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대도(無上大道)는 삼학도(三學道)의 완성

2013. 8. 1. 17:2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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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상대도(無上大道)는 삼학도(三學道)의 완성

 

청화큰스님

 

   

여러 가지 말씀이 많이 있으나 부처님한테 가는 길은 역시 간단명료(簡單明瞭)합니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계()ㆍ정()ㆍ혜() 삼학도(三學道)입니다. 계율(戒律)지키고, 선정(禪定)닦고, 참다운 지혜(智慧)로 해서 부처님의 길인, 그런 성상을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말이 있고 팔만장경(八萬藏經)이 있어 가지가지의 법문(法門)이 많이 있습니다만, 간추리면 역시 귀결점(歸結點)은 누구나가 흔히 알 수 있는 계()와 정()과 혜()의 삼학도(三學道)입니다.

   

이같이 간단명료한 법이 있는데도 사람들은 애쓰고 계행(戒行)을 지키려 않고 또는, 삼매(三昧) 선정(禪定)을 안 통하면은 성불(成佛)이 없는데도 선정을 할려고 않으며 또, 부처님의 지혜(智慧)는 천지우주 만유(萬有)를, 모두를 다 부처님으로 볼 수 있는 평등무차별의 지혜인데도, 무차별(無差別)로 볼려고 않습니다.

삼학도가 오로지 성불의 길로 가는 탄탄대로요 무상대도(無上大道)인데도, 그런 큰 길로 안 가고서 자꾸만 좁은 길로 갈려고 합니다. 계율을 지키지 않고, 삼매, 선정을 안 닦고, 또는 우주만유를 하나로 볼 수 있는 그런 안목도 갖지 않고서는 성불의 길은 없습니다.

   

계율은 불성(佛性)에 따라서 곧, 부처님의 성품 따라서 행동하는 우리말이요 우리 행위입니다. 억지로 누가 만든 것이 아니라 성자의 성품, 불성의 성품 따라서 행동하는 말, 행동하는 우리 행위가 계율입니다.

따라서, 불성(佛性)의 표현양상이 계율인지라, 계율을 지키면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부처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또는, 그와 역으로 우리 마음이 청정히 되어서 청정한 마음을 가지고 청정한 마음대로 행동하면, 그 행동 자체가 계율에 그냥 계합(契合)되는 것입니다.

   

불교에는 ‘인계생정(因戒生定)하고 인정생혜(因定生慧)라, 계율로 말미암아 삼매(三昧)라 하는 고요가 깃들고, 그런 고요로 말미암아 참다운 지혜(智慧)가 나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계율이 없이 고요한 삼매를 구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입니다. 나무 위에서 고기를 구하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특히, 근래에 와서는 서방사회(西方社會)의 풍조(風潮)가 만연(曼延) 함에 따라서, 계율을 무시하고서 삼매에 들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는, 도인이라 자처(自處)하는 사람도 역시 계율을 무시하는 분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부처님의 탄탄대로, 무상대도를 옆길로 빗나가는 행위입니다.

   

계율 지키고 선정을 닦는 참다운 지혜는 무엇인가?

이것은, 중생과 부처와 일체 만유를 둘이 아니고 하나로 보는 평등무차별의 지혜가 참다운 부처님의 지혜입니다. 이와 같은 지혜로 비추어 보면서 계율 지키고 참선, 염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참선, 염불의 방법을 며칠 동안 공부해 왔습니다.

   

오늘 다시 한번 돌이켜 보고서,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참선의 방법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염불의 방법인가? 이런 것을 몇 말씀하고서 오늘 부처님의 성도절(成道節)에 있어서 기념의 말씀으로 할까 합니다.

   

참선은 무엇인가?

‘선시불심(禪是佛心)이요 교시불어(敎是佛語)라, 선()은 바로 부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의 말이라’

따라서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부처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하는, 그 마음을 변치않고서 닦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비록 우리가 화두(話頭)를 들고서 의심을 백날 천날 한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불심(佛心)을 여의면은 그때는 참선이 못되는 것이요, 비록 우리가, 말로는 하나님을 부른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불심을 안 여의면은 그것은 참선입니다.

   

그러면 불심을 안 여읜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이것은 내 자성(自性), 내 본바탕이 부처임을 분명히 느낀다는 말입니다. 또한 동시에 천지우주 일체만유가 모두 부처임을 분명히 느끼는 것이 불심을 안 여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아직은 범부의 자리에 있는지라 여실(如實)히는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래 부처인지라, 그와 같이 느끼려고 애쓰면 애쓴만치, 그러한 인상이 우리 마음에 심어져서 드디어 느끼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선이라 하는 것은, 우리 입으로는 관세음 보살(觀世音菩薩)을 부르든 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부르든 또는 어떤 것을 부르든, 참구를 하든,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라 다만, 우리 마음자세가 불심을 안 여의면 됩니다.

‘내 본바탕이 부처구나!’ ‘천지우주가 부처 아님이 없구나!’ ‘천지우주는 모두가 다 청정미묘(淸淨微妙)한 일체 공덕을 갖춘 부처구나!’ 이같이 딱 느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공부하면은 화두를 드나 또는 염불을 하나, 주문을 외우나, 무엇을 하나, 다 참선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데 있어서, 계행(戒行)이 수반(隨伴)되지 않으면 마음이 청정히 안됩니다. 나쁜 행동 하나 하면 나쁜 행동 하나 한만치, 우리 마음이 오염(汚染)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계율이 기본이 되어서, 죽이지 말라, 훔치지 말라, 삿된 음행 말라, 거짓말ㆍ욕설ㆍ이간질하는 말ㆍ꾸미는 말하지 말라, 술로 우리 마음을 흐리게 하지 말라, 이런 정도의 계율은 지켜야만 불자입니다.

불자가 기본적인 오계(五戒), 누구나 알 수 있는 오계도 못 지켜서는 불자는 못됩니다. 따라서, 그때는 참선도 안됩니다.

우리, 반드시 기본적인 계율을 지키고, 그 위에서 참선하는 공부, 불심(佛心)을 여의지 않는 공부, 그런 공부로 해서, 하루 빨리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成就)해서 부처님 은혜(佛恩)에 보답합시다.

 

 

 

       길과 도(道) - 서정록 / 검은 호수

 

 

              북미원주민이야기 (10)


 

 

우리가 흔히 쓰는 '도(道, Tao)'라는 말은 '길'에서 온 말입니다.
그래서 漢字도 '길 道'자를 씁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길이라는 말보다

도(道)라는 말을 선호하게 되었고, 道라고 하면 뭔가 그럴 듯한, 또는 特別한 것이

있는 것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實際로 도인(道人), 도사(道師)라고 하면 깨달은 자,

또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存在를 말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따라서 도(道)라는 말은 길과 같은 根源에서 나왔지만 어떤 完成, 最終的인 結果,

世俗을 超越한 狀態, 理想的인 境地 등의 意味를 含縮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도(道)라는 말은 멋있긴 하나 쉽게 到達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분히 敎訓的이고 權位的인 雰圍氣마저 풍깁니다.

그에 견주어 이라는 것은 끝이 없습니다. 때문에 쉬었다 갈 수도 있고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길도 있고 저 길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여러 갈래로 갈라지기도 합니다. 길을 가다 보면 논밭도 지나게 되고, 사람도 만나고,

동무도 만나고, 벌레도 만나게 됩니다. 또 꽃도 만납니다.

그리고 그들과 숨결을 나누며 關係를 맺습니다.

 

그런가 하면, 길을 가다가 하늘의 구름을 쳐다보며 이런저런 회상을 할 수도 있습니다.

또 길을 잘못 들어서면 되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도중에 낯선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친구를 만날 수도 있으며,

첫사랑의 여인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또 스승을 만나 가르침을 받을 수도 있고,

남의 집에서 음식물을 얻어먹을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흥분하게 합니다.

에는 그렇게 모든 可能性이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도(道)는 그렇지 않습니다.

도(道)는 規定된 길을 規定된 態度로 定해진 目標를 向해 가야 합니다.

거기에는 選擇의 餘地가 없습니다. 오직 定해진 대로 따라야 하며,

가르침 받은 대로, 훈육 받은 대로 행해야만 합니다.

거기서 벗어나면 이미 도(道)에서 벗어난 것으로 取扱 받습니다.


이렇게 도(道)는 다릅니다. 原來는 같은 意味를 갖고 있었지만 確然히 區別됩니다.

북미 인디언들은  모든 것은 흐르는 물처럼 過程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the way, the pathway)로 表現합니다.

아름다움의 길, 축복의 길, 지혜의 길, 신성함의 길, 균형과 조화의 길,

대지의 길, 전사의 길, 바람의 길, 변화의 길, 인생의 길 등등.


놀랍게도 그들의 社會에는 '宗敎'란 말이 따로 없습니다. 日常의 모든 行爲가 祈禱요,

儀禮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아시아나 서구에는 종교가 따로 存在합니다.

그리고 일상과 종교가 區分됩니다. 自然히 日常의 行爲는 世俗的인 것으로 貶下되고,

宗敎的 行爲가 聖스러운 것, 또는 神性한 것으로 崇上됩니다.

그러나 北美 인디언에게 日常과 宗敎는 分離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宗敎란 오직 日常의 삶 속에서만 意味를 가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理由로 인디언들은 日常의 모든 行爲에서 靈的인 意味를 찾고,

自身이 먹고 입고 쓰는 모든 行爲가 다른 生命에 對해 殺生과 폭력과 저주가 되지 않도록

늘 祈禱하고 感謝하는 生活을 합니다. 그리고 自身을 둘러싼 모든 生命들과 均衡과

調和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自身을 돌아보고 生覺하고 努力합니다.


또 인디언들은 사람이나 動植物, 곤충, 심지어 바위에 이르기까지 모든 存在는 平等

하다고 生覺합니다.

當然히 靈的인 差別도 없습니다. 하지만 日常과 分離된 宗敎를 갖고 있는 文化圈에서는

 宗敎的 行爲가 日常의 行爲보다 높은 곳에 있게 됩니다. 따라서 宗敎의 觀念이나 體係를

가지고 다른 存在의 行爲와 삶을 規定하게 됩니다.

여기서 靈的인 差別과 社會的 不平等이 發生하게 됩니다.

印度의 카스트 制度나 西區의 人間中心主義 思考가 바로 이러한 境遇입니다.


印度의 카스트 制度는 靈的인 差等에 그 紀元을 두고 있습니다.

靈的으로 最下層민 階級인 수드라는 靈的으로 下等한 존在이기에 승려 계급인 브라만이

될 수 없습니다. 生命 世界 亦是 人間을 最高 頂点으로 한 피라미드 형태로 序列化됩니다.

印度의 宗敎的 觀念이 現實과 自然 世界를 規定한 境遇라 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西區의 人間中心主義 思考 역시 聖經에서 비롯됩니다.

어느 것이나 宗敎가 日常的 삶과 分離되어 現實을 規定한 境遇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북미 인디언들에게 現實 위에 君臨하는 宗敎란 매우 낯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 위에 君臨하는 도(道)란 이미 日常의 길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道란 늘 變化가 있고, 關係가 있고, 사랑과 恭敬이 있는 삶 속에, 길 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인디언들의 基本的인 生覺입니다.

그들에 依하면, 이 世上의 모든 存在는 日常의 에서 만나고 關係를 맺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關係는 다시 다른 存在들과의 關係와 겹쳐지고 포개지면서

(重疊) 循環하고 發展합니다.

이것을 인디언들은 '圓 안의 圓', 또는 '生命의 圓'으로 表現합니다.

 

예를 들어, 江가에 있는 조약돌의 圓은 다른 돌들의 圓들과 만나고, 그 圓은 다시

강물의 물방울과 만나고 山의 曲線과 만나고 나무의 잎사귀들과 만나고, 하늘의 둥근

해와 만나고 구름과 만나고 動物의 부드러운 몸의 曲線과 만나면서 擴張됩니다.

그런가 하면, 낮과 밤, 심지어 삶과 죽음도 하나의 圓으로 이어져 瞬環합니다.

 

갓난아이는 長成해 늙어서 죽습니다. 그리고 老人은 다시 새로운 生命으로 태어납니다.

마치 겨울 뒤에 봄이 오는 것처럼 죽음은 새로운 시작을 잉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도 끝도 없이 계속되는 關係의 擴張이 바로 그들이 말하는 '生命의 '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모든 生命은 하나'라는 인디언들의 高貴한 精神이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日常의 삶 속에서 靈的인 價値를 찾는 것이 바로 北美 인디언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삶의 길에서 만나는 모든 存在와 올바른 關係를 맺고 自然과 均衡과

調和를 유지하려면 늘 깨어 있어야 한다고 영적 교사들은 말합니다.

身體的으로나 感情的으로, 그리고 精神的으로나 靈的으로... 무엇보다 自己 內部의 敵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淸淨한 意志를 유지하고, 豫知의 안테나를

바투 세워야 한다고, 또 善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왜냐 하면,

우리가 世上의 연못에 만드는 波紋(波長)은 結局 우리에게 되돌아오기 때문에...

이 世上의 모든 存在는 다 그 나름의 存在 理由가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存在와

올바른 關係를 맺기 위해서는 그들을 恭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디언들이 아이들에게 제일 먼저 다른 사람과 다른 存在들을 恭敬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實際로 그들은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도 恭敬하도록 가르칩니다.

그리고 벌레보다  自身을 낮추도록 가르칩니다.


白人들은 인디언 사회에 학교가 없다고 했지만, 오히려 인디언들에게 '世上은 巨對한

 圖書館이었으며, 그곳의 冊들은 돌들과 나뭇잎들, 풀들, 시내들, 그리고 大地의 성난

太風과 부드러운 祝福을 共有하고 있는 새들과 動物들이었습니다.

' 아이들은 自然 속에서 뛰어노는 동안 宇宙萬物이 生命의 거미집처럼 서로 連結되어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부모와 친척들과 어른들이 하는 것을 따라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부족과 민족의

역사와 법도를 배웠고, 自身의 몸을 준 生命에게 感謝하는 法을 배웠습니다.

親舊들과 協同하고 양보하는 法을 배웠습니다.

자신이 가장 소중히 하는 것을 어려운 가족과 이웃에게 기꺼이 주는 法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인디언 아이들은 日常의 삶 속에서 世上을 理解하고, 生命 世界를 이해하고,

삶을 理解했습니다. 他人과 나의 關係, 그리고 자연과의 關係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神과의 靈的 對話를 通해 自身이 家族과 이웃과 民族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探究했습니다. 어른들은 섣불리 아이들에게 무엇을 注入하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았고, 아이들이 理解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아이들이 따라오지 못하면 기다려 주었습니다. 결코 늦는다고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現代의 敎育은 아이들에게 過度한 知識을 가르치려 듭니다. 理想과 目標를 注入하려 듭니다.

그것도 가슴이 없는 머리로만. 단순히 知識만 傳達하는 關係는 올바른 關係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 關係는 知識은 習得할 수 있을지언정 삶의 智慧는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네카의 靈的 敎師 트윌라니치가 "敎育은 가슴에서 머리로 옮겨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가슴이 이어져 있다면 眞實과 平和 또한 連結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도 같은 理由입니다.


現代의 敎育은 성적이 부진하거나 교과 과정을 따라오지 못하는 아이들을 낙오자나

문제아로 간주합니다. 하지만 인디언에게 낙오자란 없습니다. 문제아도 없습니다.

그들 또한 길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길을 가는 사람은 物質에 對한 態度도 가벼울 수밖에 없습니다. 必要 以上으로 많은 짐을

가지고 길을 가는 것은 오히려 防害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物質을 쌓아 두고

蓄積하기보다는 '나눔'을  實踐합니다.

가진 것이 넉넉하지 못할  때에도 그들은 기꺼이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財物을 내어놓습니다.


아마도 인디언들만큼 남에게 膳物하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도 없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는 선물에는 서구식의 'give and take'의 觀念이 없습니다. 그저 필요한 사람에게,

또는 감사해서 줄 뿐입니다. 때문에 인디언 사회에서 선물은 반대 급부를 지불해야 하는

負擔이나 債務가 아니라, 祝福이며 祝祭가 됩니다.

한번 始作된 膳物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물론 아시아나 서구에도 자선이나

보시, 기부 등 나눔의 文化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個人의 德性에 依存한

것입니다. 그에 反해서, 인디언 社會에서는 시스템 自體가 나눔의 文化를 담보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누구든지 인디언 社會에 들어가면 自然스럽게 나눔을  實踐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디언 社會에서는 物質도 길을 따라 圓의 形態로 움직이며 擴張해 갑니다.

마치 生命들이 길 위에서 서로 關係를 맺으며 發展해 가듯이...


나눔은 사람을 가까워지게 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진정한 나눔은 報答을 願하지 않습니다. 그저 나눌 수 있어서 좋을 뿐입니다.

인디언들의 物質에 對한 態度가 이와 같습니다. 때문에 그들이 가는 길은 自由롭습니다.

거칠 것이 없으므로 쉬이 幸福해질 수 있습니다.


物質은 宗敎와 같지요. 거기에 매이기 始作하면 삶을 規定하고 束縛합니다.

왜냐하면, 物質은 變化를 거부하고 머물려는 屬性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物質은 곧잘 蓄積과 支配의 道具가 됩니다. ...

멈추는 瞬間, 變化를 停止하는 瞬間 自然의 均衡과 調和는 깨집니다.

均衡과 調和가 깨지면 삶은 繼續될 수 없습니다.

인디언들은 바람과 물 같은 사람들입니다.

끝없는 變化 속에 있는 것이 바로 生命 世界의 原理임을, 그것이 自然의 法임을

그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結果보다는 過程을, 도(道)보다는

길을 중시했습니다. 그리고 길에는 늘 靈的으로 成長할 機會와 祝福이 있었습니다.


나바호족 하면 織物로 유명합니다. 그들이 과거에 만들었던 직물은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할 정도로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백인들은 그들의 직물을 보고 기적이라고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구입하려 돈을 썼습니다.

그러나 정작 나바호인들에게 직물의 최종 생산물은 별로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베레 텔킨은 『民談의 力動性』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수지 비널리의 映畵 '나바호의 織物 짜는 女人들'에는 어떤 사람이  織物을 짜는 모습이

簡略하게 묘사되어 있다. 최종 직물이 탄생하는 過程에 단지 몇 분만을 할애하고 있다.

이것은 이 영화를 처음 보는 白人들에게 이상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야말로 나바호인들이 직물을 짜는 태도를 잘 나타내고 있다. 織物 自體는

나바호인들에게 織物을 生産하는 過程에서 나온 最少限의 結果物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염색의 재료를 얻기 위해 藥草를 모으는 過程에서 人間과 植物의 相互作用이라든지,

익숙한 풍경을 가로질러 이루어지는 動物과 그것을 지켜보는 人間 사이의 精神的 交流와

같은, 그들의 環境과 사람들 사이에서 相互的으로 이루어진 關係가 더 重要한 것이다.
나바호 여인이 織物을 짜는 核心的인 理由는 다른 存在들과의 均衡과 調和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織物이 完成되면 미련 없이 必要한 사람에게 膳物로 주거나

必要한 生必品과 交換했습니다.

執着은 길을 가는 사람을 붙들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防害하기 때문입니다.

世上은 잠시도 머물지 않습니다. 머무는 것 같아도, 늘 똑같은 것 같아도 끊임없이 變하고

거듭나고 새로워집니다. 삶이 길인 理由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디언 俗談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당신의 삶이 野生 꽃 같기를
아름다움 속에서 自由롭게 자라고
매일매일 기뻐하기를

인디언 社會에 어르신과 智慧로운 者는 있어도 도사(道師)나 도인(道人)은 없습니다.

지도자는 있어도 위에 君臨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길 위에서는 모두가 나그네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경이가 있고, 自由가 있고, 따뜻한 숨결이 있고,

나눔이 있고, 內的 發展이 있으며, 다함이 없는 生命의 循環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生命과 하나됨이 있습니다. 그리고 失敗도 아름답습니다.

失敗는 또 다른 길의 出發点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道)에는 觀念이 있고, 絶對가 있고, 權位가 있고, 君臨과 差別이 있습니다.

오직 成功만이 환영을 받습니다.
그러고 보면, 인디언들이 500年이 넘는 歲月 동안 白人들의 지배와 탄압을 받으면서도

그들의 靈的인 智慧와 文化的 正體性을 굳게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거듭된 고난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그들의 祖上들이 했던 것처럼 끊임없이 精進하며 모든 存在와 하나되는

길을 갔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인디언들은 모든 生命과 하나 되는 高貴한 길

돌로 쌓은 높은 神殿에 있지 않고 日常의 길 위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길에 眞情한 幸福이 있다는 것을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이 世상에서 가장 큰 敵인 '나'를 이기는 진정한 '戰士의 길'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생태공동체를 일구는 「이장」, 2004년5월호

 

 

 

 

 

누가 이 여인을 아시나요?

 

 

 

누가 이 여인을 아시나요?

비행기는 언제 폭파될지 모르는데

현위치에서 마지막을 지켰던

당신은 산화되어도 이웃을 먼저 살렸던

 

 

누가 이 여인을 아시나요?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했듯이

한 여인의 치마폭이 순간의 재앙을 모두 덮어

마지막 목숨까지 구하셨던

숭고한 이 여인을 누가 아시나요?

 

 

두렵지 않으셨나요?

당신의 뼈가 으스러진 줄도 모르고

실신한 이를 연약한 등에 울면서 업고나온

기체(機體)의 마지막 이 여인을 누가 아시나요?

 

 

말하지 않아도 이제는 당신을 알겠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이제는 사람을 알겠습니다

 

 

천사는 하늘에 사는 게 아니라

뜨거운 가슴에 살고 있었습니다

갸냘픈 여인이 초인이 되고

뜨거운 가슴에 영웅이 살아

하늘이 지켜보셨던 천사라는 걸 알았습니다

 

 

                                         이상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