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부처님을 모시며 살자/보성큰스님

2013. 5. 16. 22:3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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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부처님을 모시며 살자 5월 17일은 부처님오신날입니다. 이 부처님오신날에는 모든 불자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마치 자신의 생일이라도 맞이한 듯이,
또는 자신의 생일 이상으로 즐거워합니다. 일상생활을 통해서 볼 때
우리가 아주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날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늘 ‘잘 살고, 좋은 인연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애를 쓰고는 있지만, 뜻과 같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묘한 것이 있습니다. 즐거움과 기쁨을 ‘나’ 스스로에게서 찾기보다는, 형편이 좋고 환경이 훌륭한 주위의 분들과 ‘나’라는 존재를 비교하면서 찾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비교하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비교의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나를 많이 힘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곧 나의 욕심이 비교의 기준이 되면 나를 힘든 쪽으로, 불행한 쪽으로 이끌어 갑니다. 원효스님께서는 [발심수행장]을 통하여 설했습니다. 대저 모든 부처님이 적멸궁을 이루심은
다겁 생래 욕심놓고 공행을 한 까닭이요 중생들이 윤회하며 불타는 집 넘나듦은
무량 세월 탐욕심을 놓지 못한 때문일세.. 諸佛諸佛(제불제불) 莊嚴寂滅宮(장엄적멸궁)
於多劫海(어다겁해) 捨欲苦行(사욕고행) 衆生衆生(중생중생) 輪廻火宅門(윤회화택문)
於無量世(어무량세) 貪慾不捨(탐욕불사) 사욕과 탐욕. 욕심을 버리는 것과 욕심을 채우며 사는 것. 이것이 부처님과 중생의 갈림길입니다. 한 쪽에서는 욕심을 버리려 노력하고 한 쪽에서는 욕심을 채우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쪽을 가고 있습니까? 잘 살아야 되겠고 좋은 환경 속에서 훌륭한 일을 많이 하며 살고자 하는 생각은 있는데도, 욕심을 버리는 ‘사욕’과는 너무나 반대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만약 이렇게 살고 있다면 내 뜻대로 안 된다고 투덜대지 마십시오. 오히려 뜻대로 잘 되지 않을 때 ‘내 욕심이 과하지 않는 지’를 되비추어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욕심을 조금씩 걷어내어 보십시오. 욕심을 걷어내고 보면 이곳이 극락세계입니다. 모든 것이 그대로 선지식 입니다. 절대로 괴롭다고 하지 마십시요. 실제로 견디기 힘들만큼 괴롭다기 보다는, 내가 괴롭게 보고 괴롭게 받아 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부처님의 설법은 영원토록 변함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오직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금도 되고 은도 되고 돌도 되고 흙도 됩니다. 우리는 부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과연 부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화엄경]의 말씀을 간추려 엮어 보겠습니다. 원수거나 친한이를 가릴 것 없이부처님은 모두에게 평등하시고 대자비로 때와장소 가리지않고중생들의 선지식이 되어주시네 기꺼이 육신도 버리시거늘하물며 내게딸린 재물이리요 스스로를 아끼는 마음보다는중생들의 소원을 가득히 담고 몸으로는 남의몸을 구해주시고목숨으로남의목숨 대신하면서 온 몸으로 중생을 구해주시되환희할 뿐 후외하는 마음없도다. 삿되고 그릇된 일 멀리하시고소박하고 고된일을 친히하시나 업의성품 본래공함 능히 알기에한 순가도 진리를 떠남이 없네 귀한이나 가난하고 미천한 이들대자비로 평등하게 인도하시고 일체중생 건지시는 우리부처님깊고깊은 대자비심 다함 없어라. 이것이 부처님 마음이요. 부처님의 재산입니다. 부처님의 마음과 재산은 다른것이 아닙니다. 지혜와 자비입니다. 그 넘치는 자비로 어떻게 하면 눈 뜨고도 봉사 노릇을 하고 있는 중생들로 하여금 눈을 잘 쓸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인가?를 늘 알뜰히 살피고 이끌어 주십니다. 실로 부처님께서는 여러 경전을 통하여 거듭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일체중생을 두루 살펴보건대 모두가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고 있도다. ( 普觀一切衆生 具有如來 智慧德相) 이것을 분명히 깨친 부처님이기에, 그 분은 오직 한 생각만 하셨습니다. 그 한 생각이 무엇입니까? 바로 중생제도입니다. 자기가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참된 나’, 여래의 지혜와 덕성을 갖춘 ‘참된 나’를 개발시켜 중생을 부처로 탈바꿈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그럼 ‘참된 나’란 무엇인가? 바로 참된 부처님입니다. 먼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십시오. ‘내가 어떠한 부처님을 어떻게 모시고 있는가’를. 대부분의 불자들은 나름대로 부처님을 모셨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어떠한 부처님을 모셨습니까? 법당에 계신 등신불을 모셨습니까? 복을 주는 부처님, 영가를 천도해주는 부처님을 모셨습니까? 물론 그와 같은 부처님을 모시는 것도 불자의 도리입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근본 뜻에 비추어 본다면 그 어떤 부처님보다도 ‘참된 나’라는 부처님을 잘 모셔야 합니다. 참된 나! 그 ‘참된 나’라는 부처님은 잠시도 ‘나’와 떨어진 적이 없습니다. 매일 밤마다 내가 모시고 자는 부처님이요, 아침마다 언제나 함께 일어나 같이 움직이는 부처님입니다. 이 부처님이야말로 우리가 지성으로 모셔야 할 으뜸가는 부처님입니다. 우리는 누구 할 것 없이 ‘참된 나’라는 으뜸가는 부처님과 언제나 함께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 부처님을 어떻게 모셔야 할까요? 기쁜 마음으로 즐겁게 모셔야 할까요? 얼굴을 찌푸려가면서 괴롭게 모셔야 할까요? 당연히 즐겁게 잘 모시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참된 나’를 찾는 일을 게을리 할 때 우리는 죽은 사람이 되고, ‘참된 나’를 찾는 일을 부지런히 할 때 우리는 산 사람이 됩니다. ‘참된 나’와 더불어 즐거운 생각을 가질 때는 즐거운 사람이 되고, 괴로운 생각을 가질 때는 괴로운 사람이 됩니다. 복되게 생각할 때는 복된 사람이 되고, 가난하게 생각할 때는 비참한 사람이 됩니다. 사월 초파일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일이지만, 우리가 잘 때 함께 자고 일어날 때 함께 일어나 함께 움직이는 그 부처님은 매일 매일이 생일입니다. 날마다 생일입니다. 과연 날마다 생일인 그 부처님을 어떻게 모시렵니까? 즐겁고 복되게 모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참된 나’라는 부처님을 잘 모시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먼저 ‘참된 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잘 모실수 있습니다. ‘참된 나’라는 부처님은 우리의 속을 환히 들여다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병을 치유하는 절대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정녕 지금의 우리는 나름대로의 병에 걸려 있고 길을 몰라 헤매고 있습니다. 몸이 아픈 병을 비롯하여 돈이 벌리지 않는 병, 자식이 공부를 못하는 병, 욕심대로 되지 않는 병, 재앙이 많은 병 등 차근차근 따지고 보면 병에 걸려 있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병을 치료할 방법을 알고 있는가? 물론 아닙니다. 병을 치료할 길을 모릅니다. 그래서 끝없이 헤매고, 마침내는 허무하게 죽어 갑니다. 다행히 불교를 믿는 우리 불자들은 큰 길잡이이신 부처님께 그 길을 묻습니다. “부처님! 저는 이러이러한 병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 병을 벗어나 병 없는 삶을 살게 하소서.” 그러나 법당에 계신 대부분의 부처님은 대답이 없습니다. 그럼 누가 가장 빨리 답을 주는가? 바로 ‘참된 나’라는 부처님입니다. 밤에 잘 때 함께 자고 일어날 때
함께 일어나는 그 부처님은 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배고픈 부처도 아니요 돈이 없어 궁한 부처님도 아닙니다. ‘참된 나’의 부처님은 어두운 밤에도 밝게 가는 부처입니다. 그 부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바른 길을 일러줍니다. 병을 낫게 하는 방법을 다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된 나’의 음성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바른 길을 찾아 병으로부터 해탈할 수 있습니다. 잘 때 함께 자고 일어날 때 함께 일어나는 ‘참된 나’라는 부처님은 훌륭한 의사와 같아서 환자를 잘 진찰하여 병을 낫게 해 줄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자비심입니다. 모든 병을 낫게 해 주는 자비심은 역사 속의 부처님들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의 부처님에게도 있습니다. ‘참된 나’의 작용인 자비심은 어느 때고 우리의 병을 고쳐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속에 있는 자비심을 굳게 믿고 밖으로 꺼내기만 하면 그 어떠한 병도 치료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 ‘참된 나’라는 부처님의 음성을 듣고 자비심을 발현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한 마디로 ‘멈출 것(止)’을 청합니다. 무엇을 ‘멈추라’는 것인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나아가는 생각. 밖으로 밖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생각,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번뇌망상을 멈출 줄 알아야 합니다. 생각이 그릇된 길로 나아가는 것을 멈출 줄 알아야 합니다. 멈추려면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관(觀). 곧 바라보면 멈춥니다. 내가 탐욕에 빠져 있다는 것, 분노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 어리석게도 이기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번뇌망상에 휘둘리고 있다는 것을 관찰하고 바라보는 순간 그 생각들은 저절로 멈춥니다. 그렇게 멈추게 되면 ‘참된 나’라는 으뜸가는 부처님의 음성을 저절로 들을 수 있게 되고, 으뜸가는 부처님 속의 대자비심이 용출됩니다. 참된 음성을 들어 나아갈 길을 알고 대자비심이 용출되는데 고치지 못할 인생의 병이 어디게 있겠습니까? 또한 으뜸가는 부처님의 자비심은 누구나 다 감싸안습니다. 백살이 된 노인도 어린애처럼 안아주고, 문둥이도 안아주고, 살인자도 도둑도 박복한 중생도 모두 모두 감싸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뜻! 바로 이것입니다. 대자비의 구현이 부처님의 오신 뜻입니다. 탐. 진. 치로 흘러가는 생각을 멈추고 우리가 진정으로 모셔야 할 으뜸가는 부처님인 ‘참된 나’를 깨달아, 무한자비 속에서 자타를 함께 감싸안아 모든 병을 치유하는 것! 이것이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뜻이라는 것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참된 나’의 음성을 듣고, ‘참된 나’가 가고자 하는 길로 나아가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번뇌의 도둑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참된 나’의 뜻, 부처님의 뜻을 배우는 불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길로 나아가고 이러한 불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먼저, ‘조그마한 뜻에 끌려 살기보다는 부처님의 뜻을 배우며 살겠다’는 원부터 발해야 합니다. 이 원이 분명한 사람에게는 불행이 스스로 비켜갑니다. 감히 근접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을 따르겠다는 원을 세워 성실한 자세로 임하십시오.
성실한 자세를 가지면 능히 생각을 비울 줄 알게 되고, 성실한 자세로 차분하게 생각을 가다듬으며 불교를 익혀가다보면 필경에는 부처님께서 무슨 가르침을 주셨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결코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부처님을 닮고자 하는 원을 세우고 망상을 비우며 살아가게 되면, 나날이 모든 것이 새롭게 열리고 깨어납니다. 새로운 열림, 새로운 깨어남, 이것을 무엇이라 이름합니까? 자각(自覺) 바로 자각인 것입니다.
자각을 하게 되면 행복의 문이 열립니다. 팔자가 좋은 사람이 됩니다. 가만히 팔자의 ‘여덟 팔(八)’자를 살펴보십시오. 활짝 열어 펼친 모양이지 않습니까? 마음이 닫히고 번뇌망상 속에 갇혀 있는 모양이 아닙니다. 확 열어 제친 모압니다. 부처님께는 “일체 중생이 모두 여래의 지혜와 덕을 갖추고 있는”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우리의 팔자를 새롭게 열어봅시다. 자각의 기틀을 마련하고 행복의 문을 열어 봅시다. 홀연히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허공의 구름을 조아가는 사람, 헛된 번뇌망상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이 아니라 ‘으뜸가는 부처님인 참된 나를 자각하고 대자비를 발현하겠다’는 원을 꼭 세워봅시다. 등불을 밝히고 절을 올리며 이와 같은 축원을 하는 것 이상으로 ‘부처님 오신 뜻’을 잘 받드는 방법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부디 잘 유념하여 실천하고 정진하여 참된 나를 찾고 참된 행복을 이루시기를 두 손 모아 당부드립니다.
나무 사생자부 석가모니불
 
보성큰스님(송광사 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