祈禱와 修行의 意味(생활속의 수행) / 법상스님

2014. 7. 23. 18:0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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祈禱와 修行의 意味(생활속의 수행) / 법상스님

 

 

基本的으로 祈禱는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길 원하면서 불보살님께 이루어질 수 있게 가피를

내려달라고 비는 것으로써 기복적이고 타력적인 요소가 강하다.

그래서 기도를 할 때는 관음기도, 지장기도, 미타기도 등 특정한 불보살님을 대상으로

기도 성취를 비는 경우가 많다. 불보살님께 가호와 가피를 내려 달라는 의미다.

反面에 修行은 마음을 텅~비우고 마음을 集中하고 마음을 專念하고 마음을 觀察함으로써

스스로 마음을 닦아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자력적인 정진을 말한다.

 祈禱를 통해서는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원하는 바를 얻는데 그 목적이 있다면,

修行을 통해서는 자비와 지혜를 깨닫는데 그 목적이 있다.

 

기도와 수행이 필요한 이유

 

아무리 修行을 하려고 해도, 당장에 경제적으로 먹고 살기 힘들거나, 의식주에 문제가 있거나,

큰 어려움과 역경에 처해 있는 사람이라면 수행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바로 그런 때에 당장의 눈앞에 있는 어려움을 먼저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은 수행보다 먼저

祈禱를 한다. 기도를 통해 일상에서 마주할 수 있는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원하는 바를

성취함으로써 수행할 수 있는 기초를 다지고, 수행의 터전을 닦는 행위가 기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기도라는 方便을 통해 결국에는 수행이라는 本質로 들어가는 구조를 띄고 있다.

 

한국불교의 기도와 수행 패턴

 

예를 들어 한국불교에서 중요한 신행의 패턴은 자녀를 위한 수능 기도, 남편을 위한 진급

발원기도,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한 천도기도 등을 통해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하는

祈禱 因緣으로 불교에 첫 발을 내딛는 불자가 많다.

그러나 그 원하는 기도 성취를 이룬 분들이 처음에는 기도를 위해 절에 왔지만, 기도를 하면서

불교가 무엇인지, 수행이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조금씩 깨달아 가게 되고, 불교를

자연스럽게 종교로 갖게 되며 그럼으로써 결국 기도로부터 시작해 결국 수행에 이르는

신행패턴을 볼 수 있다. 말 그대로 기도가 좋은 方便이 되는 것이다.

이런 순기능 면에서는 기도와 수행이라는 두 가지 실천행의 方便을 통해 비불자들을 불법으로

이끄는 효과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기도의 가피력

 

그렇다면 佛菩薩님께 기도하면 그 가피를 실제로 받을 수 있을까?

있다면 어떻게 기도의 가피가 내려질 수 있는 것일까?

[金剛經]에서는 ‘만일 형상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은 삿된

道를 행하는 것이니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라고 말한다.

佛菩薩님은 우리 外部에 있는 어떤 形像에 속해 있는 분이 아니다. 외부의 불보살과 내면의

三寶는 둘이 아니다. 그렇기에 참된 기도는 자기 내면의 근원적인 본래 힘을 되살리기 위한

자력적 행위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실 기도는 타력이라고 알고 있지만 자력과 타력 또한 둘이 아닌 것이다.

이처럼 기도는 바깥으로 특정 존재에게 성취를 비는 것이 아니라, 안과 밖이 다르지 않은

우리 根源의 힘이요 宇宙法界의 根源의 힘이 나의 기도에너지와 共鳴하고 가지력(加持力)을

形成하도록 하는 것이다.

 

加持力이란 나의 기도와 불보살님의 가피력이 '하나 되어 나타나는 힘'을 말한다.

사실 根源에서 살펴보면, 우리는 언제나 完全하며, 無限한 힘(力)과 智慧와 慈悲가 完全히

갖추어져 있는 存在다. 내가 바로 三寶요, 佛法僧 自性三寶가 이미 우리에게 갖추어져 있다.

다만 우리가 我相으로 인해 그 무한한 불법승 자성삼보의 능력을 내다 쓰지 못할 뿐이다.

불보살의 가피력이라는 것은 곧 우리가 그 무한한 힘과 능력과 지혜를 가져다 쓰는 能力인

것이다. 이처럼 불보살과 내가 둘이 아니며, 자력과 타력이 둘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가피력은 분명히 존재한다.

 

양자물리학에서 본 기도와 가피

 

量子物理學에서는 이 기도와 가피를 量子수프(quantum soup)라고 설명하는데, 卽 宇宙는

그 무엇도 될 수 있고, 그 무엇도 만들어낼 수 있는 無限 可能性의 量子수프 상태로 있다가

人間의 意識과 意圖가 일어나는 瞬間 그 무한한 가능성 중에 하나를 現實로 만들어낸다고 한다.

量子수프는 불교의 공성(空性)과도 같이, 텅~비어 있지만 그 속에 무한한 가능성의 현실이

갖추어져 있는 空間이다.

이러한 그 무엇도 될 수 있고 그 무엇도 만들어낼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양자수프는

우리가 원력을 세워 기도를 올림으로써 그 願力에 意識을 集中할 때 그 願力이 이루어지는

現實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양자물리학에서 설명하고 있는 가피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도의 가피력은 때때로 기적적인 치유를 가능하게도 하는데, 이를 양자물리학에서는

量子跳躍이라고 설명한다. 즉 우리는 하나의 우주에서 하나의 가능성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 존재하다가 때때로 다른 가능성으로 양자도약을 한다고 한다.

질병으로 고생하는 세계에 존재하며 그 속에서 괴로워하고 살다가 기도를 통해 불보살의 가피,

즉 量子跳躍을 통해 기적적으로 치유되는 세계로 갑자기 옮겨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양자물리학에서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양자도약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量自 얽힘(quantum entanglement)이라는 神秘한 連結性

때문이다. 고전 물리학에서는 粒子들이 서로 分離되어 서로 疎通할 수 없다고 여겼지만,

양자물리학에서는 粒子들이 아무리 먼 거리에 떨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超空間性, 非局所性으로

서로 連結된 것처럼 行動하는 神秘로운 連結性, 緣起性을 발견했고, 이를 양자 얽힘이라고 부른다.

 

波動은 곧 粒子와 다르지 않은데, 우리가 기도할 때 기도하는 정신적인 에너지 波動이

초공간성으로 연결된 이 우주법계 곳곳에까지 連結되어 힘이 미치게 되고, 비슷한 振動으로

波動하는 에너지들을 끌어당겨 共鳴의 법칙으로 서로 感應하게 함으로써 기도가 이루어지는

物質現實을 만들어 내게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기도를 할 때, 그 기도의 에너지 파동이 초공간성으로 인하여 우주 끝까지

연결되고 전파되어서 그 에너지 파동에 공명하는 입자들을 서로 신비롭게 연결시킴으로써

양자얽힘을 통해 기도가 현실로 이루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원력이 담긴 기도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원력을 세워 기도해야 한다는데 있다.

願力과 所願은 다르다. 所願은 아상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내가 잘 되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소망이지만 願力은 아상을 넘어 일체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이타적 서원이다.

개인적인 소원은 자신 개인의 복력을 가져다 쓰는 것이지만 이타적인 발원은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마음에너지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이 우주법계의 무량대복과 불보살님의 무한한

加被力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남을 위한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타적인 원력으로 ‘남을 위해 기도’하면, 곧 나부터 먼저 잘 될 수밖에 없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닌 하나이기 때문에, 상대를 위한 기도는 곧 나를 위한 기도가 된다.

이런 원력의 관점에서 본다면, 기도와 수행은 서로 다르지 않게 이어질 수밖에 없다.

수행의 목적 또한 고에서 벗어나는 것이지만, 고에서 벗어남으로써 일체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자비가 그 근원적 목적이기 때문이다.

 

간절한 기도의 함정

 

중생이란 끊임없이 무언가를 원하고 성취하며 살아나가는 존재다. 자기다운 삶을 통해 이 생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함으로써 이 세상에 자기다운 방식으로 기여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이 세상에 나온 목적이다. 그렇기에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기도를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기도에 과도하게 집착하면 그것 또한 문제가 된다.

과도한 집착은 곧 좋은 쪽으로 달리 말하면 간절한 기도다.

아이러니하게도, 기도가 너무 과도하게 간절해지면 오히려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기도하는 이의 마음은 願力을 내어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이지만,

‘절대 이것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고집스럽게 집착하는 마음과는 다르다.

 願力에는 執着이 붙을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선호’와도 같다. 과도한 집착이 아닌 순수한

선호이기 때문에 원력에 힘이 붙는 것이다. 집착을 한다는 것은 곧 거기에 ‘나’가 붙는다는 말이고,

그러한 아집은 이타적 원력이 아니다. 그렇기에 집착을 한다는 것은 이타적 원력이 아닌

이기적인 소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집착하면 오히려 거꾸로 이루어지기 쉽다. 執着하는 마음 裏面에는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과 두려운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두려워하게 되면 오히려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

이루어지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마음 속에서 演習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를 할 때는 집착하는 대신 순수하게 원할 수 있어야 한다.

‘과도한 집착’이 아닌 ‘순수한 선호’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쉽게 말하면, 기도를 할 때는

결과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불보살님께서 내려주는 것은 내 생각을 넘어서는 더 크고 깊은

의미가 있음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라는 대수용의 마음이 바탕 되어야 한다.

되도 좋고 안 되도 좋은 것이다. 다만 마음을 내어 선호하는 방향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도할 뿐,

결과는 모두 불보살님께 내맡기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 생각에 좋은 것과 불보살님의 지혜에서 정말 좋은 것은 다를 수도 있음을 받아

들이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원하는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宇宙法界에서는

지금 당장에는 이루어지지 않은 듯 해도 더 깊은 차원에서 또 다른 더 큰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하려는 意圖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이처럼 참된 기도인의 자세는 원력을 세워 기도하지만,

그 결과에 대해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이처럼 참된 기도는 집착과 아상의 확장을 위한 것이 아닌, 기도성취를 통해 이 세상에 기여하고,

중생을 구제할 수 있으며, 나다운 삶의 길을 찾아감으로써 깨달아가는 마음공부의 장이 된다.

 

기도할 때의 주의점

 

보통 기도하는 사람들은 기도를 하는 중에 계속해서 원하는 바를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염원하고

되뇌이곤 한다. 원하는 바를 부처님께 고하여 말씀드려야지만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도를 할 때는 처음과 끝에 발원문을 한번씩 읽을 수는 있겠지만, 기도 중간에 계속해서

원하는 바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기도 할 때는 염불이든, 주력이든, 다라니든, 절이든 그 기도수행에만 집중해야 한다.

원력을 이루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모든 생각들이 내려 놓아진 텅~빈 內面의 깊은 空間으로

들어감으로써 그 根源의 텅~빈 空의 자리에서 無限한 可能性이 깨어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無限한 可能性, 즉 一切唯心造의 現實創造의 힘은 생각이 많을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들이 놓여지고 순수한 원력만이 있을 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기도와 수행의 연결점

 

이런 점에서 참된 기도는 곧 수행과 다르지 않다. 다만 修行은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으며,

지금 이 자리에서 온전히 충분하고 완전함을 깨달으면서 오로지 그 순간에 바라는 것 없이

현존하는 것이라면, 祈禱는 그 순간에 깨어있는 기도를 하지만, 원력을 성취하기 위한 목적이

개입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즈음에 이르면 기도는 타력이며 기복이고 하근기 사람들의 전유물인 것 같고,

수행은 자력이며 상근기 수행자들이 행하는 수준 높은 것처럼 느끼는 분별심 또한 내려놓아야

할 것임이 드러난다. 참된 기도는 곧 수행과 연결되기 때문에, 바르게 기도를 하는 이는 곧

그 기도가 하나의 方便 修行이 되는 것이다.

 

사실 기도가 가장 잘 될 때는, 수행을 통해 온갖 번뇌 망상과 욕망이 내려놓아 진 때라고 할 수

있다. 수행을 통해 무수한 생각들이 잦아들고 마음이 고요해지면, 비로소 우리 意識 本然의

텅~빈 無限 可能性의 空間이 열린다. 그렇게 고요해진 무한가능성의 공간 마음에서 한 생각

일으켜 순수하게 바라는 기도의 원력을 일으킨다면 그 기도는 힘을 받는다.

무수한 생각과 번뇌들 속에서 기도를 하면 기도하는 바 그 한 가지에만 집중이 되지 않고

기도의 힘이 分散되지만, 수행을 통해 텅~빈 그 고요한 마음 위에 바라는 바를 일으켜 기도를

한다면 바로 그 한 가지에 모든 힘이 集中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수행과 기도는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래서 수행자는 따로 기도를 하려고 애쓰지 않더라도 ‘한 생각’ 일으켜 무엇이든 쉽게 만들어내고,

창조할 수 있는 힘을 지닌다. 늘 마음이 고요하기 때문에 그 고요한 마음 가운데서 일어난 한

생각에는 高度로 集中된 創造的 에너지가 모이는 것이다.

 

이처럼 기도와 수행은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듯 하지만, 참된 기도는 곧 수행과 연결된다.

그러나 처음 불교를 믿는 사람이나, 당장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수행하라고 하면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중생들의 관점에서 그들의 어려움을 힐링해주며,

원하는 바를 들어주는 기도의 신행 방식은 중생의 눈높이에서 중생을 구제하는 불교의 관점에서는

매우 뛰어난 方便의 信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부처님의 對機說法이며, 應病與藥의 方便說法인 것이다.

이렇게 기도를 통해 원하는 바를 이루고, 이타적인 원력을 세우며, 내면의 본래청정성을 일깨우다

보면 저절로 보다 깊은 깨달음의 세계와 이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바로 그 때 수행이라는 불교 본연의 공부가 보다 깊이 와 닿기 시작하는 것이다.

 

수행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하는가

修行은 왜 하는 것일까? 단순하다. 괴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祈禱에서 괴로움은 일상생활 속에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 등 일상의 소소한 괴로움이라면, 修行에서의 괴로움은 생노병사

등 인간의 근원적 괴로움들을 포괄한다. 부처님께서는 근원적 괴로움에서 벗어나 참된 열반을

얻을 수 있음을 설하시며 바로 그 고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道聖諦를 설하셨다.

그 도성제가 바로 ‘수행’인 것이다. 초기불교의

핵심 가르침은 곧 緣起, 無我, 慈悲에 있으며 이를 깨닫기 위한 實踐 修行法이 바로 道聖諦요

도성제가 바로 中道다. 중도를 세부적으로 구현한 것이 八正道이고, 그 구체적인 실천방법이

바로 四念處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中道와 八正道, 四念處가 바로 ‘修行’이라고 말씀하셨다.

중도는 양 극단에 치우침 없고 분별없는 행이다. 양 극단의 판단이나 분별들은 곧 집착을 가져오고,

실체화시킨다. 그렇게 집착하고 애쓴다는 것은 곧 그 대상을 실체적인 힘을 가진 존재로 실체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무아와 연기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중도에서 가장 중요한 실천은 곧 無分別과 無執着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바로 이처럼

‘분별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팔정도의 핵심 수행법인 정념이고 이를 보다 구체화시킨 것이

바로 사념처다.

 

조금 더 쉽게 단순화하면 中道, 八正道, 四念處 修行은 한 마디로 ‘분별없는 관찰’을 의미한다.

그러나 막연하게 분별없이 관찰하라고 하면 잘 집중이 안 된다. 어느 한 가지 ‘특정한 대상에

마음을 모아 집중(止)’함으로써 분별없는 관찰(觀)은 더욱 쉽게 이루어진다.

부처님께서는 그 집중적 관찰대상을 사념처 즉 ‘신수심법’이라는 네 가지에 두셨다.

그러나 대승불교로 넘어오면서 그 집중하는 대상은 조금씩 달라진다.

우리가 흔히 수행이라고 알고 있는 그 모든 것들 즉 절, 염불, 간경, 진언 다라니, 위빠사나,

간화선, 묵조선 등 그 모든 수행법들 또한 사실은 ‘분별없는 관찰’의 대상에 따른 수행법이며,

중도와 팔정도, 사념처에 이르는 길이다.

예를 들어 염불수행은 그 집중과 관찰의 대상이 부처님 명호인 것이다. 염불을 하면서 온갖

생각과 판단, 분별들은 내려놓고 분별없이 염불하는 소리를 관찰하거나, 염불하는 놈이

누구인지를 관찰하는 것이 바로 염불수행이다.

마찬가지로 절이나 간경, 진언, 다라니, 호흡관, 간화선 등도 근본에서는 마찬가지다.

절을 하면서 온갖 생각을 내려놓고 분별을 쉬고 절하는 몸의 동작에 집중하여 관찰하고,

간경이나 진언, 다라니를 외우면서 외우고 있는 것을 분별없이 관찰하는 것이다.

 

이처럼 온갖 번뇌, 망상과 생각을 그치고 마음을 모아 집중하는 수행을 지(止)라고 하고,

분별없는 관찰을 관(觀)이라고 하여, 지관겸수, 혹은 정혜쌍수라는 수행법이 나온 것이다.

이처럼 불교 수행은 부처님 명호나 진언, 다라니, 호흡, 화두 등 특정한 대상에 마음을 집중(止)

하여, 분별없이(中道) 관찰(觀)하는 것을 통해, 無我와 緣起, 中道와 空, 慈悲등의 思想을

깨달아 가는 것이다.,

현재 한국 불교의 핵심 수행법인 看話禪 또한 부처님의 수행법과는 다른 것이 아니라, 근본

원리의 연장선상에 위치하면서도 최상승 근기의 수행자들을 위한 역사적인 결실이라 할 수 있다.

간화선에서 간(看)은 ‘볼 간’자로 이 또한 본다는 것이다. 그저 자신의 본성을 보라고 하면

도대체 어떻게 봐야 하는지도 모르고, 어려워하기에, 話頭를 주고 그 화두를 의심함으로써

그 의심 자체를 보도록 하는 것이다.

화두를 통해 正定과 正念, 卽 止觀의 수행이 이루어진다. ‘분별없는 관찰’이 생겨나는 것이다.

 

올바른 기도와 수행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기도를 단순히 개인적인 소원을 이루는 것으로만 한정시켜 기복적인

불교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기도는 아직 수행으로 옮겨가기 어렵거나, 당장에 괴로움에

허덕이는 중생들을 위한 훌륭한 방편이며, 결국에는 기도로 시작하지만 기도 속에 담긴 불법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하고, 나아가 근원적인 생노병사의 고에서 해방되고,

일체 중생을 구제하리라는 참된 원력으로써 수행의 문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또한 수행에 대한 초기불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을 기본으로 하여, 그 이후에

역사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방편의 수행법들을 아울러 닦아가며, 자신에게 맞는 수행법을 찾아

나가되, 어느 특정한 수행법만이 최상이라고 하거나, 특정 수행법을 폄하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

불법은 일체의 상을 타파하는 종교이므로, 수행법의 높고 낮음이라는 상, 수행을 잘 하고

못한다는 상 등 일체의 상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기도와 수행의 목적, 자비의 실천

 

『金剛經』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하는 질문에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들을 내가 모두 완전한 열반에 들게 하리라”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설하고 계신다.

또한 『화엄경』에서는 보살이 발보리심을 내는 이유가 열 가지 있으니 그것은

“일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일체 중생의 고통을 소멸하기 위해, 안락을 주기 위해, 어리석음을

없애기 위해, 불지혜를 주기 위해, 공양 공경하기 위해, 법을 듣고 환희케 하기 위해, 부처님의

원만한 상호를 보기 위해, 광대한 지혜에 들게 하기 위해, 부처님의 힘을 나타내고 두려움을

없애주기 위해 보리심을 낸다”라고 함으로써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것의 중요성을 설하고 있다.

 

이처럼 모든 불교의 핵심에는 일체 중생을 구제하여 고통을 여의게 하고 완전한 행복인 열반에

이르게 하겠다는 誓願이 담겨 있다. 기도와 수행을 하는 목적 또한 이와 같다. 불교의 목적,

기도 수행의 목적은 자신 개인의 깨달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大慈大悲心에 있다. 일체 중생을 완전한 열반에 이르게 하려면 나 먼저 열반에 이르러야 하기

때문에 불교에서 그렇게 깨달음을 중시하는 듯 보이지만, 그 근원에서는 나의 깨달음이 먼저가

아니라 일체중생에 대한 구제가 먼저인 것이다.

그렇기에 기도든 수행이든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이타적인 원력과 서원이 바탕이 되었을 때

비로소 참된 기도와 수행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칭다오 잔교해변

 

중국인의 문화 (1)

 

중국인과 친구하기

 

중국 일본 한국 세나라는 공통점도 많고 차이점도 많다.

보통의 서양사람들은 세나라 사람을 구별하지 못한다.

우리 또한 미국인 영국인 프랑스인은 모두 비슷하게 보는 것과 마찮가지이다.

 

식사에 있어서도 세나라는 서로 다른데

중국의 식사는 혼자서 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나 일본의 경우 여러 사람이 식사를 하더라도 자기 몫이 정해져 있기 마련인데

중국은 적어도 3-4명은 함께 있어야 제대로 된 식사가 가능하다.

한가지 음식이 족히 4-5인분은 되기에 혼자서 한가지만 먹을 수 없고

 4-5가지 음식을 4-5명이 먹어야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인들과 식사하다보면 꼭 단독으로 2-3인이 식사하지 않고

주변인물 하다못해 운전기사나 별 상관없는 사람도 끼어서 식사하게 될 수 밖에 없다.

프랑스 등 유럽의 나라와 비슷하게 음식을 주문하는 것도 여간 여려운 일이다.

 

중국에 아무리 오래 산 중국사람도 못하는 세가지가 있다.

그 첫번째가 중국의 음식 종류를 다 먹어 보비 못하고 죽는다는 것이고,

두번째가 중국의 글자를 다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명함에 기재된 직위로 사람을 판단하기보다도

우리와 달리 자기들 나름대로의 경험과 觀相術과 느낌으로 상대를 판단하기를 좋아한다.

 

일반적으로세번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三思而行" (삼사이행)

세 군데의 품질과 가격을 비교 한 후 물건을 산다는 "貨比3" (화비3)

 중국인의 신중함이 체질화되어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길을 가르쳐 줘도 돈을 받는 나라 중국

 

중국에서는 하다 못해 길을 물어 봐도

두 세 사람한테 물어봐야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길을 물어도 모르면 모른다고 하기 보다는 잘못된 정보를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물론 길을 물어보면 친절하게 대답하지 않는 것도 그들의 특징중의 하나이다.

 

오죽하면 길을 가르쳐주고 돈을 받는 직업까지 있겠는가?

도시를 이동하다 보면 도시입구에 길을 가르쳐줍니다.

(带路)’ 라는 푯말을 들고 있는 이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들은 고속도로 초입에 진치고 전문적으로 길을 가르쳐 주고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보통 20-30위엔을 받고 입구에서 시내까지 길을 안내한다.

중국인들의 이러한 속성은 넓은 지리적 조건과 잦은 전쟁과 변란으로부터

자기의 재산과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서 형성되었다고 짐작된다.

 

이들에게는 서비스(SERVIS)라는 단어를 ‘복무한다’라는 단어로 표현하는데

 항상 댓가 없는 복무는 생각할 수 없고 길을 물어 보는 것도

당연히 대가가 지불되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시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길을 가르쳐주고 비용을 받는

이들이 항상  진치고 있는 것은 중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속을 좀처럼 내비취지 않는 중국인


또한 중국인들은 疑心이 많아 잘 속을 내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반드시 그렇다고 말할 수 없지만

우리나라 사람중에서 충청도와 가장 비슷한 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중국은 지역이 넓고 인구가 많아

사람을 사귀는데 좀더 愼重해야 하는 환경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저 친구 다신 안봐!’하고 지내도

곧 만나게 될 수 밖에 없는 환경이다.

특히 같은 업종이라면 거의 부딛히지 않고 살 수가 없지만

중국은 ‘저 친구 다시는  안 봐!!  하면 평생 보지 않고 살 수 있는 넓고 큰 나라다.

상점에서도 좋은 물건은 안에 감춰두고 난쁜 물건은 밖에 전시한다.

아는 사람이 오면 좋은 물건을 속에서 꺼내어 보여주기 때문이다.

 

 

중국에서의 친구

 

중국인은 혼자서는 식사하기가 편치 않기 때문에

별로 친하지 않아도 식사를 같이 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인들은 첫 대면에서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는 오랜 친구로서 대하지 않는다.

 다만 "認識" (=서로 통성명한 첫 대면 정도)일 뿐이다.

지속적인 만남을 통하여

好朋友 (좋은친구사이)와 老朋友(오랜 진짜친구) 사이로 발전하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한 번 "老朋友" "自己人"(자기사람: 믿을 수 있는 관계)이 되면

상대방이 背信하기 전에는 먼저 배신하지 않는다.

그러나 상대방이 친구로서 의리를 저버리거나 배신하면

반드시 어떠한 형태로든 보복을 하여 가슴에 쌓인 ""(분노, )를 쏟아 낸다.

 

그래서 쉽사리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지도 않을 뿐 만 아니라

용서하는데도 대단히 인색한 편이다.

잘못을 시인하면 용서 받기 보다는 벌을 받는 구조이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

복수는 짧은 시간 내에 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시간을 기다리며 때를 기다린다.

복수 방법도 우리와 사뭇 다르다.

직접 보복으로 자기의 존재가 드러남을 피하기 위하여

자기 인맥을 동원하여 간접적으로 행한다.

 "君子報仇十年不晩"(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은 것이 아니다)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중국인과의 대화


중국인은 서양인과 마찬가지로

첫 대면에서 눈의 시선을 피하는 사람을

자신을 속이고 있거나 자신감이 없는 인물이라고 여긴다.

첫 대면에서는 자기를 소개해 준 사람과의 관계와

자신에 관한 정보를 정확하게 자신감 있는 태도로 보여야 믿음이 가는 인물로 생각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기본적인 사항이 항상 깔려 있어

운전기사나 사장이나 같이 식사 자리에 배석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식사만 같이 하는 것이 아니고 업무적인 일까지도 거들거나 끼어드는 경우도 흔히 있다.

 

그리고 나이 차이에 있어서도 평등의 사상이 짙께 깔려 있어

10년 이나 20년 차이가 나도 서로 평등하게 자연스럽게 친구가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절대 복종의 학교의 선후배관계를 이들은 이상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특징이나 장점 회사 내에서의 위치와 업무의 성격 등에 대하여

 사실대로 이야기함으로써 이어지는 만남에서 신뢰할 수 있는 기반을 쌓아야 한다.

거짓으로 부풀려서 이야기함으로써 나중에 감당하지 못함으로써

수모를 당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조그마한 칭찬에 흥분하여 겸손한 태도를 잃어버리는 행동은 피해야 한다.

 대면한 자리에서는

그러한 불편을 절대 내색하지 않기에 더욱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칭다오대주산

 

중국인의 문화 (2)

 

소개신(편지)을 이용하라

소개을 안 받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다.


중국인들과의 만남에서 그들의 경계심을 허물고

마음 깊숙한 곳으로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은 "紹介信"(소개장)을 활용하는 방법이다.

중국에 장거리 여행에도 안전과 편리를 위해서 이 소개편지는 꼭 필요하다.

소개장을 써 줄 정도이면 소개를 받을 중국인과는 상당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소개장에는 자신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소개하는 사람이 필요로 하는 내용을 적어 부탁한다.

이런 소개장은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을 발휘한다.

우리의 전령이나 친구의 친구를 친구로 여기는 기본적인 풍습이라 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측량을 할때에도 그냥 돈만내면 측량을 해주지 않는다.

반드시 소개신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소개신은 개인이나 집단의 보증서와 같은 역할을하고

상대방에게 충분히 피할 길을 주는 도구가 된다.

혹 일이 잘못되어도 소개신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 책임을 면할 수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한두 번 만남에서 중대사를 논하거나 본심을 드러내 놓지 않는다.

우리 한국인들은 짧은 출장 일정 때문에,

혹은 급하게 성사시키고 싶은 심정에서 무슨 일이든지 성급하게 추진시키는 경향이 강하다.

 급하게 서두르면 항상 손해 보는 곳이 중국임을 잊으면 안 된다.

 빨리 일을 논하거나 이루어지면

 뭔가 잘못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 그들의 정서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상담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계약을 체결하고

음식점에서 술이나 한잔 하자는 식으로 빨리빨리 조급하게 서두르면

중국인들은 무슨 결점이나 잘못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중국인과의 협상에서 이러한 형태의 성향은 대부분 우리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온다.

 

삼국지에서 유비가 재갈량을 설득하기 위하여

 "三顧草廬" 같은 느긋함과 끈기가 필요하다.

중국인이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세 번 이상의 만남이 이루어진 후에야 가능하다는 것을 깊이 명심할 필요가 있다.
 

 

중국인과 식사초대

 

중국 사람들에게 초대를 받았을 때

먼저 비용을 지불하거나 N분의 1로 나누어 내는 DUTCH PAY는 금물이다.

인정을 중시하는 그들의 정서로는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통이 작고 야박한 사람으로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다.

 

그 쪽에서 한번 사면 이쪽에서도 한번 사고하는 것이 가장 좋은 관계이다.

누구의 초대라고 할 것이 없이 만났다면

당연히 겸손과 풍부를 알리기위해 서로 식사대금을 지불하려고 한다.

 중국인들도 우리와 같이 식사 후 서로 계산하겠다고 실랑이를 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

중국인들로부터 식사 대접을 받았을 경우에는

 다음에는 식사 초대하겠다고 말하고 식사는 식사로 갚는 것이 가장 좋다.
 
중국인들은 여간해서 자기 집에 친구를 招待해서 식사 대접을 하지 않는다.

식사에 초대되어 가족을 소개 받는다면

진짜 친구가 되었음을 확신해도 좋을 정도이다.

중국인들은 상대방을 자기 집에 초대하는 것에 대해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반대로 우리가 중국인을 집으로 초대하여 접대하면

상당히 좋아하고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필자도 학교 관계자나 선생들을 집에 초대하는 일이 잦은데 조금은 번거롭지만

그들과 친해지기는 아주 좋은 방법임에는 틀림이 없다.

 

초대를 하면 오고가는 교통편도 꼭 고려해 주어야 하고

돌아갈 때 택시를 잡아 비용을 지불하는 등 세심한 주의를 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개인적인 비용으로 택시를 타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식사를 초대 받았으나 택시비용을 자기가 지불하게 된다면

접대의 이미지는 거의 반감된다고 볼 수 있다.

식사는 만사


중국인만큼 식사를 교제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민족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먹고 합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는 말은

육체적으로 배를 채운다는 의미가 강하다.

 일하기 위해 먹는다기 보다는 먹기위해 일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식사도 거르면서 일을 한다는 것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목적이 전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식사시간을 가장 중심에 두고 시간을 배려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다.

그리고 중국인들은 같은 식탁에서 식사한다는 것은

배를 채운다는 의미보다 한 가족이라는 의식과 믿음과 우정을 확인 한다는 뜻이 더 강하다.

 

 대부분의 중국식당에서의 식사자리는 둥근 테이블에

 각각의 요리가 계속에서 나오는 풀코스 방식으로 나온다.

요리가 나오는 동안 사업 이야기보다 공동의 화제로 함께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중국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화제 거리에 대한 지식은

식탁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식사 때에 적당히 구사하는 중국말 몇 마디쯤은

숙지하고 있는 것이 좋고 그 효과 또는 대단하다.
주빈은 주인의 왼쪽 좌석에 앉도록 배려한다.

 코스 메뉴는 주인의 왼쪽 주빈부터 서빙하고

그 다음 주인에게 서빙하는 순서로 진행된다는 것도 알고 있어야 할 사항이다.

 
만약 첫 대면 후 저녁 식사 초대를 청하면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정중히 거절한다.

 처음 만난 사이에 상호 신뢰가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

흉금을 털어 놓고 대화할 수 없기 때문에 부담스러워 거절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이 청하면 인사 치레로 하는 초대가 아니라면

한두 번 거절하다가 응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다.

 

또한 한번 식사를 거절했다고해서 다시는 식사를 초대한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애초부터 식사에 초대할 의사가 없었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으니

 거절 후라도 두세번은 더 청해야

비로서 확실한 거절임을 알 수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식사자리와 술자리


중국에서 식사에는 반드시 술을 곁들인다.

비록 최근에는 크게 과음을 하지 않더라도, 꼭 매주는 포도주든 가벼운 술을 곁들인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술을 마실 때 우리와 같이 자리를 옮겨 다니며

 2, 3차 하는 식으로 술 마시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취중 무례에 대해서는 상당히 좋지 않게 본다.

 왜냐하면 술은 그냥 식사문화의 일부 이기에 술자리가 아니고 식사자리인 것이다.

그리고 식사자리가 아닌 술좌석에서

우리와 같이 잔을 돌리는 문화가 없으니 주의할 필요가 있다.

 

또한 조금 마셔 잔이 조금만 비워도 첨잔한다.

술을 따를 때 손가락으로 잔 주위 식탁을 두세 번 두드려 고마움을 표시한다.

잔을 부딪칠 때는

연장자나 직위가 높은 사람이나 주빈의 잔 높이보다 낮추어 부딪친다.

 

술을 따르는 일은 대게 엄숙한 자리이면

보통은 종업원이 각자의 자을 채워주는 것이 보통이기에

억지로 술병을 잡에 따르지 않아도 전혀 실례가 되지 않는다.

 

그들의 乾杯는 우리의 원샷과 같은 뜻이므로

반드시 한 번에 다 마셔야 하는 것이 보통이나,

건강이나 운전등의 이유를 대면 우리처럼 강권하지는 않는다.

 

 다만 동북지방의 경우는 막무가내로 술을 권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처음 첫 잔은 건배하는 수가 많고 첫 건배는 세번을 한다.

어째든 동북지방은 특히 술을 강권하는 사례가 많으며

북경이남으로 내려오면 술을 그리 심하게 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예외도 있어서 내몽고 지역의 유목민들은 만나자마자 술을 권하고

 권하는 술을 마시지 않으면 집안 출입조차 금하고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여긴다.

그리고 술좌석에서 만취하여 쓰러지는 사람을 신용한다.

왜냐하면 유목민들은 다른 유목민들과의 끊임없는 약탈과 피 약탈 관계에 있었기에

 타인의 出現에 대한 敵對感이 강하다.

 

집안에 들어서는 외지인에게 독주를 한숨에 들이키게 하여 취하게 함으로써

상대를 武裝解除 시킴으로써 안심하는 것이다.

술자리에서 취하여 쓰러지면

이 사람은 나를 완전히 믿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술을 마시면서 여러가지 상담이나 의견을 주고 받기는 하지만

직접적인 상담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중국인들은 술좌석에서 공식적으로 공적인 일을 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즐겁게 먹고 마시면서 서로의 신뢰와 우정을 돈독히 하면서

 그 시간을 느긋하게 즐긴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너무 직접적으로 술좌석에서 협상을 진행하면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여기 될 수 있다.

세계에서 담배 소비가 가장 맣은 나라 중국-담배는 기본

 

중국인들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담배를 즐기는 골초이다.

그래서 첫 만남에서 담배를 권하는 것은 거의 일상화 되어있다.

사무실이나 술좌석에서 담배를 잘 돌리는데

권할 때 받아 피우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다.

차라리 담배를 권할 때 자기의 담배를 꺼내면서

자기 것을 피우겠다는 식의 거절은 예의를 무시하는 행위로 받아들일 소지도 있다.

 

결론적으로 보면

세계의 어느 국가 어느 민족과의 만남에서라도 딱 들어맞는 예절은

겸손함과 친절 그리고 정직한 마음가짐이다.

그리고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한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중국은 국토가 넓고 인구가 많아 우리와 같이 단숨에 마음을 내보이지 않고

단숨에 만리장성을 쌓는 친구가 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일단 친구가 되면 오래가는 것이 보통이다. 

 

김준봉(한중미래경영연구소장)