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2. 18. 18:20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금강경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⑤ 일물의 깨달음에 관하여
구멍없는 피리소리에 모든 중생 고향 찾네
<사진설명>
금강경오가해를 강의하고 있는 덕민스님이 불국사 승가대학에서 포즈를 취했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탁하면 내 발을 씻네
부처님은 일물이란 존재에 대해 깨닫고 난 뒤에 형언할 수 없는 경이로움에 젖어있었습니다.
부처님 뿐 아니라 모든 중생이 평등하게 똑같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지요.
지난 번 까지는 일물의 본체에 관한 설명이었고
오늘 강의는 일물의 깨달음에 관한 부분입니다.
我迦文 得這一著子 普觀衆生 同稟而迷 歎曰奇哉 向生死海中
아가문 득저일저자 보관중생 동품이미 탄왈기재 향생사해중
駕無底船 吹無孔笛 妙音 動地 法海 漫天 於是
가무저반 취무공적 묘음 동지 법해 만천 어시
聾騃盡醒 枯槁悉潤 大地含生 各得其所
롱애진성 고고실윤 대지함생 각득기소
우리 석존께서 이 ‘한물건’을 깨달으시어,
중생이 모두 똑같이 이 하나를 품 받아 지니고
있으면서도 미혹한 채 있음을 널리 살피시고
탄식하시기를 기이한 일이로다 하셨다.
생사의 바다 가운데로 나아가
밑바닥 없는 배를 운항하며
구멍 없는 피리를 부시니 묘음이 땅을 흔들고
법문의 바다가 하늘까지 넘실거렸다.
이에 귀먹고 어리석은 범부들이 모두 깨어나고
마르고 시든 외도들도 윤택해졌으며
대지가 머금고 있는 모든 중생들이 다
그 고향을 찾았으니
설의
此物 非聖非凡 而凡而聖 非淨非染 而染而淨 所以 道
차물 비성비범 이범이성 비정비염 이염이정 소이 도
手把破砂盆 身披羅錦綺 有時 醉酒罵人 忽爾燒香作禮
수파파사분 신파라금기 유시 취주매인 홀이소향작례
比之空日 空豈長晴 亦豈 常雨 日豈 長明 亦豈 常暗
비지공일 공개장청 역기(개)상우 일기(개) 장명 역기(개)상암
一念迷也 雲起長空 上明下暗 一念悟也 風掃迷雲
일념미야 운기장공 상명하암 일념오야 풍소미운
上下洞徹 染淨所以興也 聖凡所以作也 聖凡 旣作則感應
상하동철 염정소이여야 성범소이작야 성범 기작즉감응
生焉 凡在迷而渴仰風化 聖在悟而爲物興悲 所以 我迦文
생언 범재미이갈앙풍화 성재오이위물흥비 소이 아가문
於寂滅場中 初成正覺 作獅子吼 奇哉奇哉 普觀一切衆生
어적멸장중 초성정각 작사자후 기재기재 보관일체중생
具有如來智慧德相 但以妄想執着 而不證得 於是 運無緣慈
구유여래지혜덕상 단이망상집착 이불증득 어시 운무연자
說無言言 廣演敎海 遍注衆生心地 使之道芽 榮茂 心花 發明
설무언언 광연교해 편주중생심지 사지도아 영무 심화 발명
大地同春 萬物 咸熙
대지동춘 만물 감희
이 한 물건이 성인도 아니고 범부도 아니지만
범부노릇도 하고 성인노릇도 한다.
청정하다 할 수도 없고 물들었다 할 수도 없지만,
(잘 못살 땐) 오염되고 (본모습일 땐) 청정하다.
이런 까닭으로 말하되,
‘손에는 깨진 술잔을 잡았는데(혼미한 상태)
몸으로는 아름다운 비단옷을 두르고,
어떤 때에는 술에 취해 사람을 꾸짖다가
금방 부처님께 향을 사루고 예배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였으니,
허공과 태양에 비교하건대 허공이
어찌 영원히 맑기만 하며
또한 어찌 항상 비만 오겠으며,
또 태양은 어찌 영원히 밝겠으며
어찌 항상 어둡기만 하리오?
한 생각이 미혹하면
구름이 허공에 일어나서
위로는 밝고 아래로는 어두우며,
한 생각 깨달으면 바람이 미혹의 구름을 쓸어버려
위아래가 환하게 통해 있으니,
이런 것이 더럽고 깨끗함이 일어나는 까닭이며
성인이나 범부가 지어지는 까닭이 되는 것이다.
성인과 범부가 지어지면 곧 그에 상응함이 노출되어,
범부는 미혹하여 성인의 교화의 바람을목마르게 우러르고
성인은 깨달음으로 중생을 위하여 자비를 일으키나니,
이런 까닭으로 우리 부처님께서 적멸장(寂滅場) 가운데서
처음으로 정각(正覺)을 이루고 사자후를 내시되
“기특하고 기특한지라,
널리 바라보건대 일체중생이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고 있건마는
단지 망상과 집착 때문에 증득하지 못한다” 라고 하셨다.
이에 無緣慈悲(선별 없는 자비)를 운전하시며
무언의 말씀을 설하시어, 가르침의 바다를 넓게 펼쳐서
중생의 심지에 물을 대어 도의 싹을 틔우고
무성히 자라 마음의 꽃이 밝게 빛나도록 하시니,
대지가 함께 봄을 맞이하고 만물이 기뻐하였다.
今般若經者 妙音之所流 法海之所自者也
금반야경자 묘음지소류 법해지소자자야
지금의 반야경은 묘음이 흘러나온 곳이
법의 바다도 거기에서 쏟아져 나온 것이다.
설의
般若 一物之强稱 經者 現物之具也 此乃金口親宣
반야 일물지강칭 경자 현물지구야 차급금구친선
不是餘人之所說 法門淵源 不同瑣瑣之敎乘
불시여인지소설 법문연원 부동쇄쇄지교승
반야라는 것은 ‘한 물건’에 억지로 붙인 이름이요,
經이란 것은 ‘한 물건’을 표현하는 도구일 뿐이다.
또 이 금강경이야말로 부처님께서 金口로써
친히 펼치신 말씀이지 다른 사람의 말한 바가 아니니,
법문의 깊숙한 근원이 자질구레한 二乘의 가르침
(소승경전들)과는 같지 않다.
〈보충설명〉
1. 我迦文의 我는 ‘우리’ 라는 뜻으로 고 친근하며 존중의 뜻이 담긴 표현입니다.
2. 논어의 述而篇[술이편]는 ‘子曰[자왈 ]
述而不作[술이불작] 信而好古[신이호길] 竊比於我老彭’[절비어아노팽]'
'공자님이 말씀하사대, 성현의 가르침을 정리하여 전해주지만
마음대로 지음이 없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옛것과 전통을 따르고 좋아하지만,
우리 노팽의 가르침을 존경하며 그윽한 마음으로 견주어 본다.'
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공자도 ‘우리’ 라는 표현을 넣어 殷은 나라 賢人인 노팽에 대해
내면의 존경을 표현했습니다.
3. 同稟[동품]이란 모든 중생의 本來淸淨心은 그稟[품]같다는 뜻입니다.
춘향전에서 춘향이가 이도령을 만나 기뻐할 때 그 곳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함께
기뻐하는 장면, 심청전에서 심봉사가 눈을 뜰 때 모든 맹인이 함께 눈을 뜨는 감격스런
장면 등은 모두가 하나이며 같은 품으로 이루어졌음을 표현하는 장면입니다.
이는 곧 화엄의 세계이자 금강경의 세계죠.
4. 무저선과 무공적은
부처님의 49년 설법에 대한 비유입니다.
마음자리는 뚫으려해도 그 밑바닥이 없습니다.
따라서 무저선은 무량한 중생을 모두 태우고 갈 수 있는 야의 배지요.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설법은 구멍을 뚫어 한정된 소리만 내는세간의 피리와 달리
구멍이 없기 때문에 무량한 묘음을 낼 수 있는 반야의 피리입니다.
'石人夜聽木鷄聲’ 석인야청목계성'
돌바람이 밤마다 나무로 만든 닭의 울음을 듣는다.
'무공적처럼 나무와 닭에 존재하는 무한한 생명을 표현하는 염송입니다.
思量分別이 끊어진 무심의 상태에서는 무정의 설법에 생명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선시 맛보기
眞覺國師의 漁父詞 진각국사의 어부사
1. (眞空) :
一葉片舟一竿竹 一蓑一笛外無畜 直下垂綸鉤不曲
일엽편주일간죽 일사일축외무축 직하수륜구불곡
何擄漉 但看負命魚相觸
하로록 단간부명어상촉
일엽편주에 대나무 장대 하나
도롱이 한 벌과 피리 한 대 외에는 지닌 것 없는 채
낚시줄 드리워도 낚시바늘 구부리지 않았으니
어찌 건져올리리,
그저 목숨버린 물고기가 닿기만 지켜볼 뿐
2. (妙有) :
海上烟岑翠簇簇 洲邊霜橘香馥馥 醉月雲飽心腹
해상연잠취족족 주변상귤향복복 취월운포심복
知自足 何曾夢見閒榮辱
지자족 하회몽견한영진
노을빛 바다엔 뫼뿌리가 병풍처럼 촘촘히 펼쳐지고
서리맞은 물가의 귤나무는 향기가 물씬하여
달에 취하고 구름 즐기며 마음이 흠뻑 배부르니
자족을 알았는데,
어찌 꿈에라도 한가롭게 영욕의 흔적이 있으랴
3. (自由自在) :
脫略塵緣與繩墨 騰騰兀兀度朝夕
탈략진연여승묵 등등올올도조석
獨是一身無四壁 隨所適 自西自東自南北
독시일신무사벽 수소적 자서자동자남북
티끌 같은 인연과 세상살이 모두 던져 버리고
당당하고 오똑하게 아침저녁 보내니
혼자 뿐인 이 한몸에 사방이 툭 트여서
가는 곳마다,
저절로 동서남북 자유롭네
4. (眞俗不二, 色空一如) : 진속불이, 색공일여
落落晴天蕩空寂 茫茫烟水虛碧
낙낙청천탕공적 망망연수허벽
天水渾然成一色 望何極 更兼秋月蘆花白
천수혼연성일색 망하극 갱겸추월로화백
맑게 갠 하늘은 탕탕히 비워지고 밝은데
아득한 노을빛 물결은 허공에 닿아서 함께 출렁이니
하늘과 바다가 어울려서 한 빛깔 이루네
어찌 끝을 바라볼 수 있으리,
가을달과 갈대꽃이 하얗게 겹쳐 아우르는데~
〈보충설명〉
진각국사는 염송 삼십권을 지을 때, 불성을 낚는 어부로
수행자를 비유하여 지은 船子스님의 禪詩 (千尺絲綸直下垂 천척사륜직하수
一派纔動萬波隨 夜靜水寒魚不食 滿船空載月明歸 일파재동만파수 야정수한어불식
만선공재월명귀)를 소개하면서 위의 漁父詩로 說誼를 달았습니다.
어부시 설의
이 詩는 가락이 붙어 가곡으로 불리웠어요. 수행과정에서의 禪과 詩의 만남은 둘이
아닙니다. 漁父詩는 전국시대 말기에 모함으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굴원이의
어부사가 그 근원입니다.
굴원의 어부사 말미에는 어부들에게서 많이 불려진 노래,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창낭지수청어 가이탁오영 창낭지수촉어 가이탁오족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탁하면 내 발을 씻는다’)
이라는 글이 실려 있습니다.
굴원이 어부사 밑에 달아 둔 이 글은, 공자가 제자와 함께 창랑의 물을 건널 때
어린이들이‘창랑지수~’하며 부르는 노래가사를 듣고 제자들이 그 뜻을 물었을 때
‘自取之也’ '자취지야' (스스로 자기 자신이 그 모습을 취한 것이다)라고
대답한 내용으로서 ‘맹자’에도 소개되어있습니다.
굴원의 이 어부사를 토대로 당나라 선자화상이 ‘千尺絲綸천척사륜~’이라는 선시를
지었고, 고려말에 禪과 詩의 만남으로 이규보와 절친했던 진각국사가 이를 다시
선(禪)적으로 승화시켜 어부사를 지어 설의를 달았습니다.
자신이 전생에 스님이었다고 술회한 고려말 대문호, 이규보가 지은 진각국사 비문에
의하면 보조스님의 꿈에 설두중현선사가 나타났는데 그 다음 날 진각국사가
보조스님을 찾아왔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진각국사의 어부사를 잘 소화시킨 함허스님은 일물서에 無底船, 無空笛 등의
표현을 사용하여 더욱 더 禪味를 돋보이게 했습니다.
이렇게 선과 함께 어울린 어부시는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로 그 맥이 이어졌습니다.
* 一葉片舟一竿竹一一笛外無畜 일엽편주일간죽일일적외무적
마음 밖에 쌓아둔게 아무 것도 없다는 뜻(무소유)
* 直下垂綸 직하수륜: 불성을 낚기 위해 던진 낚시대
* 鉤不曲 구불곡 : 애초부터 낚아 올릴 고기가 없으므로 낚시바늘이 구부러질
필요가 없음을 의미
* 翠簇簇 취족족; 푸른 대나무가 무리지어서 병풍을 두른듯이 보이는 모습.
視覺의 싱그러움
* 香馥馥향복복: 嗅覺의 싱그러움 취각
* 榮辱 영욕: 名相에 걸린 세속의 영화와 굴욕이므로 영원하지 못한 것을 일컬음
* 脫略 탈락: 세간의 시비분별을 모두 떨쳐버림
* 繩墨 승묵: 목수가 나무를 재단할 때 쓰는 먹물 줄. 중생살림에 필요한 생계수단의 뜻
* 騰騰 등등: 해탈을 이룬 몸과 마음이 가볍고 날침을 뜻함
* 兀兀 올올: 명석한 마음으로 오뚜기처럼 쓰러지지 않고 오똑선 모습.
시비를 놓은 상태
* 度朝夕 도조석: 시간을 초월했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 묶이지 않는 상태
* 無四壁 무사벽: 공간을 초월해서 사방이 툭 트여 향방에 묶이지 않는 상태(화엄법계)
* 落落 락락: 俗氣속기가 끊어진 상태
* 天水渾然成一色 천수혼연성일갯: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함께 출렁거리는 상태
* 秋月蘆花白 추월로화백: 하늘과 바다가 서로 맞닿아 함께 넘실거리고
한 빛깔을 이룬 것처럼, 가을달과 갈대꽃도 하얀빛 同色으로 함께 어울린다는 뜻.
서리 내린 뒤에 비치는 맑은 가을 하늘의 달빛은 차갑고 하얗다.
하얀 갈대꽃이, 차갑고 하얀 서리 위에서, 차고 하얀 달빛을 받는 것은
서로 모양은 다르지만 일체를 이루는 경지다.
2004.07.19 13:00 입력 발행호수 : 764 호 / 발행일 : 2004-07-21
登山과 人生
1. 산에 오르면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자기 몫의 산행은 자기가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자기 몫을 아무도 대신 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 대신 가 줄 수도 없고 업어다 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피곤해도 일어서야 한다. 힘들어도 가야만 한다.
천리 길이 한걸음에서 시작되듯 만리길도 한발한발 걷는 결과일 뿐이므로
인생 길도 무엇이 다르겠는가.
2. 산을 타는 프로는 장비(tool)가 많고 인생의 프로에게는 지혜가 많다.
동네 뒷산이라면 고무신을 신은 채로 올라가도 큰 문제가 없으리라.
그러나 제법 큰 산을 오르기위해서는 거기에 걸 맞는 장비들이 필요하다.
간단한 일상사에야 달리 지혜가 필요 없을지도 모르나
인생의 중요한 고비에서는 지혜로 무장해야 하는 것과 마찬 가지다.
3. 산에 오르기는 힘들고 산을 내려 가기는 어렵다.
산에서 몸을 다치는 일은 대부분 내리막 길에서다.
오를 때는 힘만 뒷받침 되면 충분하지만 내리막에서는 힘만으로 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주역 64괘 중 첫번째인 건(乾)괘에 항룡유회(亢龍有悔)라는 대목이 나온다.
뜻을 이룬 자가 절정에 올랐을 때더욱 삼가고 조심하라는 가르침이다.
산이든 인생 길이든 정상에 서있는 사람들이 음미해볼 경구가 아닐 수 없다.
4. 힘든 산길에서는 기도문을 암송하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그것도 아니면 숫자를 세는 것도 도움이 된다.
힘들 때 흥얼거릴 수만 있어도 힘이 보태지기 때문이다.
한발 한발 숫자를 세면서 열 걸음마다,
혹은 백 걸음마다 짧게 쉬어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된다.
목표를 작게 세우면 그만큼 달성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밭을 매거나 길쌈을 할 때 노래를 부르곤 했다.
아마도 힘들다는 생각을 잊고 싶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산에 오르면서 노동요가 생겨난 유래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
5. 산에서는 자기 페이스를 지키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자기 스타일로 자기 페이스를 유지한다면 험한 산길도끝까지 갈 수 있다.
남의 보폭에 맞추거나 누구의 속도를 따르면 쉬 피곤해 질뿐만 아니라
산에서 맛 볼 수 있는 즐거움이 다 달아나게 마련이다.
인생살이에서 자기 페이스를 지키고,
자기만의 스타일을 갖는 일이 중요한 까닭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뱁새에게 황새 걸음을 걷지 말라는 교훈은 그래서 만들어 졌으리라.
6. 산길이 힘들어 보여 빙 돌아서 간다면 그 길은 쉬울까?
산길은 어디로 가도 비슷하게 힘들다.
그래서 힘들어 보이는 길일지라도 정면으로 승부를 거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미국의 무료 양로원에서 외로운 노후를 보내는 노인들에 대한 통계는
우리에게 생각할 과제를 던져 준다.
그들은 젊은 시절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정면승부를 거는 대신에
그것들로부터 도망치면서 살았다는 것이다.
익사가 무서워 물가에 가지 않았다던가,
부상이 두려워 스케이트를 배우지 않았다는 식이다.
7. 산에도 지름길은 있다. 그러나 산행에 왕도는 없다.
헬기를 타고 정상에 내린다면 그것을 누가 산행이라이르겠는가?
인생에도 지름길은 있다. 그러나 인생에는 왕도는 없다.
타고난 성품, 투입한 노력, 길러진 실력만이 성공의 비결이기 때문이다.
누구의 줄을 타고 손 쉽게 출세를 하거나,
누구의 후광으로 한 자리를 차지한다면 본인의 마음은 떳떳할까?
마치 헬기를 타고 정상에 내린 등산객처럼 멋적지 않겠는가.
8. 산길은 올라 갈수록 어렵다.
체력은 떨어지고 바람의 저항은 거세지고,
경사는 급해지며, 마실 물은 줄어들고, 산소는 부족해 진다.
모든 어려움이 함께 머무는 곳 그곳이 바로 정상이다.
그런 점에서 인생과 산행은 정말 비슷한 게 많다.
인생에서도 무엇인가를 이루기 직전이 어렵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많은 위인들이 성공의 문턱에서 겪어야 했던 좌절과 고통에 대해
고백한 얘기를 잘 기억하고 있다.
그러므로 행여 우리가 정말 어렵고 힘든 지경을 만나면
그것이 인생의 정점에 가까워졌다는 신호로 받아 들일 필요가 있다.
9. 지혜로운 사람은 미리부터 산행을 대비한다.
산에 오를 체력, 가는 곳에 대한 정보, 산행에 필요한 물자,
산행의 조력자, 함께할 동반자를 미리 준비한다.
지혜 없는 자는 무모하게 산을 오른다.
아무 준비도 없이, 무턱대고 오른다.
산에서 사고를 당하는 경우는 대부분 무모한 출발 때문이다.
하루 이틀의 산행에도 계획과 준비가 필요하다면
한 평생을사는 인생 길에 계획과 준비가 필요함은 재론할 여지가 없으리라.
10. 여럿이 가는 산행에서 모두가 끝까지 가기란 쉽지 않다.
중간에 사고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고,
중도에 포기하여 탈락하는 사람도 있고,
가기로 약속했다가 애초에 불참한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인생 길에서도 백년을 함께 하자든지
혹은 도원의 결의와 같은 우정을 약속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나 그 약속이 끝까지 지켜지기 어렵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자주 잊어버린 나머지 지키지 못할 약속을 쉽게 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11. 산행은 계산대로 되지 않는다.
인생이 계산대로 되지 않듯이 맘먹은 대로 다 된다면
그것은 또 무슨 재미이겠는가.
계산과는 달리 의외의 결과가 나오는 것이 세상살이요 산행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얄팍한 셈틀로 수 없이 많은 계산을 한다.
거래를 할 때는 물론이고 심지어 우정과 사랑에도 계산은 배제되지 않는다.
그런데 결과가 항상 계산한 대로 나오던가?
12. 짐이란 많든 적든 역시 짐이다.
그래서 짊어진 사람에게는 버거운 존재다.
많은 짐을 지고 산에 오르는 사람이나 작은 짐을 지고 산에 오르는 사람이나
그 나름 대로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능력 있는 사람에게나 능력 없는 사람에게나,
부자에게나 가난한 사람에게나 인생길이 비슷하게 어렵듯이.
그러므로 내 짐만 유독 무겁다는 생각을 버릴 수만 있다면
인생 길의 불행을 꽤 많이 덜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한 이가 베토벤이었던가.
“불행이란 이상스러운 것이라서 사람들이 그것을 이야기 할수록 불행은 점점 커진다.”
13. 산행은 앞서거니 뒷서거니의 연속이다.
출발 시점이 비슷한 사람끼리는 산에서 앞서거니와 뒷서거니를 반복한다.
그러다가 산을 내려오는 것은 거의가 비슷한 시각의일이다.
직장생활에서도 이런 현상은 자주 나타난다.
앞서가던 사람이 뒷사람에게 추월당하는 일도 생기고
뒤처진 사람이 다시 앞으로 나가는 일도 허다하다.
그러나 이들이 직장을 떠나는 것은 거의가 비슷한 시기의 일이다.
그리고 그들이 세상을 떠날 때 보면
생전의 앞섬과 뒷섬의 선후는 아무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된다.
14. 산행에서 난이도의 총화는 같다.
처음이 어려우면 나중이 쉽고 나중이 어려운 길은
이미 초반을 쉽게 보냈다는 증거가 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중산리에서 출발하여 천왕봉을 오르는 사람이나
노고단을 출발점으로 하여 천왕봉으로 가는 사람에게나
지리산 종주는 똑 같은 어려움을 준다.
다만 어느 한쪽이 초반에는 쉬웠을 뿐이다.
15. 물리학에서 말하는 일의 원리(w=f.s)야 말로 산길에서 새삼 빛을 발하는 법칙이다.
급한 경사면이 너무 힘들어 갈지(之)자로 산을 오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상대적으로 시간은 더 걸리게 마련이다.
힘을 덜 들게 하기 위해서는 걸음을 더 많이 옮겨야 하고 시간은 더 걸리게 된다.
세상살이에서도 어려운 길을 피하다 보면
결국 정상에 오르기까지 더 많은 걸음을 걸어야만 한다.
16. 산길을 가다가 어떤 지점에 앉아서 걸어온 길을 되돌아 보면 도무지 아득하기만 하다.
꿈같기도 하고. 언제 그 길을 다 왔을까?
정말 내가 그 길을 왔단 말인가?
그래서 인생길은 자주 산길에 비유되는 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문득 돌아본 인생길은 얼마나 아득한 것이던가.
17. 이 고생 하면서 내가 왜 산에 왔나?
고통의 순간에는 누구나 주저앉고 싶다.
가장 힘든 순간을 데드 포인트(dead point)라 이름 할 수 있는데,
이 데드 포인트를 이기고 나면
사람들은 그 고통의 순간을 기억 저편으로 묻어둔 채 발길을 재촉한다.
그러나 이 고비를 이겨내지 못한다면 중도에 포기하여 산을 내려오거나
혹은 원래 가려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진로를 바꾸게 된다.
아들의 인내심이 걱정되는 부모라면
틈 날 때 마다 사랑하는 아들을 산으로 보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엄청난 출산의 고통을 이겨 냈기에
사랑하는 아들을 얻을 수 있었노라는 가르침도 함께 묶어서.
18. 가는 길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산행에는 큰 차이가 있다.
길을 아는 사람은 페이스 조절이 가능하기에 덜 지친다.
그들은 속도를 낼 곳과 천천히 가야 할 곳을 구분하며,
힘을 쓸 지점과 힘을 아낄 지점을 분별하므로 힘을 안배할 수가 있다.
그래서 처음 가는 산행에는 경험 많은 안내자가 소중하다.
인생도 마찬가지여서 아마도 인생의 길을 아는 사람을 가리켜
선지식(善知識)이라고 불렀으리라.
19. 앞길이란 항상 기대와 함께 두려움의 대상이다.
산길에서 넘어야 할 어려운 재 하나를 앞에 두고 걱정 근심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그 걱정을 앞 당겨서 치르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앉아서 걱정만 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뚜벅뚜벅 산길을 오르는 것 외에 달리 무슨 묘안이 있겠는가?
20. 산길의 고비에는 학점이 매겨져 있다.
고비 때 마다 1 학점을 따게 된다.
어려운 코스에는 한꺼번에 여러 학점이 주어 지기도 한다.
인생의 도에 이르는 일도 결국은 학점 따는 공부의 연속이 아니겠는가?
누군가 말했다. '인생은 공부의 연속' 이라고.
이 말도 어쩌면 산길을 오가며 얻어진 깨달음의 결과가 아닐는지.
21. 산에도 길이 있다.
동네에만 길이 있는 줄 알지만 산에도 분명 길이 있다.
먼 곳에서 보면 그게 그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산에도 길이 있다.
어떤 산을 몇 번이나 오르면 길눈이 트일까?
인생을 몇 년이나 살면 삶의 길눈이 트일까?
동네 길이 훤한 사람도 산길은 어두울 수가 있고,
산길에 밝다고 해서 인생길까지 훤한 것은 아니다
22. 산에는 왜 가는가?
서양인들은 대체로 도전과 정복의 개념으로 산을 대한다.
동양의 정서로는 구도와 수양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적어도 동양인들에게 산은 정복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산을 어떻게 정복한단 말인가.
산은 자연일 뿐인데.
23. 산에 오르려면 허리를 굽히지 않을 수 없다.
아니, 허리를 굽히지 않고는 산에 오를 재간이 없다.
대체로 높은 곳에 오른 사람들은 이렇듯 산 입구에서부터 몸을 자주 굽혔던 사람들이다.
이런 굴신력이 아니고는 높은 곳에 이르지 못한다.
높으면 높을수록 굽힘도 커져야만 하니까.
24. 산을 오르는 사람과 산을 내려가는 사람이 서로 마주칠 때
우리는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실감하게 된다.
내려가는 이들은 대체로 여유가 있고 오르는 이들은 숨이 차서 헐떡거린다.
그러나 여유 있는 하산 길 이전에 이미 힘든 등산길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남의 입장을 생각하는 훈련장으로 산행 이상 좋은 도장이 없다.
25. 호젓한 산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누구나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수고 하십니다.
안녕하세요.
좋은 산행 되십시오.
고맙습니다.
그런데 인사를 하지 않는 두 가지 경우도 있다.
단체 등산객을 만나서 사람의 희소성이 없어졌거나
너무 지쳐서 여유가 없어졌거나.
26. 산에서 지키는 도덕심과 예절이라면,
산에서 느끼는 생명에의 외경심이라면,
산에서 느끼는 만큼만 사람의 귀함을 실생활에서 적용한다면
세상의 모습이 얼마나 좋을까.
산에서는 구도자를 닮아 있던 사람들도
하산하면 그 모습이 흐트러짐은 어떤 조화일까.
교회당이나 성당이나 법당에서 만난 사람들이
모두 성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가 세상에 나가면 다른 얼굴이 되는 것처럼.
27. 산에 오를 때의 짐과 내려 올 때의 짐은 무게에서 큰 차이가 난다.
오를 때는 비상시를 대비하나 내려올 때는 평상시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올라갈 때의 짐은 꽉 찰 만큼 많아서 묵직한 무게를 느끼게 마련이다.
그러나 한 재 두 재 넘으면서 짐은 조금씩 줄어든다.
하산하여 산의 발 뿌리를 벗어날 무렵이면 대부분의 배낭은 텅텅 비게 된다.
28. 산에 가면 모두가 무등(無等)이 된다.
왕후장상도 장삼이사도 모두 무등이다.
무등은 평등과는 다르다.
평등이나 동등은 등위가 존재함을 전제로 모두가 똑 같은 등위라고 주장하는 반면,
무등은 처음부터 등위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산에 가면 등위가 없고 산만 있을 뿐이다.
29. 산행에서 최대의 적은 험난한 절벽도, 높은 봉우리도,
깊은 계곡, 사나운 맹수도 아니다.
가장 무서운 적은 허기와 한기다.
인생의 최대의 적은 무엇일까.
역시 허기와 한기가 아닐까.
이 허기와 한기를 빼고 어떻게 인생을 말할 수 있을까?
허기와 한기만 이길 수 있다면 산길이나 인생길이나 모두 가볼만 하다.
30. 산길에서 다리를 다치거나 발바닥이 아프거나
몸의 일부라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닐때 그 고통은 예삿일이 아니다.
인생길에서 병을 얻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부처는 병을 인생의 네 가지 고통 중 하나로 꼽았으리라.
31. 우리 몸은 7할이 물이다.
어떤 의미에서 사람은 걸어다니는 물통에 다름 아니다.
수분이 부족하여 탈수증이 생기면 생명은 위험한 지경에 이른다.
그래서 산길에서 물이 부족한 고통은 공포심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좋은 산은 마실 수 있는 좋은 물이 넉넉 한 산을 이름 한다.
32. 산은 계절에 따라 옷을 갈아입는다.
환경이 변하기 때문이다.
환경변화에 따라 인간도 옷을 갈아입는다.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퇴보와 몰락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모든 문명의 영고성쇠를 응전과 도전의 관계로 풀이한 역사학자 토인비는
그래서 산길에서 자주 생각하게 되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33. 잘못된 지도 때문에 산길을 헤맨 적이 있는가?
잘못된 이정표 때문에 고생해본 적이 있는가?
서툰 안내인 때문에 산길에서 방황한 적이 있는가?
잘못된 정보는 산행을 훨씬 힘들게 만들고 심한 경우 산행을 아예 망치게도 한다.
우리가 가진 인생길의 지도나 이정표에는 이상이 없는가?
정말 인생에 도움이 되는 안내자를 가지고 있는가?
34. 인생에는 리허설이 없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일을 리허설도 없이 곧 바로 실행에 옮기면서 살아간다.
아내노릇, 남편노릇, 군대생활, 직장생활 등 모두 리허설이 없다.
한번만 기회를 준다면 이번에는 잘 할 것만 같은데
리허설이 없는 인생이기에 두 번째 기회는 돌아오지 않는다.
만약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다면 정말 잘할 수 있을까?
같은 산을 두 번째 갈 때는 누워서 떡 먹기처럼 아주 쉽던가?
두 번째일지라도 그렇게 쉽지만은 않으리라.
느끼는 어려움과 치러야 할 수고는 매번 비슷한 무게로 다가 온다.
- 옮겨온 글
사진 / Blue Gull / Kinabalu Mountain
Reflections / Tim Jan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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