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7. 18. 16:45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부처님의 차별 없는 평등사상, 환자의 비유와 ‘환자의 경(A3:22)’
곤욕을 당한 글
지난해 초 글을 잘못 썼다가 곤욕을 당했다. 경전에 근거한 글쓰기가 아니라 개인적인 견해를 밝힌 글 이었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어느 법우님이 댓글로 강력하게 항의 하였다.
내용은 이런 것이다. 약이 있는데, 이 약이 잘 듣는 사람이 있고 듣지 않는 사람이 있다. 또 때에 따라 잘 듣기도 하고 잘 듣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세 부류의 사람이 있는데, 이를 포교적 관점에서 글을 쓴 것이다. 문제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마성스님이 몇 해전 불광법회에서 ‘약의 비유’를 법문하였다. 이를 몇 차레 블로그에 올렸는데, 금번 호국연무사 대작불사와 관련하여 다시 한번 사용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째, 약을 먹어도 병이 낫지 않은 사람 둘째, 약을 먹거나 먹지 않거나 병이 낫는 사람 셋째, 약을 먹으면 병이 낫고, 약을 먹지 않으면 병이 낫지 않는 사람
이것이 약의 비유이다. 포교의 대상은 바로 세 번째라는 것이다.
첫 번째의 경우 너무 오염되었거나 타 신앙을 가진 사람들로서 교화대상이 아니고, 두 번째의 경우 스스로 가르침을 찾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따로 교화할 필요가 없지만, 세 번째의 경우 교화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를 가능성이 매우 높은 사람들이다.
세 번째의 경우는 덜 오염된 사람들이고 세상에 덜 물든 사람들로서 청소년과 군인들을 말한다. 따라서 한국불교에서는 이들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하여야 한다.
(진흙속의연꽃, 담마에 의한 정복, 아소까의 담마위자야(Dhammavijaya) 2012-01-29)
글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이 ‘약을 먹어도 병이 낫지 않은 사람’비유와 관련하여 너무 오염된 사람들이다. 이와 관련하여 원글에서는 교도소에서 중죄를 짓고 복역한 사람을 예로 들었다. 그들은 너무 오염되었으므로 약을 먹어도 듣지 않는 사람처럼, 포교를 해도 효과가 없으므로 차라리 그 열정을 청소년 포교로 돌리자는 취지의 글이었다.
그러자 어느 네티즌이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지금까지 교도소 포교를 하는 사람의 입장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고, 그렇게 차별하는 것이 과연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으로 볼 수 있느냐에 대한 것이다. 그러면서 마성스님의 실명을 거론 하면서 험악한 글을 남겨 놓았다.
마성스님의 글에서
이에 대하여 마성스님이 해명하는 댓글을 남겨 놓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입니다.
(마성스님 댓글, 담마에 의한 정복, 아소까의 담마위자야(Dhammavijaya) 2012-01-29)
스님이 남겨 주신 글을 보고서 비로서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경전적 근거 없이 단지 법회에서 들은 이야기를 전달한 결과 오류가 발생한 것이다. 법회에서는 좀더 알기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한 것인데, 이를 곧이 곧대로 받아 들인 것이다.
스님은 경전적 근거를 들어 글을 남겨 주셨다. 그것은 앙굿따라니까야에 있는 ‘환자 경(Gilana-sutta, A3:22)’이다. 경을 보니 아무리 극악무도한 범죄자일지라도 교화를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약을 주어도 약발이 먹히지 않는 환자일지라도 포기 하면 안되듯이, 극악무도한 중범죄자일지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달해주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런 인연으로 언젠가는 가르침을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스님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 경전적 근거 없이 개인적 견해를 올린 것이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한 결과가 되었고, 더구나 스님에게 피해를 가게 한 것이다. 그래서 이후로 철저하게 경전을 근거로 한 글쓰기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사실이 아니면 쓰지 않기로 하였다.
비교한다는 것은
최근 전재성박사의 앙굿따라니까야를 구입하였다. 진열만 해 놓고 있을 뿐 읽어 보지 않고 있다. 다만 필요한 부분만 보고 있다. 대부분 상윳따니까야와 중복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윳따니까야에 보이지 않는 가르침도 있다. 위에 언급된 ‘환자의 경’이 대표적이다. 그래서 초불연의 번역과 성전협의 번역을 비교해 보기로 하였다.
비교한다는 것은 가혹한 것이다. ‘고저 장단’ 등 우열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말로 번역된 니까야를 비교하고픈 것은 ‘호기심’에 기인한다. 대체 어떻게 다르게 번역하였을까에 대한 것이고, 또 어느 번역이 원문에 더 충실한 것인가,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얼마나 충실하게 전달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이렇게 한번 호기심이 발동하자 이를 표로 만들게 되었다.
환자의 비유 첫 번째 문장
환자의 경은 크게 두 파트로 나누어져 있다. 위에서 마성스님이 인용한 것과 같다. 그러나 번역비교표에서는 첫 번째 파트만 취급하였다. 환자의 비유에 대한 것이다. 이것도 두개로 나누었는데 첫번째 문장을 보면 다음과 같다.
labhanta : [pr.p. of labhati] getting; obtaining; attaining.。 alabhanta: [na+labhanta. thã-nitea alabhantã] 얻지못하는, sappàya: [adj.] beneficial; wholesome; suitable.。 bhojana: [nt.] food; meal.。 bhesajja: [nt.] medicine.。 patiråpa, (adj.) fit; proper; suitable; befitting.。 upaṭṭhàka: [m.] a servitor; a nurse; a follower.。 vuṭṭhāti, vuṭṭhahati: [<ud-sthà または vi-ud-sthà] 立ち上る, 出定する, 出罪する, 出起する, 現われる, 戻る. pp. vuññhita; caus. vuññhàpeti。 tamhà:=tasmà それより, それ故に.。 àbàdha, (m.) disease; affliction.。 upaññhàti: [upa + ñhà + a] waits or attends on; cares for; nurses; serves; understands.。
번역표를 만든 것은 순전히 호기심때문이다. 누군가의 번역이 잘못되었다든가 음해할 목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단지 있는 그대로 비교해 보기 위함이다. 시중에 두 종류의 번역이 있기에 비교해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 가지 차이점이 있는데
빠알리원문, 초불연, 성전협, 영문을 비교해 보면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초불연 번역에서 생략된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초불연번역의 첫 번째 비유를 보면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환자는 적당한 음식을 얻건 못 얻건 간에, 병이 회복되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원문과 다른 것이다.
원문에서는 “vā sappāyāni bhojanāni alabhanto vā sappāyāni bhojanāni, labhanto vā sappāyāni bhesajjāni, alabhanto vā sappāyāni bhesajjāni, labhanto vā patirūpaṃ upaṭṭhākaṃ, alabhanto vā patirūpaṃ upaṭṭhākaṃ, neva vuṭṭhāti tamhā ābādhā.”라고 되어 있어서, ‘음식(Bhojana)’ 뿐만 아니라 ‘약(Bhesajja)’ 과 ‘간호(upaṭṭhàka)’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불연에서는 왜 원문과 달리 음식 하나만 예를 들어 설명한 것일까? 그것이 궁금하다. 아마도 원문의 뜻을 더 전달하기 위하여 과감하게 원문을 과감하게 생략한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약발의 효과에서
첫째, 약을 먹어도 병이 낫지 않은 사람, 둘째, 약을 먹거나 먹지 않거나 병이 낫는 사람 셋째, 약을 먹으면 병이 낫고, 약을 먹지 않으면 병이 낫지 않는 사람
라고 설명하면 의미가 확연히 와 닿듯이 그런 효과를 노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이는 워문을 심각하게 훼손한 탈역이자, 의역이라 보여진다. 그렇다면 타 번역자들의 것은 어떠한가?
전재성박사의 번역을 보면 음식 뿐만 아니라 나머지 것도 언급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자양분, 의약품, 간병인 이렇게 세 가지를 모두 언급하여 반복구문으로 처리하였다. 빠알리 원문도 Bhojana(음식), Bhesajja(약), upaṭṭhàka(간호) 이렇게 세 개의 용어를 사용하여 반복구문으로 되어 있다. 영문번역 역시 마찬가지이다. Food(음식), medicine(의약), attendant(보호)라는 용어를 모두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초불연 번역은 심하게 의역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원문대로 번역되어 있지 않고 자의적으로 해석되어 번역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은 비교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환자의 비유 두 번째 문장
다음으로 환자의 비유 두 번째 문장을 보면 다음과 같다.
두 번째 문장의 번역을 보면 대체적으로 원문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번역어를 보면 다르다. 이를 비고란에 표시 하였다.
가장 큰 차이점은 Must용법이다. 초불연에서는 “음식을 얻을 때에만” 이라든가 “간호해야 한다”라는 표현을 하여 반드시 해야 함을 강저하였다. 이는 영문번역에서도 볼 수 있다. 영문번역에서 “should be attended(간호되어야 한다)”라고 표현된 ‘should be p.p’ 용법과 유사하다. 그러나 성전협의 번역은 “자양분이 결여 되지 않고” 라든가 “간병인이 결정된다” 또는 “간호 될 수 있다”라는 표현을 하여 ‘must’ 용법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는?
두 번째 문장에서 중요한 것은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환자를 조건으로 다른 환자들도 간호될 수 있다.(imañca pana bhikkhave gilānaṃ paṭicca aññepi gilānā upaṭṭhātabbā. A3:22)”라는 내용이다. 바로 이 문구가 ‘환자의 경’에서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다. 왜 그럴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다음과 같은 각주를 달아 놓았다.
aññepi gilānā upaṭṭhātabbā: Mrp.II.191에 따르면, 첫 번째의 희망이 없는 환자도 간호를 해서 섭섭하게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하고, 그 때문에 화를 내지 않도록 해야 하고, 그 때문에 괴로운 세계로 윤회하지 말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두 번째의 치료될 수 있는 희망이 있는 환자도 간호해서 빨리 회복이 되도록 조치를 해야 한다.
(aññepi gilānā upaṭṭhātabbā 각주, 전재성박사)
이는 약을 먹어도 듣지 않은 환자일지라도 치료를 포기 하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지금 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있는 자라 할지라도 교화를 포기 하지 말라는 이야기와 같다.
아무리 오염된 자일지라도
삶의 과정에서 오염될대로 오염된 자에게 가르침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소귀에 경읽기와 같은 것이다. 아무리 좋은 약을 주어도 약발이 먹히지 않듯이, 아무리 부처님 법을 알려 주어도 알아 들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공을 들이느니 덜 오염된 청소년이나 군포교에 올인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전에 이와 같은 취지로 글을 썼다. 그러나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한 것이다.
이는 경전을 몰랐기 때문이다. 경에서는 분명히 “길을 따라 올바로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실현하는 그러한 사람들을 조건으로 가르침을 설하는 것이 결정되며, 또한 이사람을 조건으로 다른 사람에게도 가르침이 설해 질 수 있다. (A3:22)”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약을 주면 듣고, 약을 주지 않으면 듣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비유를 포교와 관련지어 말한다면 청소년과 군포교라 볼 수 있다. 이는 가르침에 대한 기회를 주면 얼마든지 포교가 가능한 계층임을 말한다. 그런데 약을 주건 주지 않건 알아서 스스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스스로 절에 찾아가 공부하고, 스스로 경전공부를 하고, 수행처를 찾아 다니며 스스로 자기계발을 하는 사람들이다. 사실 이런 사람들은 포교 대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은 어느 경우이든지 포기 하지 말고 포교하라는 취지로 말씀 하셨다. 그런 내용이 두 번째 문장에 있는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환자를 조건으로 다른 환자들도 간호될 수 있다.”라는 문구이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이 환자를 [허락했기] 때문에 다른 [두 종류의] 환자도 간호해야 한다.”라고 표현 하였다. 같은 뜻이다.
이로 미로어 알 수 있는 것은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교도소에 복욕한 자라 하여 포기 대상이 아니고, 너무 오염되어 부처님의 가르침이 도저히 먹히지 않을 것 같지 않은 자 역시 포기 대상이 아니라 가르침의 대상이다. 또한 스스로 알아서 진리를 찾는 이나, 중간층이나 모두 차별 없는 가르침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대승불교의 일천제 성불불가론
‘환자의 경’을 보면 부처님의 자비사상이 넘쳐난다. 대승불교에서 ‘이 허공계가 다할 때 까지 지옥중생을 남김 없이 제도하겠다’는 보살의 원력 못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대승불교에서는 진짜 모든 중생을 남김 없이 제도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대승불교에서도 포기한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일천제’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모든 존재에게 불성이 있어서 모두 성불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단 하나 예외가 있다. 그것이 바로 부처가 될 종자를 가지고 있다고 보지 않은 일천제이다. 이에 대하여 일본불교학자 마쓰모토 시로는 다음과 같이 논문에서 말하였다.
여래장 사상은 ‘일체중생여래장’20)이나 ‘일체중생실유불성’으로 설하는 까닭에 일반적으로 평등사상이라고 생각되어 왔지만, 그러나 이와 같은 이해는 《열반경》의 내용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즉 이 경의 담무참 역에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즉 일천제는, 불성은 가지고 있지만 영구히 성불하는 것은 불가능하여 윤회를 계속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부등식을 설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물론 나로서도 도생(道生)이 ‘일천제성불’을 주장했다고 하는 것과 담무참 역의 40권 《열반경》 가운데 제11권 이후의 30권 부분 즉 법현 역과 티베트 역과의 대응이 없는 부분에, 일천제의 성불을 허용하는 것과 같은 표현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그 부분에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동일한 것은 삼승각별설(三乘各別說)을 주장하는 유가행파의 《대승장엄론》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즉 이 논서는 어느 부분에서는 ‘일체중생여래장’(IX, 37)이라고 설하면서도, 다른 부분에서는 ‘무인(無因)’(III, 11), 즉 영구히 열반할 수 없는 중생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여래장 사상과 본각사상 / 마쓰모토 시로, 불교평론 [38호] 2009년 03월 10일)
마쓰모토 시로는 논문에서 여래장 사상은 불교가 아니라고 하였다. 힌두교의 교리가 불교에 스며든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불성사상에도 의문을 제기 하고 있다. 그것은 대승열반경에 있는 일천제에 대한 것이다.
대승열반경에서는 ‘일체중생실유불성’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열반경에서 “除一闡提(제일천제)”라는 문구이다. 이는 다름 아닌 “일천제를 제외하고”라고 번역되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에 따르면 일체중생실유불성이라 하였으므로 일천제도 불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단 한가지 안 되는 것이 있다. 일천제는 성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마쓰모토 시로는 “일체중생 가운데 일부분(일천제)은 영구히 성불할 수 없다.(一分不成)”라 하여 대승불교에도 ‘차별사상이 있다’라고 하였다.
부처님의 차별 없는 평등사상
환자의 경에서 부처님은 세 종류의 사람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이를 환자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였다. 문제는 약을 먹으나 먹지나 약발이 전혀 들지 않은 사람을 말한다. 부처님 법을 접해 본적이 없어서 담마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너무나 오염 되어서 도무지 가르침이 먹혀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그렇다고 하여 이들을 포기할 수 있을까? 유일신교처럼 믿지 않는 자, 보기 싫은 자, 나쁜 자들은 지옥에 처박아 놓고 영원히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해야 할까? 불교에서는 그런 논리를 거부한다. 대승불교에서는 모든 지옥중생이 성불할 때 까지 자신의 성불을 유예하는 지장보살의 대원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승불교에도 헛점도 있다. 비록 불성이 있긴 하지만 성불할 수 업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일천제(一闡提, icchantika, 잇찬티카)이다. 선근이 끊어진 까닭에 구제가 불가능한 사람 또는 성불이 불가능한 사람의 대명사로 쓰이는 말이다.
환자의 경에 따르면 구제가 불가능한 사람이라도 가르침을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것이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환자를 조건으로 다른 환자들도 간호될 수 있다.(imañca pana bhikkhave gilānaṃ paṭicca aññepi gilānā upaṭṭhātabbā. A3:22)”라는 문구이다. 이는 ‘약을 먹으면 병이 낫고, 약을 먹지 않으면 병이 낫지 않는 사람’의 비유처럼 청소년이나 군인들이 포교의 대상이긴 하지만, 스스로 알아서 절에 찾아 가거나 공부하는 사람들, 그리고 교도소 등에 있는 오염된 자들 역시 가르침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은 차별없는 평등사상이다.
나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는 것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려야 한다. 그렇다고 길거리의 전도사처럼 ‘예천불지’를 부르짓지 말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법은 청해야 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청하지도 않았는데 설법한다면 듣는 이로 하여금 피곤하게 할 것이다. 그래서 법을 알려 주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더 좋은 것은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누구나 청정한 스님의 모습을 보면 고개가 숙여 진다. 청정한 스님의 모습을 보고 불교에 귀의할 수 있다. 또 행복한 불자들의 모습을 보면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가르침을 알려 주는 것도 좋지만 나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더 좋다. 바로 그것이 진정한 포교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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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과 죽음은 자기가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니며, 자기와 남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원인 없이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다만 태어남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있을 뿐이다.
- 잡아함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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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을 버릴 수 있는 마음 / 관허스님
어느 하나를 절실히 원하다 갖게되면 얻은 것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은 어느듯 짧은 여운으로 자리잡습니다.
또 다른 하나를 원하며 채워진것 보다 더 많이 바라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렇듯 욕심은 끝없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갖고 있을 때는 소중한것을 모르고 잃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현명한 사람은 갖고 있는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갖고 있던것을 잃은 뒤에 그것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는 것은 이미 늦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는 연습을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아직 내게 주어진 시간들이 남아 있기에 그것 또한 감사 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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