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2. 18. 18:37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깨달음의 세계선 너와나 우주가 하나인 생명체 / 녹원스님
20세기에 들어와서 많은 종교와 종파가 생겨났고 그들이 주창하는 교리도 다양해졌습니다. 그런 종교들의 교리를 살펴보면 대부분 ‘믿는 종교’ 또는 ‘믿음의 종교’ 입니다. 어느 면에서 무엇인가 믿게 되면 마음이 푸근해지고 불안한 생각들이 누그러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근본적으로 깨닫는 종교입니다. 주관적으로는 깨닫고 객관적으로는 깨닫게 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 것일까요. 2천6백여년 전 룸비니 동산의 무우수나무 아래에서 싯달다 태자가 마야부인의 우협(右脇)으로 태어났습니다. 탄생하여 땅에 발을 딛자마자 사방으로 7보를 걸으면서
하늘과 땅을 가리키고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사자후했습니다. 우리의 의식 차원을 초월한 부처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입니까. 오직 하늘과 땅을 의지해서 만물이 지속적으로 생장케 하는 생명체가 존귀한 것이며, 만물에게 큰 이로움을 주는 하나 밖에 없는 생명체가
‘천상천하’에 가장 존귀하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인간의 의식이 발달하더라도 이 생명체 보다 존귀한 것은 없습니다. 바로 이 생명체가 만물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하며, 지옥도 만들고 극락도 만들기
때문에 이 생명체가 인간과 세계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밖에 실제로 존재하는 전지전능한 조화옹(神)이 있다고 긍정하거나, 믿고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종교를 갖는 것은 ‘안심입명(安心立命)’하려는 것인데
그런 종교를 믿음으로써 공포와 전율과 증오를 갖게 된다면 우리 사회는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그런 종교 때문에 전쟁과 살상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걱정스러운 일입니다. 이러한 양상이 계속된다면 지구는 종교 때문에 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는 불교가 들어오면서 새로운 문화와 문명이 꽃피게 되었고 사찰은 국민들에게 “어떻게 하면 바르게 사는가?” 하는 교육도량으로 자리잡아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전통적인 불교문화를 부정하고 심층적인 비판없이 서양의 종교와 문화를 수용하고 있습니다. 서양문화는 과학일변도인데 그러다 보니 지구는 오염되고 파괴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그들은 가장 고도의 문화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세계적으로 서양의 과학과 불교적인 정신문화를 조화시켜 흔들리지 않는 사회를 건설했습니다. 세계 어디를 가나 일본제품이 독점하고 있습니다. 불교문화와 과학을 조화시켜 지도적 위치에서 흔들림없이 세계에 군림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청소년들의 비판없는 서구 지향적 태도는 기성세대 교육자들의 주체성없는 문화양태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바르게 알고 있다면 올바로 실천할 것인데, 실천이 바르게 안되는 것은 올바른 가치관, 역사관, 문화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릇된 가치관을 바로잡는 데는 불교의 선(禪)이 아주 유용합니다. 선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不動之心)을 갖는 수행입니다. 즉 마음을 작용시키되 부동의 경지에서 작용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겁생에 걸쳐 6근(眼耳鼻舌身意)을 가지고 6진(色·聲·香·味·獨·法)을 대할 때 마음이 대상에 빼앗겨 왔기 때문에 잘못된 생각(思業)과 행동(思己業)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미혹의 그림자로 얽혀진 육체적 생명관을 가지고 18界(6根, 6塵, 6識)의 놀음을 반복하는 것이 중생의 삶입니다. 천지만물은 제각기 생명의 본질인 불성(佛性)자성(自性) 법성(法性)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품이 만물을 살게 하고, 움직이게 하고, 작용하게 합니다. 이 생명체는 천지 우주간에 오직 하나이며, 그것은 살고 있는 기운(活氣)인 것입니다.
이 하나인 생명체에서 중생은 각각 다른 생각과 행동을 일으킵니다. 그 결과 서로 다른 업이 형성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생명체는 반야심경에서 설하듯이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이지만 여기에서 온갖 세계가 건립되니 생명체가 바로 조화옹인 것입니다. 가상으로 형성된 이 몸에서 생명의 본질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무념(無念)과 무작(無作)으로 선을 실천하면 망상이 다하고 작위(作爲)가 끊어진 자리에서 생명의 본질이 하나로 귀의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까지 서로 장애가 되어 다투던 망상이 소멸되기 때문에 지구 전체가 나의 집이 되고, 모든 중생이 나와 동일한 하나가 됩니다. 그래야 “안심입명”을 갖는 참 자기를 실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념, 무작으로 본분자리와 합하게 되어야 갈등과 증오가 사라지고 자와 타의 대립이 끊어져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열반이 실현되어 자기 자신이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우주의 생명체인 이 마음을 의지하여 수행을 통해 부처가 되는 진리가 있다는 것을 믿고, 그 진리대로 행하며 받드는 것이 불교입니다. 중생이 생명 본성대로 살 수 없는 까닭은 사물을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정각자(正覺者)이기 때문에 사물의 본성을 파악한 대로 사셨습니다.
그것은 물의 생기를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물이 얼면 딱딱한 얼음이 되고 다시 가열하면 수증기로 증발하지만 물의 본래 성질은 변함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액체를 즉한 고체이며, 고체에 즉한 기체인 것이지요. 이같이 모양이야 상황에 따라 변해 가지만 물 그차제의 본질은 불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물의 본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바로 보고 생활하면 이것이 정각의 삶인 것입니다. 어제 저녁에 한 잔 하던 친구가 오늘 아침에 숨 못 쉰다고 슬퍼할 것 없어요. 다른 곳에서 만나 한 잔 하면 되지요.
부처님은 성·주·괴·공(成·住·壞·空)에 대한 말씀을 하셨지요. 예를 들면 지구가 생겨나(成), 언제까지 머물다가(住), 붕괴되고(壞), 끝내는 없어진다(空)는 말씀은 경전에 꽤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어요. 우리는 사물의 원리에 미(迷)했기 때문에 중생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허공의 모든 요소가 지니고 있는 성품을 다 알 수만 있다면 이것이 정각인 것입니다.
이것을 우주생명과학(宇宙生命科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부처님의 깨달음은 원음(圓音)입니다. 부처님이 한 말씀만 하여도 우주 전체에 사무치는 정각이며 원각의 깨침입니다. 중생은 망상(妄想)때문에 망견(妄見)에 집착하여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녀간에도 서로 착각이 있지 않습니까? 남자가 여자를 보고 반하면 맥을 못추는 것, 이것을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남자는 여자가 예쁘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지 정말 예쁜가를 고양이에게 물어 보십시요. 장미꽃을 강아지한테 주어 보십시오. 무엇을 알겠습니까? 정각은 순리(順理)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착각하면 순리에 위배되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 병이 무엇인지를 알았으면 그 병을 고쳐야지요. 그런데 병원이라는 것도 병을 고치기보다 그르치게 되는 경우가 더 많으니….
부처님의 자리는 본래 무생사(無生死)인 것입니다. 부처님은 생명에 대해 확연하게 설파(說破)하셨는데 “전생을 알고자 하면 금생을 보고, 내생(來生)을 알고자 하면 현생(現生)을 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업자득(自業自得)·자작자수(自作自受)가 아닙니까? 다른 성인은 생사에 대해 분명치 못했습니다. 중국의 공자도 “죽음이 무엇이냐”는 제자의 질문에 “삶을 모르는데 죽음을 알겠는가”라고 대답했다 합니다.
또 기독교의 천지창조(天地創造)설도 지성인들이 납득하기 곤란한 점이 있지요. 나는 기독교 관계자들에게 하나님이라는 뜻은 생명체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일러주고 있지요.
얼마 전 직지사에 내려가 있었는데 몇명의 수녀가 찾아와 교리에 대한 문답을 요청해 왔기에 응했지요. 객관적인 입장에서 대화와 토론을 했지요.
그들도 천지창조설 같은 부분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말씀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 티끌만큼이나 많은 국토를 다 셀 수 있고(刹塵心念可數知) 큰 바다의 물을 다 마실 수 있다며(大海中水可飮盡),
허공에 지나는 바람을 붙들어 맬 수 있는 지혜와 재주가 있는 사람일지라도(虛空可量風可繫) 부처님의 지혜와 공덕을 다 말할 수 는 없다 (無能盡說佛功德)” 그렇습니다. 부처님께서 정각하신 본래 면목의 진리 자리는 언어와 사고를 휠씬 뛰어넘어 있습니다.
그 본체 자리는 우주가 생성되기 이전 석가모니 부처님이 땅에 출현하시기 이전부터 지금까지 있어 왔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이른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하여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 했습니다.
2천5백여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이 내관자성 (內觀自省)하여 증오하신
그 자리는 무엇으로도 다 드러낼 수 없는 자리입니다.
이 자리는 참으로 깊고도 미묘하여 입을 열어 말을 해도 그르칠 것이요 입을 닫아 말을 아니 하여도 그르칠 자리입니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으면서 또한 이를 꿰뚫고 있기도 합니다.
본래부터 청정하고 신령하기에 무엇이라 이름 붙일 수도 없습니다. 부처님은 이를 증득하셨기에 각자(覺者)가 되신 것입니다. 이 자리를 바로 찾은 사람은 하루 하루를 광명 속에 사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생활이요
그렇지 못한이는 전도몽상의 일상인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 자리를 무사증오(無師證悟)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도 누구나 평등하게 이 자리를 증득할 수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샛별을 보시고 견성하신 순간 이미 진리와 하나가 되신 것입니다. 진리이면서 인간 석가모니 부처님이시고 인간 석가모니 부처님이면서 진리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너와 내가 하나이고 우주와 내가 하나인 경계입니다. 이는 하나속에 만법이 있고 만법 속에 하나가 녹아 들어 있는 경계입니다. 탁 트인 이 자리는 선악조차도 초월하고 있습니다.
불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향상되고 발전되려는 의식을 가진 사람은 자연히 불교를 행하게 됩니다. 불교란 지혜를 개발하여 점점 생명의 본질에 다가가려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불생불멸의 본질은 상황에 따라 증감이 없는 법입니다. 마치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지만 그
파도 자체는 바로 물이듯이 인과 연에 따라 모양이 변하는 허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언제나 변치않는 생명의 본질을 관찰할 때 우리는 진리를 깨달아 대자유인이 될 것입니다.
좋은 업도 나쁜 업도 모두 생명의 본질을 의지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눈이 열린 사람(覺者)에게는 번뇌가 바로 보리가 됩니다.
이 도리를 깨달아 자유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조선 명기(名技)들의 명시(名詩)
그대에게 봄 오고 그댄 오지 않으니 바라보아도 바라보아도 덧없는 마음 들여다 보는 거울엔 먼지가 끼어 거문고 가락만 달아래 흐르네
부안기생 매창
취하신 님께 취하신님 사정없이 날 끌어단 끝내는 비단적삼 찢어놓았지 적삼 하날 아껴서 그러는게 아니어 맷힌정 끊어질까 두러워서그렇지
부안기생 매창
말위에서 시를 읋는다 성천 길 위에 말 멈추니 꽃지는 봄날 두견새 시름일세 물길은 평양으로 통하고 땅은 강선루에 잇닿았네
성천기생 채소염
상사몽 꿈길밖에 길이없어 꿈길로가니 그님은 나를 찾아 길 떠나셨네 이뒤엘랑 밤마다 어긋나는 꿈 같이 떠나 노중에서 만나기를 지고
송도기생 황진이
相思相見只憑夢 (상사상견지빙몽) 그리워라, 만날 길은 꿈길밖에 없는데 訪歡時歡訪 (농방환시환방농) 내가 님 찾아 떠났을 때 님은 나를 찾아왔네 願使遙遙他夜夢 (원사요요타야몽) 바라거니, 언제일까 다음날 밤 꿈에는 一時同作路中逢 (일시동작로중봉) 같이 떠나 오가는 길에서 만나기를
산은 옛산이 로되 물은 옛물이 아니로다 주야(晝夜)에 흐르그든 옛물이 있을소냐 인걸(人傑)도 물과같도다 가고 아니 오노 매라
송도 기생 황진이
어져 내일이야 그릴줄 모르던가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송도 기생 황진이
내 사랑 남 주지 말고 남의 사랑 탐치마소 우리 두사랑에 잡사랑 행여 섞일세라 아마도 우리사랑은 류가 없는가 하노라 일생에 이사랑 가지고 괴어 살려 하노라
송도 기생 황진이
먼 곳에 있는 님에게 부치다 헤어진 뒤 (雪山)설산 막혀 아득한 저길 꿈속에서나 님 곁에서 웃어봅니다 깨고 나면 베겟머리 그림자도 볼 수 없어 옆으로 몸 돌리면 등잔불도 쓸쓸해요
진주기생 계향
죽어서 잊어야 하랴 살아서 잊어야 하랴 죽어 잊기도 어렵고 살아 그리기도 어려워라 저 님아 한 말만 하소서 사생 결단 하리라
평양기생 매화
매화 옛 동절에 봄철이 돌아온다 옛 피든 가지 마다 핌적도 하다마는 춘설(春雪)이 난 분분하니 필동 말동 하여라
평양기생 매화
놀리터의 노래에 목이 쉬어 돌아와서 화가 나 함부로 뜯는 가야금이여 줄이 끊어지도록 뜯으며 뜯으며 이 밤을 새 일거나
평양기생 장연화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 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송도기생 황진이
해설
청산리靑山裏:푸른 산속.
수이:쉬,쉽게,빨리.
일도창해一到蒼海:한번 넓은 바다에 이름.
明月滿空山暫休且去若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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