원합니다.
오늘 이 법회에 참석한 저와 저의 벗들과 저희 가족과 이 땅위의 모든 생명이
부처님 은혜와 축복 속에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싸두 싸두 싸두.
혜천스님 - 초기불교전공 흥천사주지
나무는 기운쪽으로 넘어진다._()_
“부처님,
이 카필라바스투는 안온하고 풍족하여
많은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친 사람과
그릇된 생각을 가진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이들과 함께 살아가다 보면
삼보를 잊어버리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또 이러다가 내가 죽게 되면
악도에 태어나지 않을까 두렵기도 합니다.”
부처님은 비유를 들어 마하나마에게 말했다.
“저기 언덕에 큰 나무가 한 그루 있다고 하자.
그 나무는 평소에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누가 그 나무의 밑동을 베면 나무는 어디로 넘어지겠는가?”
“그야 기운 쪽으로 넘어지겠지요”
“마하나마야,
너도 그와 같을 것이다.
결코 나쁜 곳에 나지 않을 것이요,
끝끝내 나쁜 일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오랫동안 삼보에 귀의해
몸과 마음을 닦아 익혔기 때문이니라.
네가 목숨을 마친 뒤 비록 몸은 불에 사라지거나
땅에 묻히거나 바람에 내버려지더라도
마음은 오랫동안 바른 믿음의 햇살을 쪼이었고,
또한 계율을 지키고 보시를 행하고 많은 법문을 듣고
지혜의 햇살을 쪼이었으므로 미래에도 반드시 좋은 곳에
나게 될 것이다.”
잡아함 33권 930경 『자공경(自恐經)』
一寸 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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