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2. 26. 08:50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지금 여기’의 거사선(居士禪)
24시간 행주좌와 함께하는 ‘심왕’ 밝힌 부대사
‘나도 한번 깨달아보겠다’고 다짐한 불자라면 꼭 보게 마련인 <금강경오가해 설의>.
이 책은 역대 금강경 주석서 가운데 규봉종밀, 육조혜능, 부대사, 야보도천,
예장종경 등 다섯 선사의 해설서를 모은 중국의 <금강경오가해>를 조선초기의
함허득통 스님이 한국적인 안목으로 다시 총평한 명저다.
금강경을 선(禪)의 입장에서 선시와 게송 등을 곁들여 풀이한 일종의 선어록이라
선교쌍수(禪敎雙修)의 필독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금강경오가해>에 등장하는 부대사(傅大士, 497~569)가 재가의 선사란
사실을 아는 불자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사실, 부대사는 한국에서는 잘 알려진
방거사(龐居士) 보다 더 높은 명성을 얻어 ‘미륵의 응신(應身)’으로까지
추앙되었고 ‘중국의 유마거사’로 불린 세속의 성자이다.
중국 양나라 말인 서기 497년 무주에서 출생한 그의 자(字)는 현풍(玄風),
이름은 흡(翕), 부대사(傅大士)ㆍ쌍림대사(雙林大士)ㆍ동양(東陽)거사라고도 불렸다.
속성은 부(傅)씨로서 16세에 유(劉)씨와 결혼해 보건(普建)ㆍ보성(普成) 두
아들을 낳았으며, 24세에 계정당(稽停塘)에서 인도 스님 숭두타(嵩頭陀)의 감화를
입고 송산(松山)에 숨어서 수행하다가 쌍림수(雙林樹)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낮에는 품을 팔고, 밤에는 부인 묘광(妙光)과 함께 대승법문을 설한 지 7년만에
소문이 나서 천하의 명승들이 모여들었다. 때로 선기(禪機) 가득한 무애행(無碍行)
으로 불자들의 존경을 받았고 양무제(梁武帝)의 귀의를 받았으며, 종산 정림사
(定林寺)에서 주석했다. 저서에 <부대사록>, <심왕명> 등이 전한다.
양무제의 귀의를 받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아래 〈벽암록〉제67칙의 문답을 보면,
부대사의 탁월한 안목을 엿볼 수 있다.
양무제가 부대사를 초청해 금강경을 강의하도록 하였다.
부대사는 법상에 올라서 경상을 한번 후려치고는 곧바로 법상에서 내려 왔다.
(大士便於座上 揮案一下 便下座)
양무제는 깜짝 놀랐다. 지공화상이 양무제에게 질문했다.
“폐하께서는 아시겠습니까?”
무제는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不會)”
지공화상이 말했다. “부대사의 강의는 끝났습니다.(大士講經竟)”
심오한 금강경 설법을 기대하던 양무제는 부대사가 말없이 설한 뜻밖의 최상승
법문에 영문을 몰라 넋을 잃고 말았다. 지공화상은 우뢰와 같은 부대사의 묵언
법문에 공감을 표하고 금강경 설법은 끝났다고 선언하는 명장면이다.
부대사는 무언의 금강경 설법을 통해 반야의 지혜는 말로 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不可說), 얻을 수 있는 물건이나 대상도 아니며(不可得), 고정된 특성이 없는(無自性)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부대사 진영.
양무제를 놀라게 한 무언의 금강경 설법
1500여년이 지난 지금, 이 법문을 보는 우리는 즉시 법상에 올라 경상을 후려치는
부대사가 되어야 한다. 경상을 후려치는 그 ‘당체(當體)’이자, 주장자로 경상을 칠 때
나는 그 소리를 듣는 ‘당체’를 즉각 깨달아야 한다.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고, 뭐라고 이름 붙일 수 없어 자성이니 불성이니
본래면목이니 주인공이니 하는 ‘그것’과 계합이 된다면 더 이상의 글은 사족이 될 것이다.
부대사는 위의 선문답을 깨닫지 못한 이들을 위해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힌트를 주고 있다.
밤마다 부처를 안고 자고(夜夜抱佛眠)
아침마다 함께 일어난다네(朝朝還共起)
앉으나 서나 늘 따라다니고(起坐鎭相隨)
말할 때나 안 할 때나 함께 있으며(語默同居止)
털끝만큼도 서로 떨어지지 않으니(纖毫不相離)
몸에 그림자 따르듯 하는 구나(如身影相似)
부처님 간 곳을 알고자 하는가?(欲識佛去處)
단지 이렇게 말하는 그것이라네.(只這語聲是)
‘부대사(傅大士)의 게송’으로 잘 알려진 이 선시는 우리의 일상생활을 주도하는
형상 없는 주인공이 바로 ‘단지 이렇게 말하는 그것’, 말하는 당체 즉, 자성(自性)이자
부처, 심왕(心王)이자 공왕(空王)임을 밝히고 있다.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의 24시간을 함께 하는 ‘마음부처(心佛)’는
위에서 부대사가 경상을 두드린 그 당체, 경상에서 나는 소리를 듣는 자성이 아니던가.
부대사는 이를 두고 <심왕명(心王名)>에서 “관찰해 보면 형상 없지만(觀之無形)
‘아무개야’ 부르면 대답은 있어(呼之有聲) 크나 큰 법의 장수 되어서(爲大法將)
마음의 계로써 경을 전하네(心戒傳經)”라고 거듭 밝히고 있다.
세간에서 대승법문 설해 출재가 교화시킨 대보살
여기서 독자들이 믿고 깨닫는다면 ‘깨달음은 세수하다 코 만지기 보다 쉽다’는
선가의 격언이 성립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물고기가 물 속에서 물을 찾고,
목동이 소를 타고 소를 찾고, 애기 업은 엄마가 아기 찾는 코메디가 연출되리라.
이를 두고 능엄경에서는 연야달다가 제 머리를 두고 머리를 찾아다닌다는 비유를
들고 있다.
마음으로 마음을 찾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순간, 마음이 곧 부처님을 깨달아
언제 어디서나 자유자재한 주인공의 삶을 살게 된다. 물론 이 ‘마음’은 중생의 시비
ㆍ분별ㆍ번뇌ㆍ망상심이 아닌 무아ㆍ무심(無我無心)의 평상심(平常心),
생각이전의 마음인 본래심(本來心)을 가리킨다.
<심왕명>에 따르면, 부대사가 밝힌 우리의 본래마음은
“그윽하고 묘하여 측량 어려워 형체도 모양도 없으나, 크나 큰 신통력을 가진 것
(有大神力)”이다. 그러니 이 심왕(心王)의 권능으로 일상생활을 걸림없이 영위하여
일체중생을 위하여 “능히 천 가지 재앙을 소멸시키고(能滅千災) 만 가지
복덕을 성취(成就萬德)”시켜야 한다.
따라서 “공에 집착하고 고요에 취해(執空滯寂) 표류하며 가라앉아”서는 안될 일이다.
선방에서 익힌 정중선(靜中禪)과 선정의 힘으로 생활 중에서 동중선(動中禪)의
활달한 지혜작용을 펼쳐 대자대비행을 실천하는 것이 제대로된 불행(佛行)수행임을
기억해야 한다.
부대사는 ‘마음이 곧 부처’임을 알았으면 탐냄과 성냄의 업을 짓지 말고 계심(戒心)
으로 스스로 단속하며 잘 지켜서 신중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청정한 마음의 밝은 지혜는 세상의 황금과 같으니” 세상을 위해 이 무가지보
(無價之寶)를 쓰기 위해서는, 늘 “자기 마음을 스스로 관찰하는(自觀自心)” 반조
(返照)수행이 필요함도 밝히고 있다.
부대사의 법문은 간결하고도 명쾌해서 간절하고도 겸허한 구도자라면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정수를 담고 있다. 하지만 깨달음에 대한 정보가 넘쳐나는 요즘,
그 알음알이가 도리어 단박깨침의 장애가 되고 있다. 설사 해오(解悟)나 돈오
(頓悟)를 했다고 한들, 철저한 보림수행으로 ‘마음의 힘’을 키워 현실에서
동체대비의 삶을 구현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세간에서 대승의 법문을 설해 많은 불자들을 교화하고 황제까지 감화시킨 부대사.
그의 위대한 삶은 종교의 영향력이 갈수록 약해지는 요즘, 재가수행자들이 사표
(師表)로 받들고 배워야할 스승 중의 스승이다.
- 구도역정 메일에서
이 글은 월간 <고경> 3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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