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점과 천태종개조 상월대사 이야기... 조용헌교수

2014. 6. 18. 17:0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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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占)이란 ?앞일을 예측하는 작업?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내 인생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하는 궁금증은 인간의 영원한 관심사다. 식욕, 성욕, 수면욕 다음으로 인간의 강력한 욕구 중 하나가 앞일을 알고자 하는 미래욕(未來慾)이 아닌가 싶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욕구는 쇠퇴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점은 바로 그러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대안이기도 하다. 그래서 점쟁이는 각종 직업 가운데 가장 오래 된 직업이기도 하다. BC 3000년 전부터 있던 직업이 점쟁이라는 직업이다. 물론 그때는 점쟁이라고 하지 않고 제사장이라는 품위 있는 직함으로 불렸지만 말이다.


근래의 직업 가운데 가장 ?점쟁이스러운? 직업이 증권사 애널리스트다. 펀드매니저의 사촌격인 애널리스트(analyst)들은 미래의 주식시세를 알기 위해 끊임없이 자료를 분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널리스트의 주식시세 예측이 다 맞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애널리스트의 예측을 믿고 주식을 샀다 신세 망친 사람이 주변에 부지기수다. 적중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애널리스트들은 여전히 월급을 받으면서 명줄을 이어간다.


상당히 선망하는 직업이기도 하다. 필자가 보기에는 5,000년의 역사를 지닌 정통 점쟁이의 계보를 잇는 사람들이 바로 애널리스트들이다. 미래를 예측한다는 측면에서 이들의 작업 내용이 점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콘텐츠는 그대로인데 포장지만 바뀌었을 뿐이다. 점이 맞으면 수십억원의 연봉도 가능하고 사회적 대접도 좋아 선망하는 직업이 됐을 뿐 작업 내용이 점쟁이의 점사(占辭)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애널리스트와 사주쟁이가 다른 점은 미국의 MBA 수료 여부다. 미국에서 MBA 자격증을 땄으면 애널리스트가 되고, 못땄으면 사주쟁이가 된다.


애널리스트에서 사주쟁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점쟁이는 왜 도태되거나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존재하는 것인가. 도대체 점은 미신(迷信)임에도 불구하고 왜 인류사에서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해 필자가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두가지다.

 

첫째, 점은 맞기 때문에 존재한다. 무릇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는 그 존재 이유가 있다. 마찬가지로 점이 아직도 우리생활에서 유통되는 가장 큰 이유는 맞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왜 미신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인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맞지 않으면 미신이고 사기가 된다.


이를 일러 ?혹중(或中) 혹부중(或不中)?이라고 표현한다. 점은 그 중간 어디엔가 있다. 그렇다고 완전히 중간은 아니다. 좀더 좁혀 말한다면 맞지 않을 확률보다 맞을 확률이 조금 더 높다. 기록을 살펴보면 동양의 성인 가운데 가장 합리적 사고에 충실했던 공자(孔子)도 점의 확률을 인정한 바 있다.

 

1972년 중국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시의 마왕퇴(馬王堆) 고분에서 출토된 ?백서?(帛書)를 보면 공자와 제자인 자공의 문답이 기록되어 있다. 자공이 공자에게 묻는다.

 

?선생님도 점이라고 하는 것을 믿습니까??(夫子亦信其筮乎)

?믿는다. 100번을 점치면 70번이 맞는다.?(吾百占而七十當)


상응의 원리 -道士는 미세한 조짐을 포착해야 한다


공자의 대답은 70% 확률이니 믿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공자가 점서(占書)인 ?주역?을 가죽끈이 세번이나 끊어지도록 탐독한 데도 알고 보면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70%는 고금의 점사(占事)에서 공통적인 확률이다. 사주를 봐도 대체적으로 70% 정도 맞는다고 한다. 즉, 10개 중 3개는 틀릴 수 있다는 말도 되고, 10개 중 3개는 알 수 없다는 말도 된다. ?고스톱?의 황금률도 ?운칠기삼?(運七技三)이다. 운이 70이고 기술이 30이라는 확률이다. 운은 운명적 요소를 지칭하고, 기술은 개인의 자유의지와 노력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운명 70, 노력 30의 비율이라는 의미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대목은 70%라는 확률이다. 어떻게 해서 7할이 맞을 수 있는가. 5할이 넘는다는 것은 우연으로만 돌릴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7할이라는 바탕에 깔린 원리는 무엇인가를 탐색해 보기로 한다. 필자는 그 원리를 3가지로 압축한다. 첫째는 상응(相應․Correspondence)의 원리며, 둘째는 반복(反復)의 원리고, 셋째는 귀신(鬼神)의 존재다.

 

상응의 원리란 시간(天文)․공간(地理)․존재(人事)라는 각기 다른 3차원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원리다. 그 좋은 예가 카오스(chaos) 이론이다.


현대물리학에서 말하는 카오스 이론이란 베이징(北京) 상공에 있던 한마리의 나비 날갯짓으로 인한 파장이 캘리포니아 상공에 가서는 폭풍우로 변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카오스 이론은 혼돈 현상의 이면에 특정의 질서(cosmos)가 작동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비의 날개짓과 폭풍우는 전혀 무관한 차원 같아도 알고 보면 서로 관계가 있다는 주장이다. 언뜻 보기에는 혼돈 같지만 깊이 들어가 보면 상응 관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현대물리학자들은 설파하고 있다.


상응의 원리에 의하면 만물은 거미줄과 같은 미세한 끈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한쪽을 잡아 흔들면 다른 한쪽까지 흔들린다는 설명이기도 하다.

 

풍수에서 말하는 동기감응(同氣感應)의 원리도 이와 같다. 땅속에 묻혀 있는 조상의 뼈라고 하는 매체를 통하여 조상의 백(魄)과 후손의 백이 서로 감응한다고 본다. 그 감응 현상은 꿈으로 나타난다. 대체로 묘를 쓰고 나서 10일 안에 직계가족들에게 선몽이 있게 마련이다. 명당 자리에 들어갔으면 망자(亡者)가 환한 표정으로 깨끗한 집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고, 물이 나오는 좋지 않은 자리에 들어갔으면 초췌한 표정이나 허름한 옷을 입고 나타나는 수가 있다.


아무런 꿈도 없으면 해도 없고 득도 없는 무해무득(無害無得)의 자리에 들어갔다고 판단한다. 상응의 원리에서 중요한 것은 징조를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어떤 일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대한 단서가 징조라고 한다면, 징조를 파악함으로써 결과에 대한 사전 예측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베이징 상공에서의 나비 날갯짓은 점술가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의 징조다. 이것을 보고 캘리포니아 상공에 얼마쯤 후에 비가 오리라는 것을 예측하는 것과 같다. 꿈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밤에 꾼 꿈을 가지고 낮에 전개될 일을 미리 짐작하는 경험을 일상에서 수없이 겪는다. 앞일을 미리 예시하는 선견몽(先見夢)은 전개되는 상황을 판단하는 징조이자 중요한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점술가는 다른 사람이 무심코 지나치는 미세한 조짐에 주목하고 이를 잡아채는 능력을 지녀야 한다. 마치 배가 난파당할 조짐을 보이면 그 배에 사는 쥐들이 미리 대피한다고 하듯, 점술가는 난파선의 쥐처럼 예민한 후각과 육감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10․26이 일어나던 해인 1979년 초여름 신문에 두꺼비가 뱀을 잡아먹는 사진이 보도된 적이 있었다. 보통사람 같으면 단순한 흥밋거리로 지나칠 수 있는 이 사진이 예민한 안테나를 가진 술사(術士)에게는 하나의 징조로 받아들여지는 수도 있다. 곧 인간세에서 하극상의 징조라고 해석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박정희는 정사(丁巳)생 뱀띠이고, 김재규의 관상은 두꺼비 상이다. 두꺼비가 뱀을 잡아먹는 신문의 사진을 보고 김재규가 박정희를 잡아먹는 사건과 연결시키는 것이 술사들의 상응 능력이기도 하고 상상력이기도 하다. 모든 일에는 반드시 조짐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읽어 내느냐 못 읽어 내느냐의 차이다. 필자에게 이 이야기를 해준 인물은 전주에 사는 동전(東?)거사다. 그는 전주의 풍류객이요, 선가(仙家)에 조예가 깊은 인물이다. 대학을 졸업한 뒤 취직은 제쳐두고 우리 산천에 대한 그리움을 벗삼아 전국을 방랑했다. 26세에 시작하여 32세까지 전국을 두 발로만 걸어다녔다. 그 방랑 과정에서 재야의 수많은 기인들과 사귈 수 있었고, 그 만남을 통해 관상과 주역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


필자는 그와 교류하면서 ?주역?과 관상에 대한 많은 에피소드들을 듣게 되었는데, 그는 상응의 원리에 바탕한 점서가 바로 ?주역?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곤 했다. ?주역?에 등장하는 64괘는 괘(卦)를 뽑는 사람의 마음과 상응한다는 전제를 깔고 해석해야 한다. 그는 어느 음식점에서 처음 필자를 대면했는데, 필자의 인상을 한번 보고 64괘 중 50번째 괘인 ?화풍정?(火風鼎)의 괘가 떠오른다는 이야기를 건넨 바 있다. 위에는 리(離)괘, 아래에는 손(巽)괘가 합치면 정(鼎)괘가 된다. 필자에게서 풍기는 전체적인 기운과 이미지가 화풍정괘로 연결되더라는 것이다.


물론 이 판단은 괘를 손으로 뽑아 나온 결과가 아니고 동전거사가 필자를 척 보았을 때 떠오른 순간적인 이미지였다. 괘라고 하는 상징과 조용헌이라는 사람이 처해 있는 전체적인 상황이 서로 상응하는 상태를 감지한 것이다. 화풍정괘의 형상을 보면 위에는 불이 너울너울 타고 있고, 밑에는 바람이 불고 있다. 즉, 화덕에 솥단지를 걸어놓고 부채로 바람을 부치는 형상으로 이질적인 여러 요소들을 솥단지에 몰아 넣고 푹 삶는 상황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이질적인 여러 가지 것들을 모아 솥단지에 삶는 중이라서 매우 바쁠 것이고, 푹 고아 약물을 우려내면 그 약물은 아마 쓸 만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화풍정괘는 당시 내가 처해 있던 상황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집약적으로 표현한 괘로 이해하였다.

 

문제는 괘를 뽑는 사람의 상응 능력에 달려 있다. 즉, 현실과 괘를 연결시키는 능력이다.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을 64가지 괘 중 과연 어느 괘에 배당할 것인가는 그 사람의 주관적 영역에 속한다. 64가지 괘를 달달 외우는 방법으로는 백날 ?주역?을 공부해 봐야 헛일이다. 괘는 괘대로, 현실은 현실대로 따로 놀 뿐이다. ?주역?은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을 괘로 환원시킬 수 있을 때에서야 비로소 의미 있는 경전으로 다가온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감각을 예민하게 다듬어야 한다. 어떤 선입견도 없이 인간과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감각을 다듬는 방법이다. 감각을 예민하게 다듬으면 어떤 사물을 대하는 순간 즉시 괘로 환산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방바닥에 누워 천장을 보면 천장에 ?주역?의 64괘가 자동으로 그려지는 경지에 도달한다. 이 정도 경지에는 이르러야 어디 가서 ?주역?을 공부했다고 명함을 내밀 수 있다고 하겠다. 바꾸어 말하면 주역은 책만 외운다고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자연과 교감을 나눌 수 있을 정도의 예민한 감각의 확보가 관건이다.

 

제도권 학자이면서도 재야의 학문인 풍수에도 정통했던 고 (故) 배종호 교수는 생전 대학원 수업시간에 필자에게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내가 한창 풍수 공부에 골몰할 때는 산에 가보면 풍수 책이 머리 속에 펼쳐지고, 풍수 책을 보면 거기에 해당하는 산의 모습이 영화필름처럼 떠올랐네!?


동전거사는 그 감각을 다듬는 훈련을 신선들이 많이 살았던 설악산에서 하였다고 술회한 바 있다. 설악산에서 선가(仙家)의 사부를 만났던 것이다. 그 사부의 훈련 방식은 절벽 기어오르기였다고 한다. 설악산의 험난한 바위절벽을 기어오르다 보면 집중력이 생긴다. 발을 헛딛거나 손을 잘못 잡으면 떨어져 죽는다.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사력을 다해 바위를 움켜잡아야 한다. 잡생각은 일절 발생할 수 없다. 몇시간씩 바위를 붙잡고 있다 보면 바위와 익숙해진다.


바위를 손으로 잡고 발로 버티고 가슴에 안고 뺨으로 부비는 과정에서 바위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바위를 피부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절벽 기어오르기 훈련을 통해 집중력, 육체적인 근력, 담력, 자연과의 교감을 익힐 수 있었다. 바위절벽이 어느 정도 끝나자 몇시간씩 움직이지 않고 부동자세로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연습이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1시간, 그 다음에는 2시간, 3시간, 4시간…. 이런 식으로 시간을 늘려가는 수련이었다. 적어도 6시간 정도는 부동자세를 유지할 수 있어야 고요함에 들어갈 수 있다고 동전거사는 주장한다.


고요할 줄 알아야 내면세계에 들어갈 수 있고, 내면세계에 침잠해야 외부세계의 미세한 출렁거림도 그대로 포착된다. 부동자세의 시간과 내면세계의 깊이는 비례한다는 것이 동전거사의 지론이다. 부동자세 훈련이 어느 정도 단계에 이르자 인적이 완전히 끊긴 숲속에 앉아 있어도 숲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소리들이 전부 귀에 들어오더라는 것이었다. 숲 속의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도 포착되었다. 심지어 낙엽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순간의 소리는 물론 땅에 떨어지기까지 바람에 흔들리면서 너울거리는 소리까지 감지될 정도였다고 한다. 이처럼 예민한 상태에서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풍기는 냄새에서부터 얼굴에서 풍기는 빛, 목소리의 컬러, 눈동자에서 나오는 빛의 강도와 크기 등이 세밀하게 체크되는 것이다.


내면의 고요한 세계에 침잠 하는 것을 가리켜 삼매(三昧)라고 부른다. 불교의 ?휴휴암좌선문?(休休庵坐禪文)을 보면 고승들은 삼매의 극치를 ?나가대정?(那伽大定)에 들었다고 표현한다. 나가(那伽)는 큰 뱀을 지칭하는 단어다. 큰 뱀은 또아리를 틀고 가만히 있으므로 깊은 고요함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고, 그 고요함의 극치에서 큰 지혜가 솟아난다. 비범한 지혜는 내부에서 솟아나는 것이지, 밖에서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는 관점이 깔려 있다. 그래서 고요함이 중요하다.

나가대정의 경지에 도달한 고승들은 여섯가지 신통력을 갖춘다고 경전에 나와 있다. 누진통(漏盡通)․신족통(神足通)․타심통(他心通)․숙명통(宿命通)․천안통(天眼通)․천이통(天耳通)이 바로 그것이다.



월남전 파병과 상월조사


누진통이란 정액이 나오지 않는 경지로, 성적 욕망에서 해방되었다는 징표다. 신족통이란 하룻밤에 수천리를 갈 수 있다는 축지법이다. 타심통은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 내는 능력이다. 숙명통은 전생을 알 수 있는 능력이고, 천안통은 천리 밖에 있는 사물도 볼 수 있는 능력이다. 천이통은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이다. 이 여섯가지 신통력 가운데 속세의 중생들이 관심을 갖는 가장 중요한 능력이 숙명통이다. 숙명통에 도달하면 흔히 삼생(三生)을 안다고 한다. 전생(前生)․현생(現生)․내생(來生)이 삼생이다. 과거․현재․미래를 알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한국 천태종의 개창조인 상월조사(上月祖師․1911~74)는 숙명통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고승이었다고 전해진다. 단양 소백산에서 수도하였으며 소백산 구인사는 바로 상월조사가 세운 절이기도 하다. 상월조사의 여러 가지 도력이 양백지간(兩白之間․소백산과 태백산의 중간)의 도사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박정희 대통령과의 일화다. 1960년대 후반 월남전에 한국군을 파병해야 하는 문제를 두고 박대통령이 고민할 때였다.


미국에서는 파병하라고 압력을 넣고, 막상 파병하자니 나라의 젊은 청춘들을 명분 없는 전쟁터로 몰아넣는 것 같고. 잘못 결정하면 천추의 죄인이 될 수 있었다. 박대통령은 이 문제를 놓고 상당히 번민했다고 한다. 누구에게 상의해야 하나? 최고권력자는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해야만 한다.

 

 박대통령은 많은 도사와 고승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 자문을 구하였다. 당시 통도사 극락암에는 선승으로 알려진 경봉 스님이 계셨다. 박대통령은 극락암으로 찾아가 경봉 스님에게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물었다. 경봉 스님은 이 이야기를 한참 듣고 나서 주장자로 세번 방바닥을 꽝꽝 치는 것으로 법문을 마쳤다. 과연 선승다운 격외(格外)의 답변이었다.


격외의 도리를 이해할 수 없었던 박대통령은 여러 고승들을 방문하다 마지막으로 천태종의 상월조사를 찾았다. 그때만 해도 천태종의 세가 미미하던 때였다. 박대통령을 만나 이야기를 들은 상월조사는 파병하라고 조언했다. 파병하고 나면 그 뒤에 이렇게 저렇게 상황이 전개될 것이라고 박대통령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었다고 한다. 요는 ?현재 상황에서 파병을 안할 수 없다. 파병한 뒤에는 그 여파로 나라의 발전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설명을 들은 박대통령은 속이 시원했고, 그날부터 두 다리 뻗고 잠을 이룰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박대통령은 그 예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헬기를 보내 청와대로 두번이나 상월조사를 초청해 식사를 대접하였다. 국사 대접을 했던 것이다.

 

미약했던 천태종의 종세가 비약적으로 확장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 박대통령과의 만남 이후부터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국에 인물이 없는 것 같아도 재야에는 숨어 있는 고수들이 웅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엄청 재밌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도사님...^^

 

그런데 카오스 이론은 사실은 '연기법'이지요. 상응하고는 엄밀히 말하면 조금 다른 개념이라 할 수 있지요. 그리고 상응 역시 연기법적으로 말씀드리면, 결국 넓은 의미의 일
종의 연기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제 말씀이 모순되는 것처럼 느끼실텐데, 이 미묘한 차이를 어떻게 말슴드려야 하나...^^

 

동전거사님이 공부하신 세계는 제가 볼 때 불교의 세계와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다만 표현이 다를 뿐입지요. 동전 거사님이 보신 세계를 불교에서는 불교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결국 불교와 타 가르침과의 차이는, 그 가르침이 궁극적으로 '생명의 실상'으로 가느냐 못 가느냐에 있는 듯합니다. 이것을 불교적으로 말씀드리면, 결국 '부처님 품으로 들어가느냐 못 가느냐'라고 말씀할 수 있겠지요.
 
아무리 불자의 수행이 훌륭해도, 부처님 품에 들어가지 못하면 결국은 내 공부로 끝나고 맙니다. 아상이 되는 거지요. 그래서 수행자들은 한사코 부처님 품에 들어가야 합니다. 염불의 위대성이 이런 데 있답니다. 그리고 이런 가르침을, 불경 중에 거의 유일하게, 화엄은 설해 주고 계시지요.

 

화엄의 위대성은, 모든 중생을 '불자야
!'라고 불러주는 데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경전 자체가 '부처님'밖에 아니 계세요. 그리고 그 부처님, 불자들이 전혀 '차별'이 없어요. 이건 제가 화엄경을 읽을 때 이해를 못했던 부분이고, 굉장히 놀랬던 부분입니다. 번역을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원문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상월스님 같은 분이 많으시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적어도 출가 수행자라면, 이 정도 법력은 되셔야 할 겁니다. 세간에서 힘들게 부처의 세계를 이어가는 범부들에게, 그래서 방황할 때, 밝은 눈으로 명
확한 길을 제시해 주실 수 있어야 정말 공부 잘하신 수행자라 할 수 있다고 저는 봅니다.

 

중생이 도움을 요청할 때, 중생들이 고해에서 허우적거릴 때, 공부인이라면 그 때 정말 도움을 주실 수 있어야 합니다. 맨날 청정 세계에서 당신의
삼매에만 빠져 법열만 좋아하고, 정작 중생이 울부짖을 때 하등의 도움도 주실 수 없다면, 과연 그 공부가 누구를 위한 공부, 무엇을 위한 공부이겠습니까???

 

그러니 유마거사는 무엇이 보살의 번뇌요 보살의 지해냐는 물음에 '선미(禪味)에 탐착하는 것은 보살의 구속(번뇌)이요, 방편의 도움을 받아 세상에 뛰어드는 것은 보살의 해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원효스님은 "수다원은 (선정에서)8만겁을 깨어나지 못하고, 아라한은 2만겁, 벽지불은 십천 겁 동안이나 열반에 머물러 깨어날 줄 모른다 "며 일갈을 하시는 거겠지요...^^

아랫도리 / 문성해


 



신생아들은

보통 아랫도리를 입히지 않는다
대신

기저귀를 채워 놓는다
내가 아이를 낳기 위해 수술을 했을 때도

아랫도리는 벗겨져 있었다

할머니가

병원에서 돌아가실 때도 그랬다
아기처럼 조그마해져선

기저귀 하나만 달랑 차고 계셨다

사랑할 때도 아랫도리는 벗어야 한다
배설이 실제적이듯이

삶이 실전에 돌입할 때는

다 아랫도리를 벗어야 된다

때문에

위대한 동화 작가도
아랫도리가

물고기인 인어를 생각해 내었는지 모른다

거리에

아랫도리를 가린 사람들이

의기양양 활보하고 있다
그들이 아랫도리를 벗는 날은
한없이 곱상해지고

슬퍼지고 부끄러워지고 촉촉해진다
살아가는 진액이 다 그 속에 숨겨져 있다

신문 사회면에도

아랫도리가 벗겨져 있었다는 말이

심심찮게 등장하는 걸 보면

눈길을 확 끄는 그 말속에는

분명 사람의 뿌리가 숨겨져 있다


    <문성애 시인>



    경북 문경 출생
    영남대 국문과 졸업
    1998년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자라 』『 아주친근한 소용돌이』

    『입술을 건너간 이름』등


    <시작 노트>

    멀리 있는 풍경이 가까이 올 때가 있다.

    그럴 때 시가 된다.
    풍경이 앞서서 나를 지휘하며 갈 때

    시를 쓰는 사람은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된다.
    풍경은 그 속에 수많은 시를 숨겨 놓고

    여간해선 그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무리

    전후 사방에서 펜촉으로 을러대고

    쑤셔 대어도

    결코

    빗장을 열지 않는
    그 앞에서 얼마나 많은 목숨들이 산문이

    되어 갔던가.

출처/문성애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