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과 재앙의 근본은 무엇인가?

2013. 4. 11. 20:5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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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과 재앙의 근본은 무엇인가?

 


산을 옮기는 것도 가능하며, 방위를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한 번 정해진 업은 피할 수가 없다.

보연의 업은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선과 악이다.
선하면 복으로 보답하고, 악하면 화로 보답한다.

복과 재앙이 동일하진 않지만, 모두 보연에 속하므로 모두 업이라고 이름한다.
업으로 정해진 이치는 길가는 사람이 만나는 경계와 같다.

30리에 다리 하나, 50리에 전포 하나를 기준으로 하고,
다다른 이수에 의해서 다리와 점포를 설치한다.

이것은 성현이라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선악의 생각은 하늘에서 내려온 것도 아니고 땅으로부터 솟아난 것도 아니다.

한결같이 미망의 정 때문에 제 스스로 결박을 했을 뿐이다.
3세와 오랜 세월을 통해 인연 때문에 만나는 복과 화는

마치 30리를 가서 다리를 만나고 50리를 가서 점포를 만나는 것처럼

털끝만큼도 착오가 있을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은 어진 사람이 요절하고, 포악한 사람은 도리어 장수하며,
거역하는 자는 길하고, 의로운 자는 흉한 것만을 볼 뿐이라고 한다.

그러니 옛날에 지었던 것을 지금에 받고,
지금에 지은 것은 후세에 받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이를 두려워하여 업을 짓지 않을지언정,
오는 과보를 받지 않는자가 어찌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인이 하늘을 원망하지도 않고

사람들을 탓하지도 않았던 것은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한다.
실제로는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가령 그것을 알았다면 복이라 해서 기뻐할 것이 없으며,
재앙이라 해도 슬퍼할 것이 없다.
기쁨을 잊었는데 무엇 때문에 허망하게 한 생각이라도 내어

그 복에 반연하려 하겠는가?

또 슬픔도 잊었기 때문에 차라리 죽을지언정 억지로 속임수나

계책을 늘어놓아 재앙을 피하려 하지 않는다.

더러는 구차하게 구하여 얻기도 하고,
구차하게 피하여 면한 자들도 있긴 하다.
그러나 이도 한 번 정해진 업으로서 당연한 것이지

우연히 구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구차하게 하는 짓이 쓸모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복을 좇고 재앙을 피하려는 생각은 저절로 없어진다.

사념의 자체가 공해지면 간직한 마음자리도 공해져서 도에 회합한다.
불조성현의 해탈한 방법이 모두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일부러 조작하는 것이 없다면 이는 저절로 빼어나게 되고,
사는 자연히 수승해진다.
이가 빼어나고 사가 수승해지면 온 법계안의 한 티끌이라도

나의 장엄한 세계에 있지 않는 것이 없다.

이것을 뚜렸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과 증오가

그의 알음알이를 결박하고, 좋은 것은 갖고 싫은 것은 버리려는

망상에 어지럽혀진다.

그리하여 모든 괴로움의 인연과 함께 미래로 들어가 혹독한 고초를 받는다.
그러나 정해진 분수의 업이 한결같이 자기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한다면, 정말이지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토지가 비옥하면 심어진 곡식이 반드시 풍성해지고,

샘이 깊으면 물이 마르지 않는다.

또한 저축한 것이 많으면 살림살이가 풍족해지고,

인이 원만하면 그에 따르는 과도 반드시 원만해진다.

이는 천하 고금의 변함없는 진리이다.


천목 중봉선사 [동어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