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고 수행하는 이유는 이웃과 더불어 살기 위함 / 설우스님
산에서 수좌들을 지도하던 설우스님이 저자에 나타난 때는 2008년 4월이었다. 경남 창원시 용호동 식당가에 홀연히 나타난 스님은 2층을 세 내 포교당을 개원했다. 설우스님이 누구인가. 조계종에서 공식적으로 펴낸 <간화선 지침서> 편찬을 이끈, 선원장이다. 제방의 선원에서 30안거를 보낸 평생 수좌다. 세속 나이로도 환갑에 이르렀으니 납자들을 지도하며 대접 받을 연배다. 가만히 있어도 그간 쌓은 도력(道力)과 정진력만으로, 신도들의 공경을 받으며
지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 설우스님은 산을 내려와 저자 거리에 섰다. 그리고 2년이 흘렀다.
"공부하고 수행하는 이유는 이웃과 더불어 살기 위함"
종단 '간화선 지침서' 편찬 이끈 선원장 재가자 지도 덕목 '정법과 정견' 에 두고 "생활 그대로가 수행이며 공부" 가르쳐
스님은 이곳과 아무런 인연이 없다. 이전에 다녀간 적도,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처음 보는 곳이다. 길을 가다가 생고기 집을 발견하고 저 곳에서 시작해야겠다며 걸망을 풀었다. "생고기 집을 부처님 보궁으로 만들고 싶어" 선택했다고 한다.
2010년 3월 11일 용호동 포교당 주변은 어지러웠다. 서로 눈에 잘 띄기 경쟁을 하는 간판이 시선을 더 어지럽게 만들었다. 오전 10시가 채 안됐는데 포교당은 법복을 입은 신도들로 가득했다. 선원장 스님은 왜 이 어지러운 저자 거리로 내려왔을까.
"우리가 좌복 위에 앉아서 참선하는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 를 알기 위해서다. 그 자리는 부처도 아니고 법(法)도 아니고, 승(僧)도 아닌 본래 청정한 자리임을 확신하기 위해서 수행한다. 이를 상구보리(上求菩提)라고 한다. 그런데 이걸 확신하는데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중생교화를 위해 할 일이 자연스럽게 흐려진다. 지금 우리 신도들은 다 큰 어른이 어머니 젖꼭지를 물고 있는 꼴과 같다. 우리 신도들이 여전히 밖의 환경, 밖의 경계에 의해 마음의 행복과 안정을 찾으려는 상태서 계속 머물고 있다. 물질에 집착해서 행복을 찾으려는 데서 벗어나게끔, 정법을 통해 재가자들을 이끌어
올리는데 선원장 스님들이 나서야한다. 제방에 계시는 선원장 스님들이 좌복에서 훌훌 털고 고통 받고 힘들어 하는 중생들을 위해 그 삶의 참모습, 가치 있는 삶의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겠나 생각한다. 출가 승려는 본래 원력이 중생구제다. 무소유의 삶과 함께 중생을 위해 회향하고자 하는 자유로운 삶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수행자의 역할이며 내가 저자거리로 내려온 이유다"
스님은 정통 선불교를 지향하면서도 기존에 듣고 알던 수행방법, 내용과 다르다. 대개 화두만 집중하고 문자공부는 멀리하라고 배운다. 그리고 생활과 떨어져 좌복 위에서 화두 참선하는 것만 진정한 공부인 것처럼
배운 신도들이 많다. 하지만 스님의 지도는 다르다. 스님은 대승불교의 요체를 비롯해 불교사, 선어록 등을 먼저 가르친다. 바른 견해를 세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드시 실천하도록 지도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통해 배움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스님의 육성을 들어보자.
"재가자 수행을 가르치는데 가장 큰 덕목이 정법과 바른 안목(正見)이다. 무엇이 정견인가. 우리는 모두 관계 속에서 존재하며 보고 듣고 느끼는 마음 자체도 상호 연관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 그래서 사람 속에서, 사람의 도움을 받는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그래서 그 은혜를 생각하면 보살도를 행하지 않을 수 없고 섬기지 않을 수 없음을 아는 것이 정견이다. 즉 선불교가 보살도 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방편임을 알게 해준다는 것이다. 대승보살도의 정신은 곧 중생구제다. 정견을 갖추기 위해 대승보살사상과 조사 선어록 불교사 등을 가르친다. 정견을 세우면 그 다음 믿음을 가져야한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내가 본래 완성된 존재임을, 불성을 가진 존재임을 알고 확신하는 것이다. 본래 중생이라고 하면 세세생생 갈고 닦을 수 있겠는가. 내가 본래 완전한 존재임을 알고 확신을 가질 때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고 끝까지 갈 수 있는 것이다."
정견은 지식을 통해 체득할 수 있지만 내가 본래 부처임을 믿기 위해서는 특별한 과정을 거쳐야한다. 그 방법이 바로 참선이다. 스님은 "생명의 본질 속성은 어떤 것인지 확신해가는 것이 참선이다. 그것을 알아야 마음에 속지 않는다. 체험된 것이 아니면 내 것이 되지 않는다. 체험을 해야 당당해지며 물들지 않는다." 고 말했다.
그러면 참선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참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두다. 화두는 내가 본래 완전한 존재이며 그 자리는 본래 청정한 자리임을 깨닫도록
가는데 반드시 중요한 열쇠다. 화두는 왜 필요하며 어떻게 쓰이는가. 정견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는 분별심이다. 부처와 중생, 보리와 번뇌 등 우리는 구분 짓고 양단을 나누는데 익숙하다. 그런데 '본래 자리' 는 그 같은 양극단, 분별을 초월한다. 그 분별심을 타파하기 위해 동원된 것이 화두다. 그러니까 화두는 정견을 세우고 본래 부처임을 확신하는데 까지 나를 인도하는 방편인 셈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화두 그 자체에 목을 맨다. 화두를 마치 슈퍼마켓에서 물건 사듯이 한다. 때로는 화두를 구세주인 것처럼 받들기 까지 한다.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가족관계 분별하지 않고 佛法대로 자비심 나눠 그를 본 가족들도 같은 믿음 환희심 나게 해야
"본래 조사선은 화두가 없었다. 부처님 가르침인 경전의 진실성을 탐구하고 체험하기 위해 정법에 의지하고 생활 속에서 체득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과정에서 풀 수 없는 생명의 본질 실상이 해결이 안돼 선지식을 찾아갔다. '달마서래의' 라는 질문은 생명이 본질적으로 어떤 실상을 가졌는가를 물은 것이다. 부처와 중생, 열반과 생사, 번뇌와 반야, 상대성을 갖고 묻는 제자에게 스승은 질문을 받는 즉시 양단 구분 짓는 그 사고를 한순 간에 부셔준다. 본래 우리 불성 자리는 부처와 중생의 자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비어있는 그 세계' 청정한 부처의 참 모습이 작용하는 세계는 상대성을 초월한다. 그것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 '똥막대기' 라 하고 '동산수상행(東山水上行)'
이라고 하고 '뜰 앞의 잣나무' 라고 하는 것이다. 화두는 이처럼 본래 진실 되고 생명 작용이 자유로운 불성세계로 들어가게 해주는 직로(直路) 열쇠다.
화두가 목적이 아니다. 방편이다. 그런데 지금 풍토는 어른 스님을 찾아가서 화두를 받아 참선하는 것이 마치 슈퍼마켓에 가서 물건을 사듯 화두를 타서 좌복 위에 앉는다. 그리고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공부를 하는지 관리 시스템이 없다. 바른 길로 가는 지도 모르고 대승보살도 원력 정립도 안된 상태에서 마냥 앉아 있는 것이다."
화두를 갖고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가. 의심이 끊이지 않아야한다. 그런데 억지로가 아닌 너무나 간절하고 좋아서 저절로 그렇게 되어야한다. 어떻게 하면 저절로 될까. "70 노파가 외아들을 전쟁터에 보내고 살아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심정만큼 세상에 절실한 마음이 있을까. 그 마음은 절대적이다. 그래서 밤이나 낮이나 꿈속에서도 자식 살아 돌아오라는 염원뿐이다. 끊어지지 않고 절실한 화두란 바로 이와 같다. 행복은 본래 완성됐음을, 나와 타인이 모두 본래 완성된 부처임을 알고 한없는 연민을 느끼고 이 길을 가면 종내 완성된다는 그 믿음이 바로
전쟁터에 보낸 자식 마냥 화두를 절실하게 간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믿음이 없으니까 화두가 자꾸 끊기고 인위적이며 억지로 붙들고 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공부하고 수행하는 이유가 이웃과 더불어 살기 위함이며 그 속에서 행복을 찾음을 알게 되면 행은 곧 생활이 된다. 그것이 바로 생활 수행이다. "생활을 떠난 불법 수행은 있을 수 없다. 공부한다면서 가족을 소홀히 하고 무시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아니다. 생활 그대로가 수행이며 공부다. 부딪히는 경계가 모두 내 공부가 된다. 가족관계를 분별하지 않고 부처님 가르침 그대로 자비심을 나누고
부처님 가르침 그대로 수행법을 드러내 가족도 그 사람을 보고 환희심이나 같은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 진정한 공부다."
스님이 저자에 내려온 지 2년 만에 신도가 넘쳐나고 생고기 집이 부처님 보궁으로 탈바꿈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스님의 말씀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공부하고 수행하는 이유는 대승보살도를 행하고 회향하기 위함이라는 그 한 마디에 사람들은 눈이 번쩍 뜨였다고 한다. 좌복 위에 얼마나 오래 앉아 있는가로 자신의 공부 깊이를 재던 사람들이 그 계량법이 얼마나 허무하고 잘못인가를 알게 됐다. 공부한다며 가정을 등한시 하고 가족 이웃을 멀리하던 사람들이 주변 사람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람들을 변화시킨 것은 스님의 말이 아니다. 삶 그 자체다. 행동 속에서 보이는 진실함.자비가 넘치는 말과 행동이 사람들을 움직였던 것이다. 수행하면 자비심 넘치는 도인이 됨을 몸소 보였기 때문이다.불교신문에서
나무관세음보살
- 불교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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