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6. 11. 20:00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도림 선사와 백거이의 만남을 그린 선화(禪畵). 작자 미상.
‘지금 여기’의 거사선
시(詩)로 중생을 구제한
지행합일의 자유인, 향산거사 백거이
죽지 않고 좀더 사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 (未歸且住亦不惡)
주리면 먹고 즐거우면 마시며 편히 자기 때문 (飢餐樂飮安穩眠)
죽으나 사나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으니 (死生無可無不可)
진리에 통달했구나 백락천! 도통했구나! (達哉達哉白樂天)
‘배고프면 밥먹고 피곤하면 잠잘 뿐이라’는 기래끽반곤래면(飢來喫飯困來眠)의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와 삶과 죽음을 초월한 인생 달관의 경지를 노래한 이 시의
작자는 과연 누구일까. 다름 아닌 향산거사(香山居士) 백거이(白居易, 772~846)다.
당나라 때 방 거사, 육긍 대부, 배휴 거사 등 뛰어난 재가 선객들과 동시대의
거사이자 시인으로 유명한 백거이 역시, 거사선의 역사에 큰 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백거이는 두보, 이백과 함께 당대를 대표하는 3대 시인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자는 낙천(樂天),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ㆍ향산거사이며 이백(李白)이 죽은 지 10년,
두보(杜甫)가 죽은 지 2년 후에 낙양(洛陽) 부근의 신정(新鄭)에서 태어났다.
5살 때부터 이미 시 짓는 법을 배운 천재였다. 27세에 진사시험에 급제해 한림학사,
좌습유(左拾遺) 등을 지냈으나 순탄한 관직생활은 아니었고, 나이 50이 넘어서야
항주와 소주의 자사(刺使)를 역임하게 되었다.
이후 향산에 숨어 참선하면서 시와 곡차로 유유자적한 만년을 보냈다.
그의 시는 민중시인, 풍유(諷諭)시인 등으로 불릴 만큼 하층민의 입장에서 세상의
불공평을 개탄하고 백성을 연민하는 내용이 많다.
그의 풍유시 170여 수와 신악부(新樂府) 50수는 평민의 비참한 생활과 사회적인
모순과 갈등을 인본주의적인 안목으로 노래한 것으로 평가된다.
대표작으로는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테마로 한 ‘장한가(長恨歌)’와 비파 타는
여인의 고단한 인생사를 서정적으로 읊은 ‘비파행(琵琶行)’등을 들 수 있다.
어려서부터 총명과 학식이 뛰어난데다 벼슬까지 한 백거이는 엘리트 코스를 밟다보니
중년까지는 아무래도 우월감에 충만해 있었을 것이다. 그가 항주 태수(杭州 太守)가
되었을 때, 과원사에 주석하던 이름난 고승 도림 선사(道林禪師, 741~824)를 친견할
때의 태도를 보면 지식인으로서의 거만함을 엿볼 수 있다.
맑은 날이면 경내에 있는 오래된 소나무 위에 올라가 좌선 하곤 해서 ‘조과선사
(鳥窠禪師)’라는 법호가 붙은 도림 선사를 찾아간 것도 순수한 구도심에서라기
보다는 선지식의 무게를 달아보겠다는 불순한 동기도 있었던 것 같다.
백거이가 수행원을 거느리고 절에 가서 조과도림 선사를 찾으니,
마침 선사는 나무 위에 앉아서 졸고 있었다.
거사가 말했다.
“선사님, 머무시는 곳이 너무 위험합니다.”
그러자 선사가 대답했다.
“태수가 더욱 위험하군요.”
거사가 다시 말했다.
“제자는 진강산(鎭江山)에 있는데, 어찌 위험하겠습니까.”
“섶나무와 불이 서로 만나듯이 식성(識性)이 멈추지 않으니,
어찌 위험하지 않으리오.”
선사가 이렇게 경책을 하자, 거사가 자세를 바로잡고 다시 진중하게 여쭈었다.
“무엇이 불법의 대의(大義)입니까?”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여러 선을 받들어 행하십시오.(諸惡莫作 衆善奉行)”
거사가 실망했다는 듯이 반문했다.
“세 살 먹은 아이도 아는 것을 어찌 말하십니까?”
“세 살 먹은 아이도 말할 수 있지만, 팔십 노인도 행하기는 어렵지요.”
선사의 말에, 거사는 크게 깨닫는 바가 있어 예를 갖추었다.
『경덕전등록』과 『오등회원』등 공안집에 나오는 이 선문답에서는 두 가지 가르침이
내포되어 있다.
먼저, 진실로 위태로운 것은 때와 장소라는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늘 치성하는 분별ㆍ
식심(識心)에 있다는 것이다. 도림 선사는 높은 나무 위에 앉아서 졸고 있지만
무사태평한 반면, 백거이는 선사의 살림살이를 떠보려는 시비ㆍ분별심으로 세상을
살아가니 늘 헐떡이며 괴로울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세간의 삶은 언제나 권력과 돈, 쾌락을 쫒는 이해타산이 바탕이 된 생존경쟁의
장이기에 자칫 방심하다가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위험천만한 곳이 아닌가.
도림 선사는 이 점을 일깨워주면서 분별심이 아닌 무심(無心)으로 살아갈 때 세간
속에서도 청정한 깨달음의 삶을 구현할 수 있음(處染常淨)을 암시하고 있다.
선사의 두 번째 가르침은 불법의 요체가 단순한 지식이나 앎이 아닌, 수행과 실천이
일치하는 지행합일, 즉 해행상응(解行相應)에 있다는 것이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을 자부하던 백거이는 아마도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라고
하는 칠불통게(七佛通偈: 부처님이전 과거 7불의 공통적인 게송) 정도는 지식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 마음을 깨끗이 하기”란
그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본래의 마음자리는 선악을 초월한 자리이지만, 모든 부처님의
가풍(家風)은 선악을 초월한 가운데 선을 행하면서 공덕과 지혜를 닦고 쓰는 것이다.
만약 세 살 배기도 아는 말이라고만 여긴다면, 그는 아마도 이것을 실천해보지 않은
자일 것이다.
달마대사가 ‘이치를 깨달아 들어가는 문(理入)’과 ‘실천으로 증득하는 문(行入)’을
나눠 법문한 것도, 실천의 어려움을 넘어서게 하는 자비심의 발로에서 나왔으리라.
그렇다면 이입사행(二入四行)으로 총괄되는 ‘이입’과 ‘행입’은 과연 어떤 공부인가.
먼저, 이입(理入)이란 이치를 깨쳐 안심(安心)을 얻는 공부법이다.
경전(달마대사의 경우 능가경)의 종지(宗旨)를 깨달아 부처와 중생의 동일한 진성(眞性)을
깊이 믿고 벽관(壁觀: 경계에 요동치 않는 부동심을 얻는 선법)에 확고히 머물러서 차별,
상대(相對)의 입장을 떠나 진여일심과 하나 되는 것이다.
다음에 실천으로 들어가는 행입(行入)에는 보원행, 수연행, 무소구행, 칭법행의 네
가지가 있다. 보원행(報寃行)은 어떤 괴로움이 닥쳐도 그것을 자기 악업의 결과라고
생각하여 달게 받아들이며 참회하는 것이다.
수연행(隨緣行)은 고통과 즐거움, 득실(得失) 등은 모두 인연에 의한 것이라고 관하여
마음이 동요하지 않고 도에 따르는 실천행이다.
무소구행(無所求行)이란 일체만유는 공이며, 현실의 세계는 무상함을 깨달아서 아무
것도 구하거나 원하지 않는 수행이다.
칭법행(稱法行)이란 본래 청정한 진리에 부합하는 실천행을 말하며, 공관(空觀)에
입각해서 행해지는 육바라밀을 가리킨다.
옛부터 불법의 요체를 알았다고 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진리 그대로 살아가는 도인은
극히 적었다. 선(禪)의 이치를 깨달아 이입(理入)한 부처 아들이 완전한 어른 부처가
되려면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하는 행입(行入)을 닦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달마대사가 말한 불행(佛行)수행이다.
그래서 달마대사는 「소실육문(少室六門)」에서 “부처님 마음의 종지를 밝혀 부처님
마음과 똑같이 하나로 될 것이니, 앎과 행이 서로 상응하면 조사(할아버지 스승)라
할 수 있으리라(明佛心宗 等無差誤 解行相應 名之曰祖)”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깨달았다고 하는 이들은 많았지만, 조사(祖師)의 칭호를 받을 정도로
큰 선지식은 드문 것이니, 혹여 ‘한 소식’을 얻었다고 자부하는 수행자라면 법락
(法樂)에 안주하지 말고 부처행으로 보임(保任)하면서 우리 시대의 대선지식으로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법음(法音)을 전해야 할 것이다.
도문 선사로부터 실천행의 중요성을 깨달은 백거이는 더욱 진실하게 중생에 대한
연민과 자비심을 발하는 시를 쓰고, 자신의 재산을 불사(佛事)에 내놓는 한편,
마음 비우는 참선과 염불수행에 매진하며 일생을 자유인답게 멋스럽게 회향했다.
그는 148명의 지인들과 ‘상생회(上生會)’라는 결사를 만들어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고 부처님 같은 자세로 좌선하며 내세에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였다.
말년에는 벼슬자리를 내놓고 18년 동안 향산에 머물며 스스로 ‘향산거사’라 칭했다.
그는 사재(私財)를 털어 향산사를 중수한 뒤, 불광여만(佛光如滿) 선사가 향산사
주지가 되는데 일조했다. 이곳에서 여만 선사를 모신 가운데 정토결사인
‘향화사(香火社)’를 결성하고 ‘아미타불’ 염불에 매진해 선정일치(禪淨一致:
선과 염불이 일치함)의 선구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몇 년후 여만 선사가 먼저 열반에 들자, 백거이를 비롯한 아홉 도반들은 향산사에
묘탑을 세웠다. 그후 몇 년이 지나 백거이도 임종에 이르러
“여만 선사 묘탑 옆에 나를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유언에 따라 846년, 그는
선사 옆에 나란히 묻혔다. 현재 여만 선사의 묘탑은 없어지고 백거이의 묘만
존재하는데, 이 묘를 ‘백원(白園)’이라고 칭한다.
오늘날도 많은 시인과 불자들이 백원을 찾아 향산 거사의 깨달음과 백성을 사랑한
그의 문학성을 높이 찬탄하는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깨달음의 향훈(香薰)은 천년의 시공을 훌쩍 넘어 지금, 이 잡지의 독자들에게까지
전해지고 있으니 불가사의할 따름이다.
푸른바다 김성우(도서출판 비움과소통 대표)
이 글은 월간 <고경> 2014.06월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6월엔 내가 / 이해인 숲 속에 나무들이 일제히 낯을 씻고 환호하는 6월 6월엔 내가 빨갛게 목타는 장미가 되고 끝없는 산향기에 흠뻑 취하는 뻐꾸기가 된다 생명을 향해 하얗게 쏟아버린 아카시아 꽃타래 6월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더욱 살아 산기슭에 엎디어 찬 비 맞아도 좋은 바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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