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는 닦을 것이 없다. 물들지만 마라 / 법상스님

2014. 6. 25. 18:1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728x90

 

 

 

도는 닦을 것이 없다. 물들지만 마라 / 법상스님

 

마조도일 스님은

“道는 어떻게 닦는가”를 묻는 한 스님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하고 있습니다.

 

 

 

“道는 닦을 것이 있는 게 아니다. 닦아서 이룰 수 있는 道라면 그 道는 다시 무너지기

마련이니 이런 道는 聲聞의 道일 뿐이다.

그렇다고해서 닦지 않는다면 그는 그냥 凡夫일 뿐이다.”

 

 

 

 

道를 닦는다 함은 修行을 말합니다. 아마도 佛子들이라면 누구나 열심히 修行을 해야

한다는 말을 끊임없이 들어왔을 것입니다. 심지어 목숨 걸고 修行해야 하고,

修行만이 살 길이라는 말도 듣곤 했습니다. 3,000배, 1만배 절 修行을 하거나, 몇 시간이고

앉아서 坐禪을 이어가거나, 金剛經 7독씩 매일 독송을 하고, 대비주를 100독 이상 독송하는

등 우리가 지금까지 알아왔던 道를 닦는다는 修行은 이처럼 끊임없이 혹독하게 道를 닦는

修行을 하는 일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挫折感을 맛봅니다. 修行을 잘 하는 사람 앞에서 萎縮되기도 하고,

 

修行을 못하고 根機가 낮은 自身을 탓하기도 하면서 相對方과의 比校 속에서 劣等感을

 

느끼기도 합니다.

 

修行을 하는 理由는 幸福해지기 위해서이며, 他人과의 比較나 差別을 여의기 위해 하는 것인데,

오히려 修行 때문에 괴로워지는 일이 생기기 始作합니다. 그러다보니

 

불자님들 또한 自身이 3천배를 몇 번 해 보았고, 화두 수행을 몇 년 동안 했으며, 어떤 三昧를

 

맛보았다는 등의 自己 誇示的인 修行 이야기를 드러내곤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修行은 이런 것들과는 아무런 相關이 없습니다. 修行 하면서, 佛敎를 工夫하면서

 

남들보다 더 잘한다거나 더 못한다거나 하는 이 兩邊의 極端的인 生覺은 지금 이 瞬間부터

 

完全히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修行에 관한 그러한 生覺은 단지 生滅心인 妄想이고 差別心일 뿐 전혀 불교의 修行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道는 닦을 어떤 것이 아닙니다. 닦아서 이루어 가질 수 있는 道라면 그 道는 닦는다는 作爲的인

 

努力을 通해 없는 것을 얻어 가진 道이므로 언젠가는 무너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道는 努力을 通해 얻는 무엇이 아닙니다. 道는 어떤 對相이 아니고 名稱도 없기 때문입니다.

 

道는 내가 노력해서 얻어 가질 수 있는 어떤 物件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眞理, 法, 道가 特別한 境界의 어떤 對相이라면 努力을 통해서 내 것으로 만들 수도 있겠지만,

對相도 아니고 名稱도 없는 道을 어떻게 努力으로 얻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道가 만약 닦아서 얻는 무엇이라면 더 잘 닦는 사람과 잘 못 닦는 사람 사이에 差別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러나 道는 닦을 무엇이 아니기 때문에 더 잘 하고 못 하는 差別이 없습니다.

道는 누가 더 잘 닦는가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修行은 무슨 運動競技나 學校 試驗 같은

 

것이 아니어서, 더 열심히 한다고 빨리 到達하는 것도 아니고, 못한다고 到達할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道는 成取하거나 얻는 무엇이 아니라, 다만 確認하는 일일 뿐입니다. 없던 것을 얻기 위해서는

 

없는 것을 새롭게 얻어내기 위해 애쓰고 努力해야 하지만, 確認한다는 일은 이미 있는 무엇에

 

대해서 거기에 그렇게 있었음을 다만 確認하는 일일 뿐입니다.

 

 

 

 

 

 

마조스님은 이어서 “어떻게 道를 깨달을 수 있는가?” 하는 質問에 아래와 같이 答辨하고 계십니다.

 

 

 

“自性은 本來 그대로 完全하다...

 

다만 善이니 惡이니 나누고 하는 데 갇히지 않을 수 있다면 그를 修道人이라 할 수 있다.”

 

 

 

 

道는 없었던 道을 새롭게 얻어 갖는 道가 아니라, 다만 이렇게 本來 그대로 完全하게

 

具足되어 있는 道를 다만 確認하는 일일 뿐입니다. 다만 우리 意識이 善이니 惡이니 하고

 

둘로 나누고 分別하고 差別하는 生滅心 妄想心 때문에 우리 意識은 있는 그대로의 道를

 

보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 意識이 生滅心인 煩惱 妄想 分別心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 자리가 바로 깨달음의 자리인 道입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 마세요. 일단 道, 깨달음, 修行에 對한 偏見에서 놓여나시기 바랍니다.

 

 

修行을 잘 함 못 함으로 나누고, 남들 보다 修行을 더 잘하려는 生覺이야말로 어리석은

 

生滅心 無明心인 生覺 妄想임을 깨어 있는 意識으로 똑바로 觀察해보시기 바랍니다.

 

 

 

單純하게 온갖 妄想과 生覺이 만들어내는 옳다 그르다, 잘한다 못한다, 좋다 싫다,

 

내 편 네 편 하는 그 모든 分別心과 妄想의 差別心 生滅心들에게 우리 意識이 끌려가지만

 

않을 수 있다면, 그 자리가 바로 道, 平常心 입니다.

 

 

 

 

그래서 마조스님은 [마조어록]에서 다음과 같이 法을 說하고 계십니다.

 

 

 

“道는 닦을 일이 없으니, 다만 물들지만 말라. 무엇이 물듦인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마음(生滅心)으로 무언가를 造作하여 行하려고 하는 生覺, 그 生覺

 

妄想이 바로 우리 意識이 물듦이다. 道가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가? 平常心이 바로 道다.

 

平常心이란 무엇인가? 一切의 人爲的인 造作이 없고, 옳고 그름이 없고, 붙잡거나 버리는

 

일이 없으며, 끊어지거나 恒常함이 없고, 凡夫와 聖人이 없는 大平等心이다.”

 

 

 

 

道는 닦을 것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 意識이 生滅心인 生覺 煩惱妄想에 물들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마조스님의 표현에 의한다면 “自性本來具足” 즉 “自性은

 

本來 그대로 完全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지금 이대로 이 세상 모든 存在는 本來로 具足해

 

있는 完全한 存在 完全性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더 닦을 道가 없습니다. 이미 우리들

 

存在는 그 自體로 道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道 그 自體인 우리 存在는 물들어 있습니다. 물든다는 意味는 마조스님의 설명처럼

 

생겨나고 사라지는 生死心, 生滅心인 虛妄한 妄想인 生覺으로 무언가를 造作해내려고

 

애쓴다는 뜻입니다. 이 生滅心 生覺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기를 返復합니다.

 

 

그래서 生覺을 生死心, 生滅心이라고 하지요. 이처럼 因緣 따라서 바람처럼 오고갈 뿐인

 

虛妄한 生滅心 生覺으로 우리 議識은 무언가를 造作해서 만들어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우리 意識은 虛妄한 生滅心인 生覺으로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어 하고, 남들에게 더 認定

 

받고 싶어 하며,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어하고, 더 많은 關心을 받고 싶어합니다.

 

우리 意識은 끊임없이 自己 生覺 스스로 幸福이 무엇인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方式으로 成功해야 하는지, 얼마만큼 남들에게 認定받아야 하는지 등에 對해 基準을

 

만들어 놓고 意識 스스로 그 基準에 맞지 않으면 괴로워하고, 그 基準에 잘 들어맞을 때는

 

즐거워하는 虛妄한 生死心의 生覺놀이 속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이 生滅心인 生覺놀음이 바로 우리意識이 물든다는 뜻입니다.

 

 

 

 

우리 意識이 지금까지 人生을 살면서 해 온 모든 일을 한 마디로 表現하라고 한다면

 

바로 이처럼 生滅心인 生覺놀음에 우리 意識이 물드는 짓만을 해 온 것입니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마음, 生滅心인 生覺 妄想으로 수많은 일들을 造作해 온 것입니다.

 

 

 

마조스님은 道는 바로 平常心이라고 했습니다(平常心是道). 우리 意識이 우리 存在 앞에

 

놓여 있는 現在라는 삶 그 自體를 있는 그대로 生滅心인 生覺으로 물들이지 않고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이 삶 現實 이대로 道입니다.

 

 머릿속에서 生滅心인 虛妄한 生覺으로 온갖 煩惱 妄想과 分別, 差別과 解釋들, 判斷과 觀念

槪念들을 造作해 내지만 않는다면 지금 이 瞬間인 現實 그 自體가 그대로 道입니다.

배 고플 때 밥 먹고, 목 마르면 물 마시고, 졸리면 자는 이 單純한 每 瞬間瞬間의 平凡한

現實의 삶이야말로 고스란히 그대로 道입니다.

 

 

 

그러나 우리 意識은 배 고플 때 單純히 밥 먹는 道를 實踐하지 못한 채로 生滅心인 生覺

 

妄想에 물들어 버립니다. 곧 바로 生覺으로 生滅心으로 平常心인 道를 造作하기 始作합니다.

 

 

배 고플 때 그저 밥 먹을 뿐이면 되는데, 더 맛있는 것을 먹으려는 生覺에 애쓰고,

남들과 比較해서 더 좋은 것을 먹으려고 生覺하고, 미래나 노후에 먹을 것 까지 저장해

놓으려고 머리 속으로 生覺 妄想을 굴리고 欲心을 부리는 妄想을 造作해 내느라 單純하게

밥 먹기만을 하지 못합니다.

 

 

 

졸리면 單純하게 자면 될 일을 하루에 몇 時間 정도는 자야 한다거나, 오늘 많이 못 잤기

때문에 내일은 피곤할거라고 豫想하고, 남들보다 더 적게 자고 더 많이 努力해야 成功한다는

觀念 등의 온갖 相을 만들어 내고 그렇게 生滅心인 生覺 스스로 만든 觀念,온갖 相에

우리 意識 스스로 휘둘리며 살고 있습니다.

 

 

 

 

이 單純한 平常心이라는 道를 實踐하지 못하는 理由는 머릿속에 生滅心인 生覺이 너무

 

많고 複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意識에 그 모든 妄想과 分別, 造作하고 물드는 마음(生滅心),

 

生覺들만 없다면 그 자리가 바로 道라고 마조선사는 이야기 합니다.

 

 

 

卽, 平常心인 道란 人爲的인 造作이 없고, 옳고 그름의 나뉨이 없으며, 붙잡거나 버리는

 

일이 없는 마음임을 설명합니다. 生滅心인 生覺으로 人爲的으로 造作해 내지 않고,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는 分別心이 없으며, 좋은 生覺은 붙잡아 執着하고, 싫은 生覺은 멀리하거나

거부해버리는 이 兩 極端에 치우치는 生滅하는 마음(生滅心), 生覺 妄想이 없음이 平常心

 卽 道입니다.

 

 

 

그렇기에 平常心인 道는 現在라는 삶 위에 어떤 境界 對相이 오더라도 그것들을 과도하게

 

싫어하거나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습니다. 어떤 境界도 오면 오는대로 가면 가는대로

그저 모든 것이 自由로이 흘러가도록 許容합니다.

生滅心인 生覺 妄想으로 人爲的으로 어떤 境界를 붙잡거나 밀쳐내는 일 없이, 自然스럽게

自由롭게 平常心으로 받아들이고 흘러가게 합니다.

 

 

그러니 그런 平常心인 道의 삶에는 부처도 중생도 없고, 道와 道 아님도 없으며, 凡夫와 聖人도

 

없이 모든 것/對相/境界/現實/삶은 있는 그대로 完全하게 具足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런 平常心의 삶인 道는 아무 할 일이 없고, 어떤 是非 分別 比較 判斷도 없기에 언제나

如如합니다.

 

 

 

지금 이 瞬間, 生滅心인 生覺 妄想에 물듦이 없고 造作心이 없고 分別心이 없다면

당신은 누구입니까?

 

 

 

 

달의 여인 / 청솔향

그윽한달 눈동자에 서린애환 고운여인 일구월심 헌신봉사 천상선녀 나툼이고 설운나목 흰눈편린 엮어모아 장식하니 물레여인 검버섯은 연꽃관음 화현이네 쏟아지는 달빛아래 琴줄타는 가녀린님 끊어질듯 이어지고 잠기는듯 울려퍼져 맑은바람 고요속에 소름돋아 청아한음 허허로운 고적감에 애간장을 다녹이고 육안으로 아니보면 분별할일 없음이며 귀를열어 듣잖으면 시시비비 하릴없고 넉넉하고 공적하여 한물건도 없음이라 삼라만상 산하대지 온우주가 고향인데 단풍사연 서글픔에 흔들리는 달의눈빛 달을품은 연민의정 여린마음 우비고뇌 어김없는 일월교차 서리맞은 청운의꿈 털어말려 하늘보니 시린달빛 영롱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