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 죽어야 한다는 의미는

2014. 7. 23. 17:5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728x90

 

 - 故 대행스님.

 

 

세 번 죽어야 한다는 의미는

 

 

문 : 스님의 법문집을 보니까 불법공부의 과정을 3단계로 나누어 설명하셨는데

요지는 ‘세번 죽어야 한다’인 것 같습니다. 제 나름으로 이해하기엔

첫째, 참나의 발견 둘째, 불이법의 터득 셋째, 보살도의 완성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세번 죽어야 한다는 말씀에 대해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 성주현·충북 음성군 대소면 -

 

답 :

첫째는 죽어야 나를 본다 한 것이고,

둘째는 나와 너가 함께 죽어야 더불어 둘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한 것이고,

셋째는 일체와 더불어 죽어야 나툼의 도리를 안다고 한 것입니다.

이 세 단계를 체험해야 비로소 구경각을 이루어 대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항상 말씀드렸지요. 내가 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상대가 있고 상

대가 있기 때문에 일체만법이 나로 인해 돌아간다고 말입니다.

그렇듯 모든 게 나로 인해 벌어지니 나를 다스리면서 안팎의 경계를

다 내면에 놓으라는 것이지요.

 

놓는다 함은 곧 나라는 생각, 아상의 죽는 연습이 됩니다.

처음에는 잘 안되겠지만 모든 헌 쇠붙이를 용광로에 쓸어 넣듯이

밖에서 오는 경계나 안에서 오는 경계를 다 놓으라는 것입니다.

 

공부를 해 나가다보면 뜻밖의 경계들이 다가오기도 하지만 다 나를

공부시키려고 이러는구나 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것 또한 놓고가야 합니다.

그렇게해서 나라는 생각, 나의 것이라는 집착이 떨어져야 합니다.

죽어야 너를 보리라 한 것은 용광로에 헌 쇠붙이를 쓸어넣었더니

새 쇳물이 되어서 나오듯이 일체 경계를 나온 자리에 되놓으니까

참성품이 발현되더라 하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되고 나면 또 나와 대상이 둘이 아닌 도리를 알기 위해 다시 놓아야 합니다.

참 성품자리에는 너·나의 구별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도 그 자리에 놓고 너도 그 자리에 놓는 작업을 해야 하지요.

나는 그 자리를 주인공이라 합니다만 네 주인공 내 주인공이 아니라 한 주인공이니

나·너를 둘로 보는 생각이 죽어야 불이(不二)의 도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둘 아닌 도리를 알았다면 둘이 아닌 나툼의 도리까지 터득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이 건져달라고 할 때는 사람 속으로 들어가 하나가 되고

소·돼지가 건져달라 할 때는 소·돼지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나무속, 풀 속으로는 못들어 가겠습니까? 그쯤 되어야 이름해서

구경각이라 할 수 있고 삼세·삼계를 통달해 자유자재하다 할 수 있지요.

부처님께서 천백억 화신으로 나투신다 함은 바로 그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한 생각은 체가 없어서 물바퀴 불바퀴 속을 서슴치않고 드나들 수 있고

우주 삼천대천세계를 그대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습니다.

 

재차 말씀드리지만 아무리 놓으라는 말을 여러 번 해도 사람들은 좀처럼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잔뜩 움켜쥐고 착을 두고 욕심을 내면서

아상과 아집에 빠져 연방 ‘내가… 내가‥’ 하며 살고 있으니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요.

 

그래서 놓아라 놓아라 하다가 또 죽어라, 죽어야 본다고 하고

3단계로 나누어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3단계도 이미 3단계가 아닙니다.

그냥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이것이 옳으냐 저것이 옳으냐도

아니고, 내면이냐 바깥이냐도 아니고 모두가 아닐 때 비로소 나 아닌 게 없구나

하며 통달하게 되니까 말입니다.

 

아무튼 공부하시는 분들이 이 세 가지 소식을 안다면 나와 일체가 같이 동등하고

우주 천하 전체가 도량 아닌 곳이 없고 일체 천하만물이 나 아님이 없고

모두 내 아픔 아닌 게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공부를 잘 하시게 되면 이 중요한 시대에 살면서 마음의 법으로써

일체를 건질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그런 분들이

마음을 내고 들이는데 따라 그대로 참마음이 거기에 응해주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사람을 건지려면 그 사람 속으로 들어가고 돼지를 건지려면 돼지

속으로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이미 둘이 아니기에 막강한 나툼의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내는대로 산신으로도 응하고 관세음보살로도 응합니다.

 그러나 어떤 모습이든지 다 참성품의 나툼인 것이니 상대로 보고 둘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나툼이란 부처님께서 한 발 내디디시는 보살행과 같은 것이기에 진실로 나와 너가

하나 되고 세상의 아픔과 내 아픔이 하나 되는, 그야말로 차별이 무너지고 다같이

평등한 자리가 되는 그런 도리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참도리를 증득했다 하는 것은 결코 자기만의 개별적인 완성이 아니라

전체가 한데 합쳐진 다같이 돌아가는 완성인 것입니다.

고로 내가 죽어 나를 보는 첫 단계를 공부의 전부로 안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 전부를 맛보는 게 못되고 다만 일부를 아는데 불과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구경각, 해탈 열반의 도리를 설하셨습니다.

 

 

 

- 대행스님의 <생활 속의 불법 수행>(여시아문 刊) 중에

★ ◆열복(熱福)과 청

 

열복(熱福)과 청복(淸福)

 

 

다산 정약용은 사람이 누리는 복을

열복(熱福)과 청복(淸福) 둘로 나눴다.

 

열복은 누구나 원하는 그야말로 화끈한 복이다.

높은 지위에 올라 부귀를 누리며

떵떵거리고 사는 것이 열복이다.

 

모두가 그 앞에 허리를 굽히고,

눈짓 하나에 다들 알아서 긴다.

 

청복은 욕심 없이 맑고 소박하게

한세상을 건너가는 것이다.

가진 것이야 넉넉지 않아도

만족할 줄 아니 부족함이 없다.

 

열복(熱福)과 청복(淸

 

 

조선 중기 송익필(宋翼弼)은

'족부족(足不足)'이란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군자는 어찌하여 늘 스스로 만족하고,

소인은 어이하여 언제나 부족한가.

 

부족해도 만족하면 남음이 늘상 있고,

족한데도 부족타 하면 언제나 부족하네.

 

넉넉함을 즐긴다면 부족함이 없겠지만,

부족함을 근심하면 언제나 만족할까?

 

(중략)

 

부족함과 만족함이 모두 내게 달렸으니,

외물(外物)이 어이 족함과 부족함이 되겠는가.

내 나이 일흔에 궁곡(窮谷)에 누웠자니,

남들이야 부족타 해도 나는야 족하도다.

 

아침에 만봉(萬峰)에서

흰 구름 피어남 보노라면,

절로 갔다 절로 오는 높은 운치가 족하고,

저녁에 푸른 바다 밝은 달 토함 보면,

가없는 금물결에 안계(眼界)가 족하도다."

 

구절마다

'족(足)' 자로 운자를 단 장시의 일부분이다.

청복을 누리는 지족(知足)의 삶을 예찬했다.

 

열일곱번째 마디 -  청
 

다산은 여러 글에서 되풀이해 말했다.

 

"세상에 열복을 얻은 사람은 아주 많지만

청복을 누리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하늘이 참으로 청복을 아끼는 것을 알겠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청복은 거들떠보지 않고,

열복만 누리겠다고 아우성을 친다.

 

남들 위에 군림해서 더 잘 먹고 더 많이 갖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다 가지려고 한다.

 

열복은 항상 중간에 좌절하거나

끝이 안 좋은 것이 문제다.

요행히 자신이 열복을 누려도

자식 대까지 가는 경우란 흔치가 않다.

모든 사람이 우러르고,

아름다운 미녀가 추파를 던진다.

마음대로 못 할 일이 없고,

뜻대로 안 될 일이 없다.

어느새 마음이 둥둥 떠서

안하무인(眼下無人)이 된다.

 

후끈 달아오른 욕망은

제 발등을 찍기 전에는 식을 줄을 모른다.

잠깐만에 형편이 뒤바뀌어

경멸과 질시와 손가락질만 남는다.

 

그때 가서도

자신을 겸허히 돌아보기는커녕,

주먹을 부르쥐고 두고 보자고

가만두지 않겠다고 이를 갈기만 하니,

끝내 청복을 누려볼 희망이 없다.

 

 

진아와 연기아, 미륵반가사유상의 사유 - 강병균 교수   (0) 2014.07.30
현상(現象)과 본체(本體)   (0) 2014.07.23
오지여래 (五智如來) / 청화  (0) 2014.07.16
마음 거울에 비친 그림자들 / 법상스님  (0) 2014.07.16
무분별 후득지 / 空心님   (0) 2014.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