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 25. 17:06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머무는 곳마다 주인되어 진실되게 사는 법 / 혜국스님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는 말은 깨어 있거나 잠들어 있거나 기쁜 일이 있거나
슬픈 일이 있거나 내 감정에 속지 않고 내가 내 주인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내가 내 주인이 된다는 일은 쉽기로 말하면 참으로 쉬운 일일수 있고 어렵기로
말하면 참으로어려운 일 중의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면 육신, 즉 감정의 덩어리로 된 몸뚱이가 먹을
것을 달라고 하면 넣어주고 성을 내달라고 하면 화를 불같이 내주는 등 감정이
해달라는 대로 감정의 노예가 되어 사는 시간이 많지,
참마음이 주인되어 행동을 하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팔만사천 번뇌 모든 욕심과 진심과 어리석은 망상번뇌가 우리의 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내 마음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임제 스님은 가는 곳마다 주인 되는 세계를 “수행자가 부처를 구하면 부처를 잃게
되고 조사를 구하면 조사를 잃게 되고 도를 구하게 되면 도를 잃게 된다”
고 하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어떻게 주인노릇을 해야 되고 내 주인이 어떠한 자세인가를
잘 표현한 세계입니다.
모양이 있거나 귀에 들리는 소리가 있거나 무슨 색깔이 있다면 그것은 주인자리가
아닙니다. 허공은 중생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허공에는 아무런 모양도 없고 소리도 없기 때문에 이 조계사 법당은 물론 많은
대중들이 다니거나 소리를 질러도 아무런 탈이 생기지 않습니다.
만약 허공에 모양이 있거나 색깔이 있다면 우리가 마음 놓고 허공에 의지하고
살 수 없을 것입니다.
허공은 먹물을 끼얹어도 물들지 않고 침을 뱉어도 묻지 않습니다. 바로 이 오염되지
않는 자리를 주인된 자리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몸 안에서 몸이 썩지 않도록 지켜주는 주인공, 법문을 들을 줄 알고 눈을
뜰 줄 알도록 하는 소소영영한 그 기운이 내 마음의 주인공일진대 주인을
내버려두고 감정이 하자는대로,
도적놈이 주인노릇 하도록 가만두어서는 안됩니다.
마음부처라고 하는 법당에 내 스스로 감정과 욕망과 도적놈을 불러들여 주인노릇을
하도록 내버려두는 일은 부처님을 믿는 제자라면 있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주인공을 얼마나 믿고 있는지를 냉철하게 돌아보십시오.
얼마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山堂靜夜坐無言(산당정야좌무언) 산당의 고요한 밤에 말없이 앉았으니
寂寂寥寥本自然(적적요요본자연) 조용하고 조용하여 본래의 모습이다.
何事西風動林野(하사서풍동임야) 서풍은 어찌하여 수풀을 흔드는가
一聲寒雁 長天(일성한안려장천) 기러기 한 소리가 장천을 울리도다.
여러분의 눈으로 자신의 눈이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안보입니다.”(대중)
그러면 마음을 갖고 마음을 보면 마음이 보입니까? “안보입니다.”(대중)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찾으려고 하거든요.
찾으려고 한다는 것은 찾는 내가 있고 찾는 대상이 따로 있을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눈을 보지 못하듯이 마음이라는 것은 찾는 주인과 찾는
대상이 나눠진 상태가 아니고 주와 객이 분리되기 이전 세계입니다.
찾으려고 하면 이미 잃어버리는 것이 되거든요.
그래서 부처를 구하면 부처를 잃게 되고 조사를 구하면 조사를 잃게 됩니다.
또 도를 구하면 도를 잃는 것입니다.
요즘 참선을 하는 사람들은 너무 급합니다.
그런데 도를 그렇게 빨리 얻을 수 있으면 누가 얻지 못했겠습니까.
또 “요즘 참선을 하는데, 이러이러한 것들이 보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하고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것을 보길 원하는 마음이 아직 남았으니 보이는 겁니다.
그건 그림자지 실상이 아니에요.
보고 싶은 마음의 그림자가 밖에 나가서 황금색으로도 보이고 부처님으로도
보이고 그러는 것이니 절대로 현혹되지 마세요. 실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화두가 무엇입니까?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라는 화두가 있는데,
화두가 정전백수자 이 다섯 글자입니까? 아니면 조주 스님이 ‘정전백수자’하기 전
그 마음 속에 숨겨진 의(意), 뜻입니까?
말 나온 다음의 것은 화두가 아닙니다. 그 말 나오기 전, 조주 스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여러분 마음과 내 마음이 둘이 아닌 상태를 화두라고 합니다.
이 화두는 들어가고 나오는 자리가 아니거든요.
‘공’하면 전해질 소리인데 이걸 알아듣는 사람이 흔치 않아요. ‘뜰앞에 잣나무’라는
소리가 나오기 이전 조사 스님의 그 뜻이 화두입니다.
의심을 하기 위한 의심이 아니라 조사 스님들이 이미 보여주었으니 마음의
눈을 떠야 할 것이 아닙니까. 눈 뜨는 방법이 의정이요 의심입니다.
화두라고 하는 것은 그 뜻이 나와 벽이 허물어져버린 상태를 보여준 것이니까
내가 찾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입니다.
내 자신을 대상화시켜 버린 것이고 찾으려고 하는 놈과 찾아야할 대상을 둘로
나눠버린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뜻을 읽을 수가 없는거예요.
이 상태로는 백날이 가도 수행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몸뚱이를 내 것이라고 생각을 하죠? “예.”(대중)
아니라면 내가 가져가서 밥도 짓게 하고 더러는 팔아서 불사에도 보태고 할테니까.
여러분 몸뚱이가 여러분 꺼라면 마음대로 되어야 하죠. 그런데 맘대로 됩니까? 안되죠?
“예.”(대중) 앞으로 여러분 꺼라고 하지를 말아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내 것이라고 하는 내 몸뚱이도 마음대로 안되는데 어떻게
가족들을 내 마음대로 하고 이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기를 바라겠느냐.
이 세상이 마음대로 되고 내 가족이 마음대로 되기를 바라거든
마음을 먼저 길들이라”고 했습니다.
네가 주인이 되면 진실되게 살게 된다고 하신 겁니다.
우리가 화두를 들고 싶어도 내 몸뚱이 속에 있는 번뇌욕망이 (화두가)들어오게
가만히 놔둡니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번뇌망상과 화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망상번뇌가 일어나면 번뇌망상을 화두로 바꾸는 것이로구나, 즉 번뇌망상이라는
지능을 가지고 화두라고 하는 부처를 조성하는 것이니까, 참선법이라고 하는 것은
이 번뇌망상을 부처로 만드는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번뇌가 곧 보리’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할려면 화두를 정말로 믿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화두하는 그 시간 만큼은 내가 나와 같이 춤을 추는 시간이고 부처와 같이 있는
시간이구나. 일어나는 번뇌망상을 없애버리고 화두를 하는 것이 아니라
번뇌망상을 가지고 ‘어째서’ ‘왜’하고 살피다가 조금 더 나아가면 어째서도 없어지고
왜도 없어지게 됩니다.
오로지 조주 스님의 의정만 남게 된다 이 말이에요.
이렇게 분명한 것이라면 화두 수행에 나를 바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화두 참선법은 일생을 바칠 가치가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문제는 나만이 해결할 수
있어요. 참나를 찾아 나서는데 무슨 하자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성인은 씨앗 심는 것을 중요시하지만 중생은 결과만 얻으려고 합니다.
씨앗을 심지 않으면 결과가 나오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어째서’하고 의심을 품을 때
그것이 씨앗 심는 것입니다.
그 시간은 부처가 된 것입니다. 이는 화두가 작용이 된 것이거든요.
거기에 의심이 가고 잘못될 것이 없는 것처럼 이유를 붙일 필요도 없습니다.
(컵을 들어보이며)이걸 뭐라고 합니까?
“컵이요.”(대중)
이 컵을 몸뚱이라고 합시다. 이 컵 안에는 물이 있습니다.
우리 몸 안에는 어떤 물이 있습니까. 망상번뇌라는 물이 있습니다.
망상번뇌는 흙탕물이 되어 우리 몸안을 계속 돌아가고 있습니다.
흙탕물이 돌아가듯이 돌아갈때는 그 안에 찌꺼기가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안보입니다.”(대중)
여러분이 텔레비전을 보거나 다른 사람하고 말할 땐 그 안에 있는 망상번뇌가
보일 리가 없습니다. 점점 찌꺼기를 집어 넣고 있으니 오히려 더 커져갈 뿐이죠.
그런데 가만히 놔두면 안에 찌꺼기가 가라앉습니다.
이때는 지금까지 내 속에 있던 찌꺼기가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보여요.”(대중)
망상번뇌는 바깥에서 들어온게 아니라 내 속에 있으면서 주인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화두는 이 망상번뇌를 볼 수 있을 정도로 가라앉게 해주는데, 대단하지 않습니까?
내 속에 있는 이 망상번뇌를 화두로 바꾸는 이게 공부입니다.
이건 딱딱 맞아 떨어지는 일이라구요.
화두 드는 수행자는 왜 뜰앞에 잣나무라고 했는지 조사관을 타파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화두 조사관을 타파하고 도를 깨닫는 걸 목적으로 해야지,
하는 도중에 뭐가 나타나거나 뭐가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마세요.
여러분도 오늘부터는 화두를 등불·스승으로 삼고 화두에 의지해서 망상번뇌에
속지 않고 살아가 보세요.
이 좋은 참선법을 만났으니 화두에 인생을 바칠 수 있는 씨앗 되기를 바랍니다.
현대불교신문사 : 박봉영 기자
'묻고 답하기'
<문> 출가를 하고 싶었으나 세연에 얽매여 출가를 하지 못한 불자입니다.
지금도 출가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습니다.
출가하지 못한 우리 재가불자들은 어떠한 공부를 해야 하겠습니까?
<답> 출가가 그렇게 큰 의미가 있습니까.
몸뚱이는 출가를 했지만 마음은 출가 못한 사람도 있고, 몸뚱이는 출가하지
못했지만 마음은 출가했다고 생각하고 수행자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 몸뚱이를 출가못했다고 고민할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은 출가를 했으니, 진실된 수행자의 길을 걸어야겠구나’ 하고 생각하세요.
참선법을 출가의 계로 삼고 화두를 스승으로 삼아 공부해 간다면 이미
출가한 사람과 다름없습니다.
<문> 뜰앞의 잣나무’가 화두가 아니라 그 이전의 뜻, 즉 참생각이 화두라고
하셨는데 참생각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답> 화두라고 하는 것은 당처를 말합니다. 직전자리를 화두라고 합니다.
참생각이라고 하면 거기에는 거짓생각이 존재한다는 것이거든요.
말에 떨어지지 말고 그 뜻에 착안을 하세요.
제가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정전백수자’ 속에 숨겨진 뜻을 화두라고
했습니다.
조주 스님은 이미 뜰앞의 잣나무라는 말과 그 뜻이 둘이 아닌 상태였습니다.
깨달았을 때 화두를 바로 보게 되는 것이지요. 깨닫기 이전에 내가 설명을 한다면
나는 허물을 쌓는 것이고, 여러분은 그 말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화두는 나와 남 또는 주와 객이 둘로 나눠지지 않은 근본자리입니다.
장님에게 아무리 허공을 설명해도 바르게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허공을 보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장님이 눈을 뜨게 만들어야겠지요?
설명이 필요 없는거에요.
설명이 붙을 수 없는 자리를 화두라고 합니다. 장님에게 허공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해줄수록 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문> 참선을 하다보면 전혀 새로운 경계가 나타납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답> 참선을 하다보면 부처님이 환하게 나타날 수도 있고 낙숫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아주 맑아져 빗줄기 소리 하나하나가 달리 들리기도 합니다.
그때쯤 되면 물체와 광명이 보이기도 합니다. 내 몸속에 있는 망상번뇌가 어느
정도 바꾸어졌다는 말이에요.
몸속의 망상을 화두로 바꾼 만큼의 세계가 보이는 것이에요. 이때 보이는 것은
내 몸 안에서 비쳐진 그림자일 뿐입니다. 나한테 없는 것은 삼라만상에도 없어요.
극장에서 영화보는 것을 비유로 들어보면,
우리는 화면에 비친 모습에 울고 웃고 하는데 그게 본질이 아닙니다.
필름에서 비쳐진 그림자를 보고 울고 웃거든요. 공부하다가 비친 것도 화면에
비친 그림자일 뿐이에요. ‘아 이것도 그림자구나’ 하는 생각도 하지 말고 더욱
세밀하게 공부를 해야 합니다.
어떤 경계든지 내 마음의 그림자니까 경계는 보지 마세요.
-
사람다운 이야기
삶에 대한 가치관들이 우뚝 서 있는 나날들에도
때로는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가슴에 품어온 이루고픈 깊은 소망들을
때로는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맑은 생각으로 하루를 살다가도 때로는
모든 것들이 부정적으로 보일 때가 있습니다.
완벽을 추구하며 세심하게 살피는 나날 중에도 때로는
건성으로 지나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정직함과 곧고 바름을 강조하면서도
때로는 양심에 걸리는 행동을 할 때가 있습니다.
포근한 햇살이 곳곳에 퍼져 있는 어느 날에도 마음에서는
심한 빗줄기가 내릴 때가 있습니다.
호홉이 곤란할 정도로 할 일이 쌓여있는 날에도
머리로 생각만 할 뿐 가만히 보고만 있을 때가 있습니다.
늘 한결같기를 바라지만 때때로 찾아오는 변화에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한 모습만 보인다고 그것만을 보고 판단하지 말고
흔들린다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지 마세요.
사람의 마음이 늘 고요하다면 늘 평화롭다면
그 모습 뒤에는 분명 숨겨져 있는
보이지 않는 거짓이 있을 것 입니다.
잠시 잊어버리며 때로는 모든 것들을 놓아봅니다.
그러한 과정 뒤에 오는 소중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희망을 품는 시간들입니다.
다시 시작하는 시간들 안에는 새로운 비상이 있습니다.
흔들림 또한 사람이 살아가는 한 모습입니다.
적당한 소리를 내며 살아야 사람다운 사람이 아닐까요.
-
- 《내 마음의 휴식이 되는 이야기》 중에서
- - Free As A Bird / O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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