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 사람을 위한 그늘/원철스님

2013. 11. 21. 17:5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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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 사람을 위한 그늘

원철 스님 munsuam@hanmail.net | 제283호 | 20120812 입력

 

덥다. 그늘을 찾는다. 처마 끝이 만들어 낸 직선의 지붕 그늘도 좋지만 나무가 만들어 준 원만한 곡선의 그늘은 더 고맙다. 동네 어귀 느티나무처럼 한 그루가 만들어 내는 도도한 그늘은 격이 있고, 소나무 군락처럼 여러 그루가 동시에 만들어 내는 빽빽한 숲 그늘은 깊은 맛이 있다. 한 그루 그늘이 잠시 쉬기 위한 공간이라면, 숲 그늘은 아예 몸과 마음을 내려놓게 만들고 또 모든 걸 잊어버리게 한다. 이즈음은 치유와 명상의 기능까지 떠안았다. 잠깐 구경 삼아 쉬려 왔던 숲 그늘에 반해 그 자리에 완전히 눌러앉은 이들도 더러더러 있기 마련이다. 혹여 유명인사라면 그 숲은 그대로 스토리텔링이 더해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역사가 된다.

제왕운기를 남긴 고려 말의 대학자 이승휴(李承休·1224~1300)는 당시 ‘호모 노마드(homo-nomad·옮겨다니는 사람)’였다. 그래서 ‘동안(動安)거사’라고 불렀다. 안주하는 삶보다는 차라리 움직이는(動) 것을 더 편안히(安) 여긴 까닭이다. 세상에 원칙(道)이 있다고 생각되면 벼슬자리에 나아갔고, 원칙이 무너졌다고 판단되면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굳은 심지는 옳은 것은 옳다고 했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했다. 그 결과는 파직과 좌천으로 인한 이동이었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강원도 삼척 천은사(天恩寺)의 소나무 그늘 자리를 만난 이후엔 망설임 없이 그대로 눌러앉았다. 후학들이 위패까지 모셔놓은 숲 속 동안사(動安祠)는 700여 년 이상 누릴 만한 편안한 휴식처였다.

천은사 가는 길에 들렀던 준경묘· 영경묘 인근의 백두대간은 조선왕실의 탯자리답게 일등급 소나무인 황장목(黃腸木)으로 가득했다. 소나무는 ‘왕의 나무’였다. 경복궁 중수와 새 숭례문 복원에는 기꺼이 자기 몸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능참봉은 능 관리와 제사 준비 및 의전담당이라는 고유 업무와 함께 인근 소나무 숲을 돌보는 일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당연히 능을 관리하는 사찰인 천은사 스님들도 같이 힘을 보탰다. 아궁이 불 때던 시절, 넓은 면적의 수만 그루 나무를 지킨다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다. 능림(陵林)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찰림인 까닭에 행자들은 새벽마다 ‘담시역사(擔柴力士·나무를 지키는 수호신)’에게 감사의 절을 올린 후 장작불을 지펴 밥물 끓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불볕더위는 무분별한 산림훼손과 이산화탄소의 과다한 배출이 겹친 결과라고 했다.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탄소량을 증가시키는 공범이 될 수밖에 없다. 그 부채의식의 틈을 비집고 어김없이 ‘녹색성장’ 참여를 독려하는 공익광고가 끼어든다. KTX동대구역 계단을 오를 때마다 “당신은 오늘 나무 8그루를 심었습니다”라는 글귀에 꽂힌다. 서울에서 대구까지 승용차로 올 때보다 기차로 오는 것이 탄소를 그만큼 덜 배출했다는 의미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의 무정차 통과차로에는 “하이패스는 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과 같습니다”라는 안내문도 지구온난화의 책임을 조금이라도 덜어보려는 운전자를 위로해 준다. 실내온도를 2도 낮출 경우 연간 탄소 감축량은 소나무 7억 그루를 심는 효과와 맞먹는다는 신문기사 앞에서는 입이 딱 벌어진다.

산문 안의 경치를 가꾸면서 모범적으로 나무 심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임제(臨濟·?~867) 선사는 “천하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시원한 그늘이 되리라(與天下人作陰凉)”는 한 그루의 말씀까지 덤으로 심었다.

어쨌거나 이번 더위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쓴 이산화탄소의 입장에선 참으로 억울하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원철 한문 경전 연구 및 번역 작업 그리고 강의를 통해 고전의 현대화에 일조하고 있다. 글쓰기를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禪語 045 - 여천하인작음량 (與天下人作陰凉)

천하의 사람들을 위해 그늘이 되리라 (臨濟錄)


임제(臨濟) 선사(당나라 선승)는 처음에 황벽(黃檗)선사(당나라 선승) 밑에서 수행했으나 좀처럼 도를 깨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임제는 자기의 무능력을 한탄하여 수행을 단념하고 스승의 곁을 떠나려고 했습니다.

이때 같은 제자인 목주(睦州)가 황벽 선사에게, "그는 순진한 청년으로 취할 점이 있습니다. 앞으로 단련하여 성장하면 한 그루의 큰 나무가 되어 천하의 사람들에게 그늘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하고 진언했습니다. 과연 그는 그 말대로 대선자(大禪者)가 되었습니다.

"천하의 사람들을 위해 그늘이 되리라" ― 나는 이 말을 좋아합니다. 한여름에 햇볕이 쨍쨍 내리쬘 때 큰 나무 그늘처럼 고마운 것은 없습니다. 큰 나무는 가지를 뻗어 태양의 직사광선을 막고 서늘한 바람을 가져다 줍니다. 자기의 더위를 마다 않고 그늘을 만들어 줍니다.

이 큰 나무에 해당하는 말에 영어의 "nurse"가 있습니다. 보호수(保護樹)·포옹의 의미가 있으며, 보모(保姆)라고도 번역합니다. 큰 나무가 자기 아래 작은 화초의 성장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모는 아기를 보호하고 포옹합니다.

선자(禪者)의 엄격한 수행도, 나중에는 천하의 큰 나무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위해 서늘한 휴식처를 마련해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인생의 고뇌의 직사(直射)를 막아 마음에 평안한 그늘을 제공하기 위해서입니다.

석존께서는 만년에 자기의 모국인 석가족이 친족의 나라에 의해 멸망되는 비운을 당했습니다. 이때 석존은 침략군이 지나가는 길 옆 고목 아래서 좌선을 하고 있었습니다. 말을 타고 진두에 서서 행군하던 침략국의 왕은 그 앞을 그냥 지나갈 수 없어 말에서 내려 물었습니다. 
 "석존, 무엇 때문에 고목 아래 앉아 있소?"
석존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왕이여, 친족의 그늘은 서늘하군요."
이 말을 듣고 그 왕은 군사를 되돌려 돌아갔습니다. 이런 일이 세 번 되풀이되었는데, 네 번째의 진군에는 석존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고목의 그늘에 앉지 않았습니다.

잎사귀가 없는 고목은 아무리 큰 나무라도 그늘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잎사귀가 많은 큰 나무로 자라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나무도 처음에는 한 알의 작은 씨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햇살과 비바람을 맞고 자라면서 비료를 흡수하여 점점 자라게 됩니다. 수행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구도심(求道心)이 점점 크게 자라는 것입니다.

- 알기쉬운 선이야기 100가지 중에서 옮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