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 아는 마음, 생활불교

2014. 6. 25. 17:2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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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 아는 마음, 생활불교

 

 

  중국 당나라 대시인 백낙천이 도림선사를 찾아가 "불교의 대의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스님은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이라고 하니,

백낙천은 웃으며 "그런 것은 어린 애도 다 아는게 아니냐"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러자 도림선사는 "비록 세살의 어린애도 다 알지만, 여든 먹은 노인도 행하기 어렵다"

말했습니다.

사실 위 말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요 실천의 종교입니다.

 

불교는 형이상학적, 현학적, 관념적 종교가 아니라,

 바로 이 자리에서 문제를 해결을 지향하는 실천과 행동의 종교입니다.

불교의 가장 근본 가르침은 고집멸도(苦集滅道)란 사성제입니다.

이 세상 사는 것이 고(苦)요, 고요의 원인은 집착(集)이요, 

집착을 멸(滅)하면 열반이요, 열반으로 이르는 길이 도(道)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생활 속에 온갖 번뇌로 인해 고통 받는 것을 직시하고 그 번뇌를 소멸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법이 팔정도입니다.

팔정도의 핵심은 삼법인에 입각하여 자신의 몸과 느낌과 마음과 제 현상에 대한 연기적인 알아차림을 하는 것입니다.

 

불교 수행은 머리로만  안다고 할 때는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으로 알면 지식으로 아는 것이지 지혜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알음알음이라 합니다.

그래서 불교를 제대로 알고 실천할 때 비로소 다 아는 것이 됩니다.

생활 속에서 지혜를 터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혜로 알아야 사물의 이치를 통찰하여 다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으로 알면 지혜로 알려고 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모를 수가 있습니다.

지혜로 알면 내가 다 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모른다는 것을 알 때만이 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오직 모를 뿐!!”

 

지식으로 번뇌를 알 때는 말만하고 실천하지 않습니다.

지혜로 알 때만이 말없이 실천하게 됩니다.

실천해서 번뇌를 끊을 때만이 지혜가 나서 바르게 아는 것이 됩니다.

 

지혜가 나기 위해서는 염불이나 기도 그리고 참선이나 명상수행을 합니다.

이 수행을 통하여 마음이 평안하게 되고 정화가 됩니다.

이 정화되고 평안마음으로 자신을 스스로 관찰해 봅니다.

자신의 몸과 느낌 그리고 마음과 연기법을 스스로 알아차림 합니다.

삼법인(무상, , 무아)을 생활속에서 철저하게 체득하여 알아차림 하면

지혜가 저절로 툭 트이게 됩니다.

이러한 수행을 한마디로 사념처 수행이라 합니다.

흔히들 이러한 수행을 위빠사나 수행이라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법입니다.

위빠사나의 기초수행은 호흡수행부터 합니다.

그리고 몸에 대한 알아차림, 느낌에 대한 알라차림, 마음에 대한 알아차림,

법에 대한 알아차림 수행을 합니다. 이를 사념처 수행이라 합니다.

근본불교 중 수행에 관한 대표적인 경이 대념처경입니다.

이 경에 이 수행법이 자세히 나옵니다.

 

 

대승불교의 경전에도 수행법에 대해서 많이 나옵니다.

 

<<능엄경>> 25원통법은 5장애(욕망/성냄/혼침/불안정걱정/의심)와 오온에 대한 관찰이 나오고 여섯 가지 감각기관과 6가지 경계와 6가지 의식에 대한 가르침이 나옵니다.

그리고 50마장은 탐진치란 삼독으로 일어나는 것이라 밝히고 이를 알아차림 해서 번뇌를 극복하는 방법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위빠싸나를 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엄경>>10지품(十地品)은 초지에서 등각, 묘각까지 과정이 바로 10가지 번뇌를 제거해 나가는 과정을 설한 것입니다. 이것 또한 위빠싸나를 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금강경>>에서는 6가지 감각기관인 육입(六入)의 대상인 </소리/냄새//촉감/생각>에서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 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住 而生其心)라고 했습니다.

이 뜻은 대상에 머무르게 되면 분별하여 집착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볼 때는 보는 즉시 관하고, 들을 때 듣는 즉시 관하고, 냄새를 맡을 때 맡는 즉시

관하고.....생각날 때 그 즉시 음 내가 생각을 하고 있구나!’를 알아차림()하면 분별. 망상이 없이 본체에서 나오는 반야관(直觀)이 이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住 而生其心이란 금강경의 핵심적인 수행법입니다.

육조스님이 이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삼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금강경의 4구게는 모두 마음을 알아차리게 하는 수행법으로 위빠싸나와 맥을 함께 합니다.

 

 

염불도 처음에는 타력신앙으로 칭염 염불을 계속하다가 이것이 깊어지면, 자연히 염불하는 자신을 관하게 되고, 몸과 느낌과 마음을 관하게 되고 나중에는 왜 그런가?’라는 의심(의관/疑觀)이 툭 터져 나옵니다. 그 다음부터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부처를 찾게 되고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고 사무쳐 자신이 생각하기 이전의 본래자리를 궁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자성미타를 관하는 것이며 이것은 자력신앙이 됩니다. 그리고 혜가 밝아지면 사물을 사리에 맞게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면 무상(無常). 무아(無我). 고(苦)의 삼법인이 다 통하고 연기법이 다 통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6조 스님이나 역대 많은 조사들 그리고 조선조의 서산대사 까지도 이 염불법의 장점을 이야기 했던 것입니다.

 

 

결국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사성제로 통하고, 연기법으로 통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혜를 터득하는 것이 불교요,

고통 받는 중생을 지혜로 관찰하면 자비심이 우러나옵니다.

이 모두가 수행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승불교 근본불교는 물론 모든 불교의 수행법이 다 훌륭하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인 사성제와 연기법을 수행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