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8. 15. 17:10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언어나 문자로도 견성을 할 수 있읍니까?
/산방야화
언어나 문자로도 견성을 할 수 있읍니까?
객승이 또 질문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무명의 거친 풀을 헤쳐버리고, 조사
의 가풍을 우러러보는〔撥草瞻風〕이유는 오직 견성을 하려
고 그런것이다'라고 했읍니다. 또 부대사(傳大士: 497∼569)
도 말하기를 '다만 말소리를 막은것도 견성성불을 도모하려
고 그런 것이다'라고 했읍니다. 그런데 이것 말고 따로 견성
하는 이치가있읍니까? 만약 없다면 납자(衲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가령 단펀적으로 견성(見性)을 말한다면 옛시람들이 깨달
은 오묘한 이치를 두루 설명한다 해도 수행에 장애가 될 것
은 없읍니다. 그러나 처음이 잘못되면, 뒤로 가편 갈수록 깨
달음에서 더더욱 멀어지는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대체로 견
성의 이치는 말로써 표현할수 없으며, 생각으로 알수가 없으
며, 분별할수도 없으며, 취하거나 버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의 작용은 아주 위대하고 그것의 본체는 완전한 것
입니다. 그대들이 한 털끌만큼이라도 알음알이를 가지고 있
으면, 본체를 마주 하더라도 계합할 수가 없습니다. 요즈
은, 눈 있고 귀 있는 자들치고 어느 누구인들 견성을 말하지
않는자가 있겠읍니? 그러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견성에 대하
여 질문을 받으면 있는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틀린다'고 대
답합니다. 그리고는 교학에서 말하는 '법(法)은 마음에서 나
온 것이다'라는 말을 억지로 끌어들여 자기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읍니다.
여러분들에게 다시 말하겠습니다. 말로하면 말이 옳지만
깨달음이란 깨달아야만 분명해집니다. 그러니 견성이란, 언
어나 문자를 매개로 하여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깨달음에
서는 멀어져 가고 맙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명근(命根)
이 끊어지고 주체와 객체가 없어진 자리에서 깨달은것이 아
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5음(五陰).6식(六識) 따위에 의지하
여 알음알이 만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그저 말로 할 때에
는 견성한 듯 하지만 정확하게 말해보면 미혹한것이 아닐 수
없읍니다. 다시는 그대의 무명과 사망(邪妄)이 멋대로 발생
하는대로 지껄이지 마십시요. 말할 때에는 엄연히 두개의
본성이 있는듯하니 어찌 일관성 있게 생각을 하는 것이겠습
니까?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은 견성을 한 사람에게는 오히
려 일관성 있는 도리를 말하는 것조차 인정되지 않거늘, 하
물며 일관성이 없는 것은 말 할 것도 없읍니다.
꼭 알아야합니다. 이처럼 잘못된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는
두 가지 허물과 착오가 있읍니다. 첫째는 자기가 발심하여
도를 배울 때에 언어나 문자로써 도를 통하려 했기 때문입니
다. 이것은 애초부터 결단코 생사대사(生死大事)를 확실히
밝히겠다는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스승이 잘
못 되어 제자외 근기를 고려하지 않고,천부적으로 타고난 재
주가 약간 있는 것만을 보고서 교묘한 방편만을 가르칠 뿐,
결코 마음을 바르게 갖도록 제자를 가르치지는 못한 것입니
다. 다만 한결같이 '마음이 그대로 부처이다〔卽心是佛〕'
와 '물질 그 자체에서 마음을 밝힌다〔卽色明心〕'는 등의
그럴 듯한 회두로서 스승과 제자가 서로서로 속고속이는 것
입니다. 다만 스승은 자기가 체험한 경지로 이끌어 제자가
언어나 문자로 이해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선림(禪林)도 서로서로 영향을 주어서 한 가풍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들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2천년 전에 부처님께서는 「원각경」이나 「
능엄경」에서 이네들의 잘못된 견해를 꾸짖고 나무라셨습니
다. 대체로 성인께서는 말세의 중생들이 이런 허망한 잘못
이 있으리라는 것을 미리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처럼
문답을 자세하게 베풀어 그들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고치도
록 한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생사대사(生死大事)를 해
결하려고는 하지 않고, 언어나 문자로써 견성을 하려고 합니
까? 그러다가 홀연히 바른 안목을 가진 수행자가 나타나 그
것이 잘못됐다고 손을 저어 나무라기라도 하면, 마음 속에는
갖가지 의심의 물결이 출렁거리게 됩니다. 나아가 문득 꾸짖
고 배척하면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당신이 정말로 견성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눈으로 보
고 귀로 들었던 언어나 문자를 싹 쓸어버려야 합니다. 만약
털끝 만큼이라도 그런 것들이 마음 속에 응어리져 있으면 이
야말로 지독한 독이 심장에 들어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되면 설사 부처님이라도 구제하기 어렵습니다.
- 해운대 앞바다/청산님촬영
사람에게 가장 큰 일은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일은
태어나고 죽는 일이며
세월은 無常하게도
덧없이 빨리 흘러가므로
참선하는 사람은
이를 두려워해야 하며
恒常 바르게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옛 사람이 이르기를
"오늘은 비록 몸을 보존하나
내일은 보존하기 어렵다" 하였다.
사람은 단 하루를 살더라도
왜 내가 살고 있는가를 明心해야 하며
精神을 바짝 차리고 단 한 시간이라도
게으름이 없어야 한다.
보다 重要한 것은
이 어지러운 세상에
실로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이다.
그저 하염없이 지내야 한다.
만약 마음의 境界가 서로 흔들려서
마른 나무에 불이 붙듯이
煩雜스레 精神없이 歲月을
그냥 흘러 보낸다면
이것은 비단 화두 드는 공부에만
방해되는 것이 아니라
나쁜 業報만 더해질 뿐이다.
그저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마음을 무심(無心)에 두고
마음을 닦으면
마음 智慧가 맑아지는 법이다.
<경허스님>
登鹳雀楼 (등관작루) 관작루에 올라
白日依山盡 (백일의산진하고) ~ 밝은 해는 산자락을 따라 기울어 가고
黄河入海流 (황하입해류라) ~ 황하는 바다로 흘러드는데
欲窮千里目 (욕궁천리목하야) ~ 천리밖까지 바라보고 싶어
更上一層楼 (갱상일층루라) ~ 다시 한 층 누각을 더 올라가네
- 왕지환의 등관작루
王之涣 (왕지환 688∼742)
중국 당(唐)나라 시인. 자는 계릉(季陵). 산시성[山西省(산서성)] 출생.
지방관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시인으로서 자유로운 생애를 보냈다.
전당시(全唐詩)에 수록된 시 6수가 전하며,
당시의 그는 유행가의 작사가로도 유명했다.
그가 시 한 수를 지으면 악공(樂工)들이 서로 앞다투어 그 시에 곡을
붙였다고 한다.
황하(黃河 멀리 오르는 백운(白雲) 사이로 시작되는 칠언절구
《양주사(凉州詞)》와 오언절구 《관작루에 오르다》는 특히 유명하다 청와대는 향후 양국관계를 한 차원 더 발전시키 자는
시진평 주석이 박근혜 대통령에계 특별오찬을 베풀때 선물한 서예작품이며
고 모택동주석이 애송했하였고
초중교과서에 수록되어 전국민이 애송하였다합니다
* * 천리밖까지 바라보려면 누대한 계단을 한층 한층 더 올라가야지 ....
더높은 경지와 진취적 삶을 추구하는 정신이 드러나는 순간에
이런 시구를 인용하면서 정신을 다시 가다듬는기회를 삼는데
마음을 담은 것 같다고 풀이하였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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