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따라 나타나는 법성/ 법륜스님

2013. 4. 18. 20:4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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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게(法性偈)


인연 따라 나타나는 법성/ 법륜스님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증지(證智)란 "깨달음의 지혜"를 뜻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관념을 벗어나야 알 수 있지, 관념의 울타리에
갇혀서는 알 수가 없어요.

같이 공부하던 사람 중 한 사람이 앉아서 졸다가 뱀꿈을 꿉
니다.
"어어~ 뱀 봐라, 뱀. 저거 쫓아내야지."
꿈꾸는 사람에게 뱀은 실재하고 있어요.

꿈에서 깨어나야 그것이 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꿈속에
있을 때는 깨어 있는 사람과는 얘기가 안 됩니다.

깨고 나면 뱀이 없다는 것을 아는데,깨지 않았을 때는 뱀이
분명히 있어요.
그럼 이것이 왜 그러냐?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렇습니다.
꿈이란 생각하고 있는 중이라는 말입니다.

부부가 싸울 때는 자기 중심의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있어요.
그 때는 분명히 옳고 그른게 있습니다.

누에고치가 자기 입에서 나오는 실로 고치를 만들고 그 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우리는 자기가 일으킨 생각에 갇힙니다.
거기서 한 발짝도 못 나오죠.

잠을 깨야 꿈인 줄 아는 것처럼, 우리는 이 생각의 벽에서 벗
어나야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 법문 듣고 마음의 문이 열린 사람들이
불렀던 그 기쁨의 노래가 있습니다.

"위대하셔라 세존이시여. 위대하셔라 세존이시여. 마치 넘어
진 자를 일으켜 세우심과 같이, 덮힌 것을 벗겨내심과 같이,
길 잃고 헤매는 자에게 길을 가르쳐 주심과 같이, 어두운 밤
에 길 잃고 헤매는 자에게 등불을 밝히심과 같이 저희에게
법의 진실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승단에 귀의합니다."

그래서 이 노래는 신도가 되고 출가자가 되기를 요청하는
노래가 되었어요.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오라 비구여."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의 눈이 열려야 됩니다.
어리석음이 사라지고 마음의 문이 열린다는 건 어제까지는
도둑이었거나 살인 강도였거나 창녀, 똥꾼, 천민이나 상놈이
었다 하더라도깨달으면 마치 꿈속에 있다가 잠 깬 사람과
같은 겁니다.

이것이 증지(證智)로,어떤 논리나 주장이 아니라 깨달아서
아는 지혜입니다.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진성(眞性)이란 참된 성품을 말합니다.
법성(法性)의 다른 표현이지요.
진리의 성품은 이와 같이 깊고도 미묘해서 자성을 지키지 않고
인연 따라 나타나도다.진리는 깊고 그 작용이 지극히 묘해서
우리가 이해하는 차원에서는 상상할 수가 없어요.

자기가 농사를 짓고는 그 수확을 남 주면서 기뻐하는 선지식
이나, 자기가 하고 싶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항상 지옥에 가 있는 지장보살이나, 원효대사 같은 분을 우리
가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대사께서는 세상에서 온갖 추앙을 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
하고 다 버리고, 천대받던 뽕 따는 아낙네와 뱀 잡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춤추고 노래했어요.

한 번 붓을 들었다 하면「대승기신론소」나「금강삼매경론」같
은 책을 저술하는 등 어떤 지식인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불법
을 꿰뚫는 존경받는 학승이었음에도 그것을 내려놓고 길거리로
나가 모든 중생과 함께하여"승속"의 모양에 구애받지 않고
불법을 전파했어요.

물이 특정한 자기 형태를 갖고 있지 않아 그 그릇 따라 모양이
바뀌듯이 원효대사께서는 여러 모습으로 세상에 나투셨는데,
이것을 "화작(化作)"이라 합니다.

「천수경」에 `죄라 하고 업이라 할 스스로의 성품이 없고
그것은 마음 따라 일어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죄(罪)다 업(業)이다 할 씨앗이 없으며,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
따라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만약 어리석은 이 생각만 사라지면 죄 또한 없어진다
는 것이죠.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불수자성(不守自性)`이란
"스스로의 성품을 지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약이다 독이다, 길다 짧다, 깨끗하다 더럽다 하는 이런 스스
로의 성품을 지키지 않는다.

근본 불교의 "나[我]"라 할 것이 없다, "실체가 없다"는 것
과 같고, 대승불교의 "비어 있다[空]"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이것은 밥그릇이고 저것은 국그릇이고, 또 저 먼 것은 찬그릇
이라고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밥을 담으면 밥그릇, 국을
담으면 국그릇, 찬을 담으면 찬그릇이 됩니다.
이것이 법(法)의 실상입니다.

스스로의 성품이 없어서 인연 따라 이루어지는데[隨緣成], 이
말은 아주 중요합니다.

보약으로 유명한 인삼도 본래는 약(藥)도 아니고 독(毒)도
아닙니다.
그러나 인연 따라 약성을 나타내기도 하고 독성을 나타내기
도 하고, 효과 없을때도 있고,처음은 약효를 나타냈다가도
나중에는 독성을 나타내기도 하고, 먼저 독성을 나타냈다가
나중에는 약효를 나타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인연 따라 잠시잠시 일어나는 것이지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지요.
물거품 같고 허깨비 같으며, 아침이슬이나 번갯불 같고,
꿈 같고 그림자와도 같습니다.

[금강경 사구게에 보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주먹질"을 예로 들면, 그 자체는 선한 행위도 악한 행위도
아닙니다.
길을 가는데 강도가 여자한테 칼을 들이댔어요.

그 때 마침 길 가던 사람이 재빨리 강도에게 주먹을 날려
여자를 구했어요.
그러면 용기 있는 사람이라 하여 시민상을 줍니다.

그런데 집에서 부인과 다투다가 주먹질을 했어요.
그러면 폭력범이 되지요.
주먹질이라는 행위 자체는 제법(諸法)의 본질에서 보면 선(善)
도 악(惡)도 아니고, 옳고 그른 행동이 아니지만, 현상계에서
는 인연 따라 선악과 시비가 결정됩니다.
이것을 알아야 자유로워집니다.

"신발 신고 방안에 들어오는 것"이 바른 행동인가
그렇지 않은가?
한국에서는 바르지 못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바른 행동이죠.
미국에서는 신발 벗고 다니면 예의 없는 사람이 되고, 인도에
서는 부처님 전에서는 양말까지 벗어야 합니다.

한국에서는 어른한테 인사하려면 얼른 가서 신발을 벗고 양말
을 신는데, 인도에서는 다 벗어야 됩니다.
바닥이 흙투성이여도 신발과 양말을 벗어야 됩니다.
미국에서는 신발을 신어야지 신발을 아무 데나 벗으면
 결례입니다.
그러니까 그 `신 신고 양말 신는` 행동 자체는 본래 옳고 그른
것이 없어요.
인연 따라 이루어지는 도리임을 알아야 됩니다.

인연따라 공부지어지는 법륜스님의 법문 보내드렸습니다

불공부는 잘 보고 行 하는것도 참공부의 하나입니다 



그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